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이미지 및 저작권 정보(N2L)
| 대표이미지 | 저작권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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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 미디어소풍 | ||
| 전자자원소장처 | 미디어소풍 | ||
| 공공누리 저작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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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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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CL 정보 | |||
| 소스코드 | <iframe width="720px" height="480px" src="http://uci.k-heritage.tv/resolver/I801:1501001-001-V00536?t=3"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
관련 파일 및 자원정보(N2R)
| 번호 | 파일명 | 파일크기 | 다운로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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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도산서원 2부 스승을 향한 영원한 노래 도산서원_1280X720.mp4 | 151.71 M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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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도산서원 2부 스승을 향한 영원한 노래 도산서원_1920X1080.mp4 | 152.38 M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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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N2C)
| UCI | I801:1501001-001-V00536 | ||||||||||
|---|---|---|---|---|---|---|---|---|---|---|---|
| 제목 | 도산서원 2부 스승을 향한 영원한 노래 도산서원 | ||||||||||
| 콘텐츠 유형 | 동영상 | 언어정보 | 국문 | ||||||||
| 생산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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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여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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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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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정보 | 큰 스승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 뒤 제자들은 스승의 뜻을 잇고, 그 족적을 보호코자 서원 건립에 들어간다. 하지만 도산서원을 세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산계곡에는 스승이 손수 조성한 도산서당 건물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황의 제자들은 ‘스승이 직접 만든 도산서당’과 ‘도산서원’을 어떤 방법으로 공존시킬 수 있었을까? 이황 이후 명실상부 조선을 이끌어갔던 영남학파가 탄생한 공간 도산서원. 그리운 스승 퇴계 이황을 기리며 도산서원을 설립해나간 제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도산서원 방문정보> 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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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 큰 스승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 뒤 제자들은 스승의 뜻을 잇고, 그 족적을 보호코자 서원 건립에 들어간다. 하지만 도산서원을 세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산계곡에는 스승이 손수 조성한 도산서당 건물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황의 제자들은 ‘스승이 직접 만든 도산서당’과 ‘도산서원’을 어떤 방법으로 공존시킬 수 있었을까? 이황 이후 명실상부 조선을 이끌어갔던 영남학파가 탄생한 공간 도산서원. 그리운 스승 퇴계 이황을 기리며 도산서원을 설립해나간 제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도산서원 방문정보> 위치 :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연락처 : (054)840-6599 관련 홈페이지 : http://www.dosanseowo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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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본 정보 | 비석은 조선 역사상 단 하루뿐이었던 특별한 그날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1792년. 전국 팔도 칠천여명의 선비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한양이 아닌 곳에서 치러진 전무후무했던 과거시험,시험의 이름은 서원의 이름을 딴 ‘도산별과’였다. 무수히 많은 전국의 서원 중 왜 하필 도산서원이었을까? 어떤 서원도 범접할 수 없었던 도산서원의 역사와 명성을 만나본다. ------------ 타이틀 <스승을 향한 영원한 노래, 도산서원> ------------------- 이곳은 한 때 이 땅을 지배하던 모든 정치와 사상이 태어난 산실이었다. 도산과 낙동강변이 어우러지는 경건한 땅. 이곳에서는 영남학파라 불리며 명실상부 조선을 이끌어 온 수많은 선비들이 탄생했다. 위대한 스승, 이황은 세상을 떠났지만 제자들은 그 뜻을 계속 이어나가기로 했다. 1572년 이황의 위패를 모실 사당을 건립하기로 하고 서원 창건에 들어갔다. 하지만 스승을 기리기 위한 제자들의 계획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도산계곡에는 이미 스승이 손수 조성한 도산서당이 서 있었다. 스승이 정한 터를 떠나 새 터를 잡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스승이 만든 서당을 허물 수도 없는 상황. 과연 이황의 제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좀 보다가) 평범한 서원 배치처럼 보이지만,도산서원에는 서당의 옛 구성을 그대로 살리면서 서원으로 확대 개편하는 획기적인 해결책이 숨어 있었다. 도산서원 정문에는 조선건축에선 볼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서원 정문임에도 불구하고 문루가 서지 않았다. 만일 문루가 만들어졌다면, 제자들이 만든 서원 정문이 스승이 만든 도산서당을 내려다보게 된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선 안 된다는 제자의 도리’를 건축으로 표현한 것. 그것이 바로 도산서당에 문루가 없는 까닭이다. ‘스승이 만든 옛 터전’을 지키고자 '새롭게 조성한 공간’에 소홀한 것도 아니었다. 두개의 공간을 하나의 서원 안에 공존시키기 위해 도산서원에는 두 개의 길이 나있다. 강당의 역할을 하는 전교당과 도서관으로 쓰던 장판각, 광명실은 모두 ‘수직길’에 서있다. 반면 수평 길이 시작되는 곳에 있는 것은 이황이 세운 도산서당이다. 도산서당에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황이 만든 또 다른 공간 농운정사 향하게 된다. 서원은 규모로 보나, 격으로 보나 서당보다 앞설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제자들은 도산서원을 만들 때 두 개의 길을 같은 비중으로 배치하면서 서당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다. 수직길을 따라가다 보면 서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전교당이 등장한다. 조선에서 보기 드문 다섯 칸이 아닌 네 칸 건물. 전교당의 이상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서원의 강당이라면 으레 있어야 할 ‘원장실’이 없다 원장실로 쓰였을 자리에 대신 놓인 것은 어디론가 이어진 길이다. 길이 향하는 곳은 상덕사. 이황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공간이다. 원장실 대신‘이황의 위패로 가는 길’이 존재하는 서원. 이것이야 말로 도산서원의 영원한 원장은 퇴계 이황이라는 제자들의 마음일 것이다. 모든 부와 명성을 마다하고 고향 땅으로 돌아온 대학자 퇴계 이황. 혼탁한 세상을 바꾸고자 그가 선택한 방법은 성리학을 완성하고 후학을 키우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스승의 큰 뜻을 져버리지 않았다. 스승이 잡은 터에 선비들이 강학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그 뜻을 이어나갔다. 도산서원의 건립으로 스승의 꿈은 현실이 되었다.수많은 유생들이 배움의 길을 걷고자 도산서원을 찾았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학문에 매진했다.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 고봉 기대승, 학봉 김성일...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이황의 선비들이 도산서원을 거쳐갔고, 이곳에서 나온 사상은 이후 조선을 지키는 근간이 됐다. 스승의 작은 손길 하나를 간직하면서 그 뜻을 받들고자 했던 제자들. 긴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도산서원에는 큰 스승 이황을 향한 제자들의 노래가 흐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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