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이미지 및 저작권 정보(N2L)
| 대표이미지 | 저작권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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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 미디어소풍 | ||
| 전자자원소장처 | 미디어소풍 | ||
| 공공누리 저작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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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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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CL 정보 | |||
| 소스코드 | <iframe width="720px" height="480px" src="http://uci.k-heritage.tv/resolver/I801:1501001-001-V00594?t=3"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
관련 파일 및 자원정보(N2R)
| 번호 | 파일명 | 파일크기 | 다운로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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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숭례문 1부 한국인이 사랑한 큰 門, 숭례문_1280X720.mp4 | 167.96 M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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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숭례문 1부 한국인이 사랑한 큰 門, 숭례문_1920X1080.mp4 | 167.46 M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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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N2C)
| UCI | I801:1501001-001-V00594 | ||||||||||
|---|---|---|---|---|---|---|---|---|---|---|---|
| 제목 | 숭례문 1부 한국인이 사랑한 큰 門, 숭례문 | ||||||||||
| 콘텐츠 유형 | 동영상 | 언어정보 | 국문 | ||||||||
| 생산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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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여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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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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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정보 | 서울 숭례문 (국보 제1호). 태조는 수도 한양의 방어를 위해 성벽을 쌓고 사방으로 네 개의 대문을 세웠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문이 정남에 들어선 숭례문이었다. 숭례문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3도로 통하는 관문이자 임금이 사는 궁궐과 종로로 이어지는 요충에 자리했다. 조선의 심장부와 바로 연결되는 나라의 정문. 이름 또한 조선이 추구하는 진리인 ‘예“를 받든다는 뜻을 담았다. 숭례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나라의 주권을 다시 찾은 환희의 순간에도, 한 민족이 이념으로 갈라서 버린 탄식의 순간에도, 대한민국 정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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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 서울 숭례문 (국보 제1호). 태조는 수도 한양의 방어를 위해 성벽을 쌓고 사방으로 네 개의 대문을 세웠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문이 정남에 들어선 숭례문이었다. 숭례문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3도로 통하는 관문이자 임금이 사는 궁궐과 종로로 이어지는 요충에 자리했다. 조선의 심장부와 바로 연결되는 나라의 정문. 이름 또한 조선이 추구하는 진리인 ‘예“를 받든다는 뜻을 담았다. 숭례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나라의 주권을 다시 찾은 환희의 순간에도, 한 민족이 이념으로 갈라서 버린 탄식의 순간에도,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역사적인 순간에도, 숭례문은 항상 그 자리, 우리 곁에 있었다. 600년 굴곡진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숭례문은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일까? <서울 숭례문 방문 정보> 위치 : 서울 중구 세종대로 40 (남대문로4가) 연락처 : 숭례문 관리소 02-779-8547 주변 볼거리 :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관련 홈페이지 : http://www.sungnyemun.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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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본 정보 | 한국인이 사랑한 큰 門, 숭례문 그 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먼 옛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부터 그 아들의 아들까지, 600년을 한결같이 우리와 함께 있었던 문, 오늘 드높게 우뚝한 그 문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국보 제1호, 숭례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서울 도심 한복판인 남대문로 4가에, 숭례문이 들어선 것은 조선 개국 초기인 1398년이었다. 태조는 수도 한양의 방어를 위해 성벽을 쌓고 사방으로 네 개의 대문을 세웠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문이 정남에 들어선 숭례문이었다. 숭례문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3도로 통하는 관문이자 임금이 사는 궁궐과 종로로 이어지는 요충에 자리했다 조선의 심장부와 바로 연결되는 나라의 정문. 이름 또한 조선이 추구하는 진리인 ‘예“를 받든다는 뜻을 담았다. 사람과 물류도 자연이 문 앞에서 성시를 이뤘다. 특히 숭례문의 높고 당당한 위용 덕분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 문을 한양의 상징으로 여겼다. 숭례문이라는 이름대신 남쪽에 있는 문이라 해서 친숙하게 남대문이라고 부르고, 지금도 애용되는 갖가지 속담이 생겨난 것도 조선시대의 한 풍경이었다. 숭례문은 나라의 크고 작은 변고를 백성들에게 알리고 나누는 공간이기도 했다. 때로는 누군가의 하소연장이 되고, 가뭄이 심할 때는 엄숙하게 문을 닫아 백성들의 고통에 동참하기도 했다. 이후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숭례문 또한 역사의 격랑을 맞게 된다. 1908년. 일제는 일본 황태자의 방문을 빌미삼아 숭례문의 성곽을 헐어버린다. 500년 동안 조선의 주권을 말해주는 보루였던 성벽이 일제에 의해 헐리고 만 것이다. 나라의 정문에 전차길이 생긴 것도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1898년 숭례문을 관통하는 선로, 1904년에는 숭례문 앞에서 서대문으로 이어지는 선로가 부설됐다. 나라를 잃고 숭례문 역시 위엄있던 옛모습을 훼손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숭례문에서 위로와 희망을 찾았다. 숭례문이 아직 그 자리에 의연하게 서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1920년대에 쓰여진 한편의 시다. 내가 고생살이 10년을 하는 동안에 무엇을 바라고서 살었사오리까마는 새벽 안개 속에 묵묵히 서울을 지키고 있는 남대문 하나를 바라보고 살어왔사외다 이 도성의 사람들이 도한 그러하외다 그들의 울분하여 터질듯한 가슴을 안고 거리에서 거리로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옮길 때 누가 그들을 위로하여 주었사오리까 없사외다 오직 남대문이 하나 있을 뿐이외다 - 김여수 <남대문> 그랬다. 숭례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나라의 주권을 다시 찾은 환희의 순간에도, 한 민족이 이념으로 갈라서 버린 탄식의 순간에도,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역사적인 순간에도, 숭례문은 항상 그 자리, 우리 곁에 있었다. 숭례문은 서울을 잿더미로 만든 한국전쟁의 아픔도 겪어냈다. 그 역시 부숴지고 상처받으면서도 오연한 위엄을 지키듯 그 자리를 지켜냈다. 그리고 1962년, 숭례문은 서울의 최고령 목조건축이자 그 역사적 상징성을 평가받아 국보 제1호에 지정되기에 이른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기에 앞으로도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우리의 문, 그러나 2008년 2월 10일. 저녁 8시 50분 SOV) 결국 대한민국 국보 1호는 화재발생 다섯시간만인 한시 55분 완전히 주저 앉고 맙니다. 숭례문이 불에 타 사라졌다. 모두가 말을 잃었다. 온 대한민국이 숨죽이며 울었다. 왜 우리는 이제야 이 제단에 뒤늦은 후회와 탄식을 바치는 것인가. 마침내 2013년 5월 4일. 숭례문이 돌아왔다. 5년에 걸친 엄정하고 정밀한 복원작업 끝에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숭례문은 조선시대의 옛모습을 되찾고, 좌우 성곽도 복원됐다. 벅찬 가슴으로 다시 만난 이 문 앞에서 우리는 또한번 묻는다. 이 귀하고 아름다운 문, 국보 1호 숭례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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