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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입석에서 고구려비로 - 충주고구려비_1280X720.mp4 322.29 MB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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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
UCI I801:1501001-001-V00697
제목 입석에서 고구려비로 - 충주고구려비
콘텐츠 유형 동영상 언어정보 국문
생산자 정보
생산자 정보
생산자 생산일자
미디어소풍 2013-10-09
기여자 정보
기여자 정보
역할 정보 기여자 명
제작사 미디어소풍
프로듀서 미디어소풍
기술 정보
기술 정보
기술 영역 기술 내용
내용정보 국보 제205호 충주 고구려비
역사정보 삼국시대, 고구려
지리정보 충청북도 충주시
요약 정보 우리 역사상 가장 크고 강대했던 나라, 고구려.



그러나 이러한 업적을 확인할 수 있었던 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비가 유일했다.

그러던 1979년, 한반도에서는 최초로 또 하나의 고구려비가 발견됐다. 그것이 바로 충주고구려비다.



무려 1500여년 고구려의 잠든 역사를 깨운 이 발견은 이름 없는 한 답사팀에서부터 시작됐다.



<충주고구려비전시관 방문정보>



위치: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감노로 2321

문의 안내:043-850-7301(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관리사무소)

주변 볼거리:중앙탑,탄금대,충렬사

관련 홈
내용 우리 역사상 가장 크고 강대했던 나라, 고구려.



그러나 이러한 업적을 확인할 수 있었던 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비가 유일했다.

그러던 1979년, 한반도에서는 최초로 또 하나의 고구려비가 발견됐다. 그것이 바로 충주고구려비다.



무려 1500여년 고구려의 잠든 역사를 깨운 이 발견은 이름 없는 한 답사팀에서부터 시작됐다.



<충주고구려비전시관 방문정보>



위치: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감노로 2321

문의 안내:043-850-7301(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관리사무소)

주변 볼거리:중앙탑,탄금대,충렬사

관련 홈페이지: http://www.cj100.net/tour/?menu=tour%2Dbcc&proc=read&type=2&page=1&seq=562
대본 정보 우리 역사상 가장 크고 강대했던 나라, 고구려.



그 기상을 말해주는 것이 충주고구려비다.

이 고구려 비가 발견되기까지 충청북도 지역은 고대사의 공백지대였다. 무려 1500여년- 고구려의 잠든 역사를 깨운 것은 이름 없는 한 답사팀이었다.



충북 충주지역은 삼국시대엔 백제땅이었다가 고구려의 세력권에 들었던 지역이다.충주시 가금면의 한 작은 마을에 세워진 이 전시관의 주인은 국내에 하나밖에 없는 고구려비인 국보 205호 충주 고구려비다.



5세기말,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을 정복하면서 세운 이 기념비는 1979년, 우연히 발견되기까지 평범한 농촌마을인 입석리의 경계석으로 방치돼 있었다.



그런데, 이끼덮인 돌표면에서 글자가 드러났다. 방치돼 있던 비석이 1500여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그 우연같은 기적을 만들어 낸 사람들은 놀랍게도 아마추어 답사팀이었다. 1978년, 이 지역에 검사로 부임한 유창종씨가 중심이 돼서 결성한 답사팀,



유창종 int>> 충주 중원의 문화가 한국의 한반도의 중심이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접경지역으로서 다른 지역과는 독특한 문화를 가졌으니까 전 지역을 열 두 개로 나눠서 한 달에 한 개씩 집중해서 나눠보자 그래서 결성된 모임이죠.



학생부터 교사, 검사까지, 틈날 때마다 지역 역사를 찾아나섰던 회원들은 고려 때 축조된 충주성의 성돌을 발견했고, 햇골산에 잠들어 있던 삼국시대 마애불상군을 발견해 냈다. 또 고려의 광종이 어머니를 기리며 지었다는 숭선사. 그 숭선사 조사의 발판을 마련한 명문이 적힌 기와도 발견했다.



취미로 조직된 모임치곤 놀라운 성과였다. 신문지상에도 이들의 이름이 심심치 않게 거론됐다. 유적을 찾고 역사의 실마리를 풀어가는데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자, 이들에겐 공통의 목표가 생겼다.







유창종 int>> 특히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써서 찾았던 것은 진흥왕 순수비였어요. 진흥왕은 저희가 중요한 지역을 접령하고 순행을 한 다음에 순수비를 세우는 버릇이 있는 분인데, 중원 소경까지 설치할 정도로 중요시 하던 지역인데 거기에다 비를 안 세웠을 리가 없다. 진흥왕 순수비가 틀림없이 있으니 그것을 한 번 찾아보자.



신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구축했던 진흥왕은 점령지마다 그것을 기념하는 척경비를 세웠다. 그렇다면 삼국통일의 전략지였던 충주지역에 그 흔적이 없을 리가 없다,



간절한 마음으로 진흥왕 순수비를 찾아나선 지 1년째, 그러나 별 소득 없이 동호회는 1979년, 유창종(검사)가 타지역으로 전근을 가게 되면서 송별답사에 나서게 된다.



때는 1979년 2월 25일 토요일, 신라시대에 세워진 중앙탑을 비롯해서 근처의 석불입상을 돌아보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가금면 부근의 한 마을을 지나는 순간, 동호회원 한 명이 갑자기 차를 세웠다.



마을 입구에 커다란 돌 하나가 서있어 입석마을로 불리는 곳인데, 그 비석이 뭔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유창종 int>> 마을 입구에 방치 되어 있던 데로 세워있던 거니까 깨끗한 비가 아니죠. 우리 일반 시골에 가서 보면 입구에 돌 들 많이 서 있잖아요. 입구에 세워 동네 이름도 새겨놓기도 하는데 그런 돌 처럼 서 있었습니다. 논두렁에...



