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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N2C)

콘텐츠 기본 정보
UCI I801:1501001-001-V00603
제목 숭례문 3부 다시 숭례문 앞에 서다
콘텐츠 유형 동영상 언어정보 국문
생산자 정보
생산자 정보
생산자 생산일자
미디어소풍 2013-05-28
기여자 정보
기여자 정보
역할 정보 기여자 명
제작사 미디어소풍
프로듀서 미디어소풍
기술 정보
기술 정보
기술 영역 기술 내용
내용정보 국보 제1호 서울 숭례문
역사정보 조선시대
지리정보 서울특별시 중구
요약 정보 다시 숭례문을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

1909일, 2013년 5월 4일,

우리 앞에 숭례문이 다시 돌아왔다.

이전보다 더 크고, 더 웅장해진 숭례문.

과연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오늘, 우리 앞에 선 숭례문을 만나본다.



<서울 숭례문 방문 정보>



위치 : 서울 중구 세종대로 40 (남대문로4가)

연락처 : 숭례문 관리소 02-779-8547

주변 볼거리 :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관련 홈페이지 : 내용
다시 숭례문을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

1909일, 2013년 5월 4일,

우리 앞에 숭례문이 다시 돌아왔다.

이전보다 더 크고, 더 웅장해진 숭례문.

과연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오늘, 우리 앞에 선 숭례문을 만나본다.



<서울 숭례문 방문 정보>



위치 : 서울 중구 세종대로 40 (남대문로4가)

연락처 : 숭례문 관리소 02-779-8547

주변 볼거리 :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관련 홈페이지 : http://www.sungnyemun.or.kr
대본 정보 다시 숭례문을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 1909일.

2013년 5월 4일,

우리 앞에 숭례문이 다시 돌아왔다.

이전보다 더 크고, 더 웅장해진 숭례문.

과연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오늘, 우리 앞에 선 숭례문을 만나본다.



5년의 시간 끝에 우리 곁으로 돌아온 숭례문.

그리운 그 모습은 여전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달라진 구석이 있다.

숭례문 양 옆, 동쪽으로 53미터 서쪽으로 16미터.

길게 늘어선 성곽은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숭례문의 또 다른 모습이다.

기존에 없었던 성곽이 생겨난 까닭은 무엇일까?



본래 숭례문은 한양도성과 이어져

수도 한양의 수비와 방어를 담당하는 대문이었다.

따라서 대문 옆으로 굳건하게 성곽이 서있었던 것인데,

1907년 일제에 의해 훼손되면서

성곽 없는 채로 백여 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번 복원에서는 성곽의 일부를 다시 세워

숭례문이 담당했던 수도방위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성곽을 쌓는데도 최대한 옛 돌을 사용했다.

이 옛 돌은 숭례문이 겪어온 600년의 역사가

아로새겨진 증거들이다.

임진왜란에서 헌대사의 한국전쟁까지,

수도의 관문이었던 숭례문의 돌들은

그 현장을 온몸으로 겪어냈다.

지금도 선명한 구멍은 한국전쟁 당시의 총탄자국이다.

이렇듯 숭례문 복원은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우리 민족과 함께 겪어온 시간과 경험까지

담아내고자 했다.



단청 역시 숭례문이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다.

새롭게 칠해진 단청은 녹색과 청색을 사용해

한결 차분해졌고,

문양은 조선 전기의 양식을 복원해 되살렸다.

그래서일까?

새로운 단청을 입힌 숭례문은

유난히 한국의 하늘과 잘 어울려 보인다.

그날, 숭례문 현판이 무너져 내릴 때,

온 국민의 마음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숭례문의 상징이자 얼굴인 현판,

숭례문의 현판복원은 그래서 뜨거운 관심사였다.

어떤 나무를 사용할까, 어떤 글씨체를 쓸까,



사실 숭례문 현판은 한국 전쟁 때

부숴져서 1960년대에 복원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복원기술이 낙후해서 원래 서체인

양녕대군의 글씨를 복원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번 복원은 달랐다.

숭례문 현판을 제대로 복구하기 위해

복원 팀은 전국 곳곳을 뒤져

양녕대군의 글씨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날카롭게 뻗어나간 획의 삐침,

글씨사이의 간결한 폭과 획과 획 사이의 연결,

600여년 전 양녕대군의 숨결이 오롯이 느껴지는

세 글자가 현판 위에 살아났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숭례문이 본연의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숭례문 현판이 제 모습을 찾았듯

다시 제자리를 찾은 것들이 있다.

화재 전 15.7m였던 용마루는 16.6미터로 늘어났다.

60년대 보수공사 때문에 짧아진 용마루가

본래 크기로 돌아간 것이다.



대신 용마루를 받치던 추녀는 각이 서고,

길이가 짧아졌다.

추녀 위에 놓인 잡상의 수도 바로 잡았다.

건물의 나쁜 기운을 쫒기 위한 잡상은

본래 홀수로 놓는 것이 조선시대 전통인데

어찌된 연유인지 화재 전 숭례문 잡상은

여덟 개, 짝수였다.

그것을 이번에 일곱 개, 홀수로 다시 고친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이기 시작하는 변화들은

숭례문과의 재회를 더욱 새롭게 만들어 준다.



수백 년 동안 한양을 오가는 사람들이 드나들던

천장에 쌍용도가 새롭게 그려졌다.

무서운 용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것이

다소 낯설게 느껴지지만,

이것은 조선 초기의 그림을 제대로 복원한 결과다.

어진 임금을 기원하는 백성들의 소망이

친근한 용의 모습으로 반영된 것이다.



예전에 비해 유달리 웅장하게 느껴지는 숭례문.

비밀은 맨 밑바닥에 숨어 있었다.

수 백 년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숭례문의 터는 갈수록 높아졌는데,

처음 설 때와 지금과의 차이가 무려 1.6미터나 됐다.

이번 공사에서는 지반의 높이를

조선 후기에 맞춰 복원했고,

덕분에 우리는 50cm가량 키가 커진 숭례문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돌아온 숭례문은

뼈아픈 그날의 참화도 간직하고 있다.

화재 당시 불길에 그을린 기둥을 그대로 살려

숭례문이 겪었던 상처를 증언하게 한 것이다.

이 상처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그날 우리가 느꼈던 상실감과 눈물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는 교훈과 충고가 아닐까.



오늘 다시 보는 숭례문은 새롭다.

새롭고 가슴 벅차다.

저 아름답고 당당한 문,

우리는 알고 있다.

저 문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앞으로 후세 대대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국보 1호,

민족의 심상에 아름답게 아로새겨진

우리들 가슴속의 보물, 숭례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