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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궤 1부, 조선 기록문화의 꽃 의궤(儀軌)_1280X720.mp4 172.12 MB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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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
UCI I801:1501001-001-V00417
제목 의궤 1부, 조선 기록문화의 꽃 의궤(儀軌)
콘텐츠 유형 동영상 언어정보 국문
생산자 정보
생산자 정보
생산자 생산일자
미디어소풍 2011-10-26
기여자 정보
기여자 정보
역할 정보 기여자 명
제작사 미디어소풍
프로듀서 미디어소풍
기술 정보
기술 정보
기술 영역 기술 내용
기타정보
내용정보 보물 제1901-1호 조선왕조의궤
내용정보_신규
역사정보 조선시대
역사정보_시대국가
인물정보
지리정보 서울특별시 관악구
요약 정보 조선시대, 왕의 일생은 국가의 중대한 의례였다.왕이 될 아이가 태어나 결혼을 하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이 모든것은 국가적 의례였고 하나하나 빠지지 않고 글과 그림으로 기록했으니,이것이 바로 조선 기록문화의 꽃 의궤(儀軌)다.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6월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의궤.과연 이것은어떤 형식으로 어떻게 기록된 것일까.함께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영월정종대왕태실 및 태실비 방문정보>위치: 강원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산133 연락처: 영월군청 033-37
내용 조선시대, 왕의 일생은 국가의 중대한 의례였다.

왕이 될 아이가 태어나 결혼을 하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이 모든것은 국가적 의례였고 하나하나 빠지지 않고 글과 그림으로 기록했으니,

이것이 바로 조선 기록문화의 꽃 의궤(儀軌)다.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6월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의궤.

과연 이것은어떤 형식으로 어떻게 기록된 것일까.

함께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영월정종대왕태실 및 태실비 방문정보>



위치: 강원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산133

연락처: 영월군청 033-370-2100

주변 볼거리: 관풍헌, 청령포, 영월장릉, 보덕사, 화장암

홈페이지: http://www.ywtour.com/kor/CMSView.php?pid=198
대본 정보 -조선시대, 왕의 일생은국가의 중대한 의례였다.

(*조금 흘리고)-왕이 될 아이가 태어나자라서 결혼을 하고.. 임금의 자리에 오르고..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그 모든 것은 국가적 의례였고,조선은 의례의 전모를 하나도 빠짐없이문자와 그림으로 기록했으니..그것이 바로 기록문화의 꽃이라 불리는의궤다.

-조선시대 궁중문화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예술의 원형을 내장하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 의궤!상상 속에서만 가능했던 조선시대 궁중문화가의궤를 통해 현실이 된다.

의궤는 의식과 궤범을 합한 말로서,‘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거행된 여러 가지 의식의 전모를 소상하게 기록했다.현재 남아있는 것은 17세기 이후의 것으로 모두 560여종, 3천500여책,왕실의 혼사, 장례, 건축, 잔치, 등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여 유사한 행사가 있을 시참고하도록 했다.

-왕실의 각종 의식을 치르기 위해서는 ‘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했는데, 이곳에서 의식의 전 과정과 의궤 제작까지 담당했다특히 의궤는 문자기록에만 그치지 않고 의식에 쓰인 도구와 장면을 그림으로 기록했다.

-그림을 통해 우리는 의식이 진행되던 당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으며,문자 기록만으로는 미처 파악할 수 없었던 물품의 세부사항까지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기록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진 종합 행사 보고서, 의궤!이러한 유형은 동서양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2007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조선시대 의궤 중에는 국왕의 일생과 관련된 의궤가 많다.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정조의 태실,정조의 태를 봉안하고 표석을 세운 곳으로정조가 태어난 다음해인 1753년에 만들어졌다.왕실에서는 태가 국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여 중요하게 다루었다.따라서 왕실의 아이가 태어나면태실도감이 설치됐고, 태실을 조성하는 전 과정을 의궤로 남겼다.

정조의 태실의궤에는 태실 조성에 쓰인 석물의 모습과 크기, 두께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태실 조성에 동원된 인원은 모두 4300여명!주목할만 한 점은 이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양반, 천민 할 것 없이 모두 기록한 했다는 것이다.이러한 실명기록은 행사 물품의 제작이나 공사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그 책임 소재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의궤 중에는 가례에 대한 기록이 20여 건 남아있다.

-현대에 들어 재연된 정순황후 가례행사.가례도감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고스란히 재연했다.-정순황후 가례도감의궤에는 왕비의 간택을 비롯해혼인에 필요한 각종 물품, 동원된 인원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흥미로운 점은의궤 마지막 부분에 행사의 하이라이트인‘반차도’를 넣어 그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는 것이다.정순황후 가례도감의 반차도는국왕이 왕비를 맞이하러 가는 친영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런데 반차도는 친영을 치루는 날 당일에 그린 그림이 아니라 사전에 제작된 것이다.참여 인원과 물품을 마치 실제상황처럼 미리 그려서실제 의식 때 참가자들은 반차도를 참고하여자신의 역할을 숙지했다.

-반차도 제작은 도화서란 관청에 소속돼 있는 전문 화가, 즉 화원들이 담당했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물감이 없었던 조선시대, 어떤 방식으로 채색을 할 수 있었을까?

-의궤에는 반차도 제작에 사용한 재료들이 잘 나타나 있는데색을 만들어 내는 광물이나 식물과 같은천연재료들을 사용했다.천연재료는 반차도가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화려하고 은은한 색감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한 호흡 주고)-왕의 장례에 대한 반차도는 보다 더 세밀하게 기록됐다.-왕이 죽으면 국장도감이 설치돼 장례에 대한 모든 과정을 담당하고 한달 후 발인이 시작된다.

-정조의 국장행렬을 그린 반차도는총 40면으로 1440명의 인원이 그려져 있다. 국장과 관련된 반차도는 발인 열흘 전까지 완성해야 했다.그 어느때보다 엄숙하고 장엄하게 치러야 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모든 참가자들은 반차도에 그려진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철저하게 숙지했다.

-그렇다면 조선은 왜 이렇게 다양하고 방대한 양의 의궤를 기록했던 것일까?그것은 의식이나 행사의 모범적인전례를 만들어 후대 사람들이 예법에 맞게 의식을 치를 수 있도록 하려는 의미를 담고 있다.뿐만 아니라 후대에 비슷한 의식이 열릴 경우, 의궤를 참고해 시행착오를 줄이게끔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의식의 모범이 되었던 기록문화의 꽃, 의궤! 오늘날 조선의 궁중문화가생생히 재현될 수 있는 것은선인들의 철저한 기록정신으로 만들어진 의궤가 있었기에가능한 것이다.방대한 양의 문자와 그림이오늘도 우리를..화려한 궁중문화 그 한가운데로 안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