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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
UCI I801:1501001-001-V00439
제목 성균관 1부 만학도 윤기, 조선 최고 대학을 가다
콘텐츠 유형 동영상 언어정보 국문
생산자 정보
생산자 정보
생산자 생산일자
미디어소풍 2012-06-19
기여자 정보
기여자 정보
역할 정보 기여자 명
제작사 미디어소풍
프로듀서 미디어소풍
기술 정보
기술 정보
기술 영역 기술 내용
기타정보
내용정보 사적 제143호 서울 문묘와 성균관
내용정보_신규
역사정보 조선시대
역사정보_시대국가
인물정보
지리정보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련 키워드 성균관;조선;대학
요약 정보 조선시대 최고의 대학이었던 성균관. 그곳에서 20여년간을 공부하면서 성균관 생활을 했던 윤기. 그는 성균관 유생들의 생활들을 기록하였다. 그의 책 무명자집 속 반중잡영을 통해 당시 성균관 유생들의 생활상을 살펴보고, 조선 최고의 대학이었던 성균관의 면모에 대해서 살펴본다. <성균관 방문정보>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3가 53번지연락처 : 02-760-1472주변 볼거리 : 성균관 내 대성전, 명륜당, 동재와 서재, 존경각관련 홈페이지 : http://www.skkok.com/default.asp
내용 조선시대 최고의 대학이었던 성균관. 그곳에서 20여년간을 공부하면서 성균관 생활을 했던 윤기. 그는 성균관 유생들의 생활들을 기록하였다. 그의 책 무명자집 속 반중잡영을 통해 당시 성균관 유생들의 생활상을 살펴보고, 조선 최고의 대학이었던 성균관의 면모에 대해서 살펴본다.



<성균관 방문정보>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3가 53번지

연락처 : 02-760-1472

주변 볼거리 : 성균관 내 대성전, 명륜당, 동재와 서재, 존경각

관련 홈페이지 : http://www.skkok.com/default.asp
대본 정보 조선 최고의 수재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부한 학문의 전당.

성균관은 조선 최고의 학자들이 교육하고 각종 특전이 주어진 교육기관이었다.

나라를 이끌 인재양성을 위해 국가적 핵심사업으로 운영된 성균관.500년전 조선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인 국립대학, 성균관을 만나보자.

태조 이성계는 대학을 세워유교의 부흥을 꾀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1398년, 고려말 개성에 있던 성균관을 이곳 명륜동에 옮겨 세웠다.조선 개국때부터 왕들은성균관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명륜당에 걸려있는 역대 임금들의 친필 휘호와 교시문에서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성균관에 대한 조선왕조의 관심과지원은 실로 대단했다

성균관은 나라의 인재를 양성해조선의 건국이념인 유교를 단기간 안에 정착시키기 위해 세운조선의 왕립대학이었다(보다가)성균관 대성전 앞마당에는 이런 역사와 설립목적을 분명하게 새겨놓은 비가 있다.

성균관을 지을 당시 규모는 96칸으로 국가예산의 절반이 투입된 야심찬사업이었다.

성리학을 부흥시키고 유교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겠다고 의지는그만큼 강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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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국가의 실현과 유교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조선의 국립대학. 성균관에선 어떤 교육이 이뤄졌을까.

이를 엿볼 수 있는 사료로 윤기가 남긴 시문집 ‘무명자집’이 있다이 안에 수록된 ‘반중잡영’에는 성균관 유생들의 생활상을 묘사한 220편의 시가 담겨있다.

이 시를 지은 윤기는 조선 영정조때 학자로, 1773년부터

1792년 문과에 급제할 때까지 20여년을 성균관 유생으로 지낸 인물이다

서른 세살 늦은 나이로 성균관에입학한 윤기. 그를 따라 성균관 유생들의 학창시절을 만나보자

입학시험인 생원진사시에 합격한유생들은 가장 먼저 성균관 중심에 있는 대성전을 찾는다.

공자를 비롯해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문묘다.이곳에서 유생들은 성현의 가르침을잊지않고 본받겠다는 의미로 인사를 올리는 ‘알성’을 한다. 사흘 안에 이 의식을 치러야 정식입학생으로 인정받았고, 입학 후에도 유생들은 매일 알성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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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의 아침은 북소리로 시작된다.

(북소리 한번 나고)북소리가 한번 울리면 잠을 깨고(두번 울리고) 두 번 울리면 의관을 갖추고

(세번 울리고) 세 번 울리면 식당으로 향했다.

(보다가)식당에 도착하면 식사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가 있었다.



도기라는 출석부에 우물정자 칸 속에 자신의 이름을 쓰고 수결하는 일로이는 점수로 매겨졌다.

아침저녁 하루에 두 번 출석을 하면 원점 1점을 주고, 300점이 넘어야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이런 원점이 과거당락을 결정짓기도 해, 유생들은 꼭 도기를 하고 밥을 챙겨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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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후엔 명륜당으로 향했다.이곳에서 유생들은 오전에는 박사들의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자신들이 배운 것을 복습했다.

유생들의 교과서는 사서오경이었다.모든 과목을 끝내는데 걸리는 산술적시간은 3년 9개월.그 기간 안에 논어와 맹자, 중용 등 까다롭고 난해한 유교경전을 이해하고 외우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여기에 자신의 생각까지 서술하는 제술까지 공부해야 했다.

까다로운 수업을 따라가려면 밤에도 책을 놓을 수 없었다.한자리에 오래 앉아 독서를 하다 과로로 죽는 이가 생길 정도로,지독한 공부벌레가 돼야 했다.

그러자 동재 기숙사 맨 끝에 특별한방이 생겼다. 갖은 약이 구비된 약방이 생긴 것이다.

나라의 동량이 될 유생들의 건강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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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관심은 이뿐만이 아니었다.성종은 1475년, 존경각을 짓고 만권의 책을 하사했다. 각종 교재부터 희귀 서적까지 비치돼 책을 마음껏 빌려볼 수 없던 유생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유생들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각종 혜택도 집중됐다. 학비는 물론, 학용품과 용돈까지 국가에서 지원했다.

성균관 유생들에게 필요한 식량과 물품 공급을 담당하는 기관인 양현고도 따로 설치해 운영했다.

조선팔도에서 왕에게 바치는 공물의 상당수가 이곳으로 들어왔다.

‘양현고에는 어진이 기르는 물품이 쌓였으니 조선팔도에서 바치는 공물의 절반이 이곳으로 들어온다.’

이런 교육환경 속에서 20여년을 보낸 윤기는, 마침내 1792년 장원에 급제한다. 20여년의 면학탐구가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조선의 모든 유생들이 입학해 공부하기를 꿈꾸었던 성균관.조선왕조의 대대적인 지원 속에 당대 최고의 교육이 이루어진명실상부한, 조선 최고의 국립대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