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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N2C)
UCI | I801:1501001-001-V001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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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창덕궁 4부 정조, 창덕궁에서 만나다 | ||||||||||||||||||
콘텐츠 유형 | 동영상 | 언어정보 | 국문 | ||||||||||||||||
생산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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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정보 | 조선 제22대 왕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설치하라 명한다. 그리고 3개월 후 부용지 북쪽 언덕에 규장각이 완성된다. 이른바 조선 후기 르네상스의 첫 출발이었다. 이후 이 일대에 국내외 서적을 갖춘 서고와 특별도서관 등 규장각 부속 건물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이곳은 정조를 중심으로 젊은 인재들이 새로운 학문과 문물을 배우고 익히는 중심 공간이 된다. 이후 규장각은 인정전 서쪽으로 옮겨지고 다른 건물 역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지만 창덕궁 곳곳에는 아직도 정조가 꾸었던 꿈과 야망이 그대로 남아 있다. 창덕궁으로 가서 | ||||||||||||||||||
내용 | 조선 제22대 왕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설치하라 명한다. 그리고 3개월 후 부용지 북쪽 언덕에 규장각이 완성된다. 이른바 조선 후기 르네상스의 첫 출발이었다. 이후 이 일대에 국내외 서적을 갖춘 서고와 특별도서관 등 규장각 부속 건물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이곳은 정조를 중심으로 젊은 인재들이 새로운 학문과 문물을 배우고 익히는 중심 공간이 된다. 이후 규장각은 인정전 서쪽으로 옮겨지고 다른 건물 역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지만 창덕궁 곳곳에는 아직도 정조가 꾸었던 꿈과 야망이 그대로 남아 있다. 창덕궁으로 가서 정조를 만나보자. | ||||||||||||||||||
대본 정보 | 새 날고/ (조금 빨리) 창덕궁 후원의 존덕정. 규모는 작으나, 겹지붕에, 청룡과 황룡이 어우러진 천정이, 예사 정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더욱 주목을 끄는 것은 현판에 씌인 글. 내용인즉 ‘뭇 개울들이 달을 받아 빛나지만 달은 오직 하나뿐’이라...여기서 ‘뭇 개울’은 신하요, ‘하나뿐인 달’은 왕을 이름이니 신하들이 왕을 따르는 것은 합당한 이치라는 것이다. 글의 주인은 바로, 강력한 왕권을 꿈꾸던 조선 제22대 왕, 정조였다. 4부. 정조, 창덕궁에서 만나다 부용지 보이면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휴식 공간 위주였던 창덕궁 후원은 크게 탈바꿈한다. 부용지 자막 나오면 즉위 원년, 정조는 이곳에 규장각을 설치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리고 3개월 뒤, 부용지 북쪽 언덕에 2층 누각인 주합루가 완성됐다. (지미집 멈추는 부분에서미리 멘트 시작) 주합루로 오르기 위해서는 왕은 어수문을, 신하들은 양 옆의 작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처럼 왕과 신하의 관계도 이같다는 뜻의 어수문. 신하들은 고개를 숙여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 작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이는 정조가 신하들에게 전하는 또 하나의 메시지였다. 어수문을 들어서서 바라본 주합루 어수문을 들어서서, 다시 계단을 몇 단 더 올라야 다다를 수 있는 곳. 주합루다. 규장각(연두색 창살) 1층이 규장각, 2층이 주합루다. 규장각 내부 왕의 글이나 글씨 등을 보관하는 규장각에 대한 논의는 이미 숙종대부터 있어왔으나 유신들의 반대로 시도되지 못했다. 하지만 정조에 의해, 작은 서고에 지나지 않던 규장각은‘국내외 도서를 다수 소장한 왕립도서관’으로, ‘학문연구기관’으로, 나아가 왕의 비서실이자 정책개발실로 기능이 확대된다. 2층 주합루로 주합루 현판 2층 주합루는 열람실로 사용됐다. 이후 이 일대에 우리 나라 책을 보관하는 서고와 중국책을 보관하는 특별도서관 등 규장각 부속 건물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이곳은 정조를 중심으로 젊은 인재들이 새로운 학문과 문물을 배우고 익히는 중심 공간이 되었다. 창덕궁 후원이 왕의 학문 연구 공간이자 혁신 정치의 중심 공간으로 새롭게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주합루 실내 팬 시작 그렇다면 정조가 이렇듯 규장각 설치를 서두른 까닭은 무엇일까? 주합루+푸른 하늘 선왕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로 인해 출발 기반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정조에게, 왕권 확립은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이를 위해선 새로운 개혁 정치를 도울 젊은 인재가 필요했고, 그런 의미에서 규장각은 학문 연구와 동시에 왕을 가장 가까이 보필하는 국왕 직속기구였다. 근무 수칙 현판 뒷날, 정조가 만든 규장각 학사들의 근무 수칙이다.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마라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의자에 앉아 있으라 아무리 높은 벼슬아치가 와도 규장각 전임자가 아니면 들어오지 말라 공무가 아니면 근무지를 떠나지 말라. 주합루 규장각 학사들에 대한 정조의 지원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서향각 현판 보이고 주합루 서편의 서향각. 주합루 등에 보관돼 있던 많은 책들을 매년 4개월에 한번씩 내어 말리던 곳이니, 이름 그대로 책향기가 나는 집이다. 대부분의 부속 건물들이 사라지거나 옮겨진 반면 지금도 주합루 서편을 지키고 있다. 하늘에서 나무로 규장각이 너무 후원 깊숙이 있다는 지적에 따라 정조 5년, 규장각은 인정전 서쪽, 금천 건너로 옮겨진다. 정조는 이곳에 규장각의 다른 이름, ‘이문지원’이라는 편액을 친히 내리고 수시로 들러 학문을 논했다. 봉모당 팬 이렇게 양성된 규장각 학자들은 정조대의 문예부흥을 주도하면서, 하늘에 하나뿐인 달, 정조의 왕권안정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창덕궁 곳곳에 심겨졌던 정조의 이러한 꿈과 야망은 그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린다. 야경 (에필로그)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 정조가 살았던 창덕궁. 오늘, 그곳에 가면 정조를 만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