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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덕수궁 1부 덕수궁, 시대의 운명을 이야기하다_1280X720.mp4 157.43 MB 다운로드

콘텐츠 기본 정보(N2C)

콘텐츠 기본 정보
UCI I801:1501001-001-V00671
제목 덕수궁 1부 덕수궁, 시대의 운명을 이야기하다
콘텐츠 유형 동영상 언어정보 국문
생산자 정보
생산자 정보
생산자 생산일자
헤리티지 2013-08-27
기여자 정보
기여자 정보
역할 정보 기여자 명
제작사 헤리티지
서비스권자 헤리티지
프로듀서 미디어소풍
기술 정보
기술 정보
기술 영역 기술 내용
내용정보 사적 제124호 덕수궁
역사정보 조선시대
지리정보 서울특별시 종로구
요약 정보 도심 한복판에서 만나는 살아있는 역사, 덕수궁.

파란만장했던 조선, 그 격동의 현장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킨 덕수궁, 시대의 운명을 이야기하다.



<덕수궁 방문정보>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5-1

연락처 : 02-771-9951

주변 볼거리 : 환구단,경희궁지,구 러시아공사관

관련 홈페이지 : http://www.deoksugung.go.kr
내용 도심 한복판에서 만나는 살아있는 역사, 덕수궁.

파란만장했던 조선, 그 격동의 현장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킨 덕수궁, 시대의 운명을 이야기하다.



<덕수궁 방문정보>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5-1

연락처 : 02-771-9951

주변 볼거리 : 환구단,경희궁지,구 러시아공사관

관련 홈페이지 : http://www.deoksugung.go.kr
대본 정보 덕수궁의 역사는 4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덕수궁이 조선의 역사 전면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임진왜란을 통해서다. 1592년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에 밀려 한양을 내주었던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 한양에 다시 돌아왔을 때 궁궐이 소실돼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었다. 결국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개인저택을 임시 궁궐로 사용하게 됐고,이후 ′옛 임금님이 거처했던 집′이란 뜻으로 석어당이란 당호를 붙였다.

궁궐 건축물로는 드물게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살림집 같은 모습을 지닌 석어당. 이는 임진왜란이라는 조선의 어려운 상황을 잊지 않기 위해 선조가 단청을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선조 때부터 서둘렀던 창덕궁 중건이 1609년 광해군 즉위 후 완공되었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정릉동 행궁은 정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하지만 같은 해 정릉동 행궁은 비로소 자신을 이름을 갖게 된다.

‘나라 운을 기린다’라는 뜻으로 경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임시 행궁처였던 월산대군의 집을 경운궁이라 명명한 것이다. 그리고 광해군은 창덕궁을 정궁으로,경운궁을 이궁으로 삼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는 즉위식을 경운궁 (즉조당 추정)에서 거행했는데, 왕의 즉위가 이루어졌다는 위미를 담고 있는‘즉조당’이란 명칭은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인조는 경운궁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다.

조선 중기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이었던 경운궁. 이후 270여년 동안 궁궐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경운궁은 고종 때부터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다.이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했고,을미사변이후 미뤄왔던 명성황후의 국장이 치러졌다.

경복궁에 모셨던 명성황후의 혼전도 경운궁내에 있는 경효전으로 옮겨왔다.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격동의 역사에 경운궁이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의 선포를 알린다. 환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으로 고종이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단을 만들어 조성한 단지다.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상징이었다. 환구단의 건설은 중국과 대등한 자주국임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것이었다.하지만 러일전쟁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점점 조선을 압박하게 되고 결국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는 이유로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킨다.

한일강제병합 후 고종은 덕수궁 함녕전에 유폐되었다.그러면서 궁궐의 이름을 ‘경운’에서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뜻의 ‘덕수’로바꾸었으니, 왕조의 운명과 함께경운궁의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다.

1919년 1월12일 고종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한다.고종의 죽음이 일제의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반일 감정은 극에 달했고,결국 그해 3.1운동으로 이어졌다. 고종의 죽음은 한 역사의 종말이자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운명을 묵묵히 지켜본 궁궐..덕수궁은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다지는 역사적인 현장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