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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궤 3부, 국왕과 신하의 활쏘기 대회 대사례_1920X1080.mp4 164.30 MB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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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
UCI I801:1501001-001-V00419
제목 의궤 3부, 국왕과 신하의 활쏘기 대회 대사례
콘텐츠 유형 동영상 언어정보 국문
생산자 정보
생산자 정보
생산자 생산일자
미디어소풍 2011-11-09
기여자 정보
기여자 정보
역할 정보 기여자 명
제작사 미디어소풍
프로듀서 미디어소풍
기술 정보
기술 정보
기술 영역 기술 내용
내용정보 보물 제1901-3호 조선왕조의궤; 사적 제143호 서울 문묘와 성균관
역사정보 조선시대
지리정보 서울특별시 관악구, 서울특별시 종로구
요약 정보 국왕과 문무관리들의 활쏘기 대회 대사례!

영조 임금은 이를 의궤로 기록하여 남기기를 명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이 활쏘기 대회를 기록한 것일까?

조선시대 활쏘기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으며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이제 하나하나 알아가며 당시의 모습을 그려보자.



<성균관 방문정보>



위치: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3가 53번지

연락처: 02-760-1472

주변 볼거리 : 창덕궁, 창경궁, 종묘, 경복궁, 운현궁

홈페이지: http://www.skkok.com/sub1/sub1_9.asp
내용 국왕과 문무관리들의 활쏘기 대회 대사례!

영조 임금은 이를 의궤로 기록하여 남기기를 명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이 활쏘기 대회를 기록한 것일까?

조선시대 활쏘기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으며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이제 하나하나 알아가며 당시의 모습을 그려보자.



<성균관 방문정보>



위치: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3가 53번지

연락처: 02-760-1472

주변 볼거리 : 창덕궁, 창경궁, 종묘, 경복궁, 운현궁

홈페이지: http://www.skkok.com/sub1/sub1_9.asp
대본 정보 (*앞에는 뭔가 긴장감있는 음악으로 흘리고)

-쏘는 족족 명중이었다.

-200여 년 만에 열린국왕과 군무관리들의 활쏘기대회, 대사례 ! -당시 영조는 이것을 의궤로 기록하고 대사례의궤라 이름 붙였는데,영조는 무슨 이유로 활쏘기대회를 의궤로 남겼던 것일까?

-영조 19년, 궁궐을 나온 왕의 가마는 성균관에 도착했다.-곧이어 영조는 성균관 명륜당으로 들어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하들과 유생들을 격려한 후, 본 행사인 활쏘기대회,즉 대사례를 시작했다.

-예로부터 선비들은 활쏘기를 심신단련과 정신수양의 목적으로 중요시했다. 특히 활쏘기를 통해 선비들이 진정으로 이루고자 했던 것은 인격의 완성이었다.

-활쏘기는 자신을 바로잡은 뒤에야 화살을 날리고, 발사한 화살이 설령 표적에 맞지 않더라도 활과 화살을 핑계 삼지 않아야 한다. 또한 상대와의 경쟁에서 지더라도 상대를 원망하지 않고 잘못의 원인을 자신에게 찾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선비들은 활쏘기를 즐겼으며,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여 스스로를 바로잡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하여 조선의 왕들도신하들과의 활쏘기를 대사례라는 이름을 붙여국가적 행사로 중요시했고,폭군으로 불리는 연산군도 대사례를 통해 신하들의 품성을 눈여겨 봤다.

사람의 행동을 살펴보는데 활쏘기보다 좋은 것이 없다. 그것으로 하여금 사람의 착함을 알아내고 선비의 재질을 가려 뽑아 교화 가운데서 함양되게 한 것이니.. [연산군 일기 8년 3월 2일]

-백성의 교화에 전력하던 군주,영조에게도 당연히 대사례는 단순한 활쏘기 행사가 아니였다.-사람의 품성을 바로잡는 행동으로 인식되던 활쏘기를 통해 관리들의 정신 자세와 기강을 확립하고, 국왕의 교화가 만백성에게전파되게 하려는 정치적 포부가 함축돼 있었다.

즉, 영조에게 있어 대사례는왕권강화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특히 영조는 한동안 중단됐던 대사례를 200여 년 만에 다시회복시켰다는 것을무척이나 감격스러워했다.그리고 이 행사를 특별히 기록과 그림으로 남길 것을 지시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대사례의궤’다.

대부분의 의궤가 행사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장면을 사전에 미리 반차도로 그려 넣은 것에 반해,대사례의궤는 당일 현장 상황을시간적 순서에 따라 모두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어사도, 시사도, 상벌도 하나씩 -대사례의궤는 왕이 활 쏘는 모습을 그린 <어사례도>, 신하들이 활쏘기인 <시사례도>, 결과에 따라 시상하는 모습을 그린 <상벌도> 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대사례 현장에는 홍살문을 세우고 악대를 배치해의식의 신성함과 분위기를고취시켰다.

-첫번째 그림, 왕의 활쏘기를 그린 ‘어사도’를 보면 임금을 위해 쳐 놓은 악차에 세 개의 단을 설치했했다.1단은 국왕의 자리,2단에는 임금의 활쏘기 도구들을 놓았고,3단은 종친 및 문무백관의 자리였다.-과녁은 어좌에서 남쪽으로 90보 거리에 설치했다-임금이 활을 쏠 때 쓰던 과녁을 웅후라 했는데, 붉은 바탕에 곰의 머리를 그렸다. 의궤에는 이 웅후를 만들 때 쓰인 재료, 크기까지 상세히 기록돼 있다.

-반면 신하들을 위해 준비된 과녁에는 사슴이 그려져 있다.-대사례는 제일먼저 왕의 활쏘기 시범이 있고 나면, 본격적으로 종친과 문,무신 30명이 활쏘기 시합을 시작한다.

-화살이 꽂히면 해당하는 방위의 깃발을 들었는데, 중앙에 적중하면 적색, 좌측에 맞히면 청색 과녁 위쪽을 맞히면 황색 등 맞히는 각도에 따라 깃발이 달랐다.

-그리고 참가자들의 명단과 과녁을 맞힌 횟수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흥미로운 점은 참가자들이 활을 잡았던 손이 왼손인지 오른손인지까지도 기록했는데 -전체 30명 중 왼손잡이가 12명으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까지도 알 수 있다.-활쏘기시합을 마친 후 시상식도 있었다.

화살을 적중시킨 사람은 옷감 등 다양한 상이 있었고, 맞히지 못한 사람은 벌주를 마셨다.

-의궤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4발 적중이 1등이었는데, 그 당시 1등은 5명, 그리고 한 발도 적중하지 못한 사람도 3명이나 있었다.

-행사 기록이 영구히 보존되길 바랐던 영조의 염원으로 만들어진 대사례의궤는 모두 5권의 책을 만들어 만들어, 한 책은 왕에게 바치고 각각 의정부, 사고, 예조, 성균관에 보관토록 했다.

-신하들의 품성을 다잡고군신 간의 화합의 수단으로 진행됐던 대사례! 그리고 그 현장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는 의궤!이처럼 의궤는 조선왕조의 크고 작은 행사를 마치 한 권의 그림책처럼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속에 담긴 조선의 이야기는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