첫 눈에 보기엔 여느 마을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돌이었다.



그런데 돌아서려는 순간,때마침 돌 위로 석양빛이 비췄다.



그러자-

얼핏 얼핏 뭔가가 드러나보이는 것이 아닌가.



놀란 마음에 손 끝으로 더듬어 보니, 돌비석 위엔 뭔가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이 무엇일까?탄성과 흥분이 터져나왔다.



유창종 int>> 글자아냐, 이렇게 하니까 다들 잡담을 하다가 글자가 있나 들어다 보는데 다들 흥분을 몹시 했죠.







여기저기 부서진데다 이끼가 비석 전면에 덮혀 있어 글자를 읽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러나 드문드문 보이는 글자들 사이에 눈에 들어 오는 두 글자가 있었다. 바로 태와 왕이라는 한문자였다.순간 그토록 찾아다니던 진흥왕순수비임을 직감했다.



유창종 int>> 확신을 했죠. 확신을 한 이유는 우리가 아무추어긴 하지만 진흥왕 순수비를 본 적이 있잖아요. 크기도 보고.. 자연석을 손질해서 비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머릿속에 있는 진흥왕 순수비를 찾아야 있는 데다가 그날 발견한 데다가 그 날 본 자연석을 손질한 것이 진흥왕 순수비랑 너무나 닮았기 때문에 초보자인 우리들은 볼 것도 없이 진흥왕 순수비라고 확신을 한 거죠.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회원들은 곧바로 학계에 보고를 했고, 그 해 4월 7일! 마을에 조사단이 도착한다.



낯선 이들의 방문은 조용하던 입석리를 들썩거리게 했다. 누군가는 치성을 드렸던 돌이고,수해로 마을이 잠겼을 땐 떠내려 갈뻔 했던 것을 다시 세워놓기도 했다 그렇게 연유도, 사연도 모른 체 눈여겨 보지 않았던 돌비석이 엄청난 역사성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간 조사팀,



도대체 비석에 적힌 건 무엇일까. 갑작스런 진흥왕 순수비의 출현에 비석 판독은 시급을 다퉜지만- 연구팀의 급한 마음에 제동을 건 건 오랜 세월 비석위에 덮혀있던 이끼였다.



정영호 int>> 앞 뒤에 이끼가 탁 파랗게 끼어있어요. 물을 적셨더니 파란색만 나옵니다. 이끼 때문에.. 이끼가 겹겹이 있어가지고 전혀 이것이 떼어 지지가 않아요. 그래서 손가락과 손톱으로 하다가 나중에는 나무로 깎아서 하나하나 떼었어요. 우리 여학생들이 혼났죠. 하나하나 이끼가 떼어지니까 그 다음에는 잘 떨어져요.



뜨거운 물을 부어 이끼를 불려가며 속살이 드러난 비석위에서 조금씩 글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남은 건 탁본을 한 후 글자를 해독하는 것이었다. 이번엔 글자와의 싸움이었다. 돌 자체가 워낙 마모된 상태여서 확실히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50%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정영호 int>> 판독이라고 해서 타병을 놓고 금방 탁 무슨 글자 이렇게 보이질 않습니다. 한참 눈을 감았다 눈을 딱 뜨면 보일때가 있어서 쭉 탑영을 걸어놓고 눈이 피곤하니까 잠깐 눈을 감았다 깨서 확대경으로 확 보면 그 글자가 이 글자로 딱 보인단 말이죠. 그럼 틀림없으면 동그라미를 쳐 놓고 또 동그라미를 쳐 놓고 그렇죠.



보이는 글자와 보이지 않는 글자, 그리고 그 사이에 숨어있는 글자를 찾아내고 유추해내는 일, 수많은 토론과 고증이 오갔다.



그리고 확인된 글자들, ‘고모루성’, ‘신라토내당주, ’고려태왕! 그렇다면 이건 진흥왕 순수비가 아니란 말인가?



’고모루성‘은 광개토대왕비에도 나왔던 글자, ‘신라토내당주’는 고구려가 신라영토내에 주둔하고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고려태왕’은 고구려 왕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제껏 남한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고구려비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정영호 int>> 고구려비라는 증거가, 고려대왕이라는 글자가 나오는 순간에 깜짝놀랐죠. 아 이게 틀림없이 고구려비다.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고구려의 남한강유역 점령을 확인하게 해주는 역사적 증거는그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창종 int>> 진흥왕순수비 보다도 더 좋았죠. 왜냐면 고구려비라는 것은 그 당시만 해도 광개토 대왕비 하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한반도에서 발견이 되고, 그것도 엉뚱하게도 우리가 삼국지역의 접경으로서 독특한 문화가 있다고 확신하던 또 그렇게 주장하던 지역에서 그 비가 발견이 되니까 훨씬 컸죠.



입석리 입구에 서 있던 평범한 비석은 하루아침에 국보 205호로 신분이 격상됐다.

그 신분에 걸맞게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각이 설치되고 2012년 7월 전시관도 생겼다. 아마추어 동호회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만들어낸 쾌거였다



돌이켜보니 그 비석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렇게 이름없는 비석으로 천 오백년의 풍상을 견뎌낸 후에야 비로소 되찾은 이름, 충주고구려비!



그리고 그 위에 적힌 무수한 글자들은 1500년을 시간을 건너 우리를 고구려의 힘찬 기상과 만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