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이미지 및 저작권 정보(N2L)
대표이미지 | 저작권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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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 | 미디어소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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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누리 저작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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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L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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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파일 및 자원정보(N2R)
번호 | 파일명 | 파일크기 | 다운로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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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도로공사 중에 나온 뜻밖의 유물 - 경주 계림로 황금보검_1280X720.mp4 | 326.14 M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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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N2C)
UCI | I801:1501001-001-V007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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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도로공사 중에 나온 뜻밖의 유물 - 경주 계림로 황금보검 | ||||||||||
콘텐츠 유형 | 동영상 | 언어정보 | 국문 | ||||||||
생산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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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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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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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정보 | 1970년대 경주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시작된 대릉원 일대 계림로 조성사업. 경주를 제일의 관광도시로 만들기 위한 고분발굴과 더불어 그 일대 도로공사도 같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도로 공사가 아니었다. 땅을 파기만 하면 무덤이 나왔던 것이다. 거대왕릉과는 달리 모두 중소형급 작은 무덤이었지만, 그 안에서는 신라의 화려한 면모를 보여주는 놀라운 유물들도 함께 출토되었다. 그중 계림로 14호분에서 나온 황금보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고,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칼 한 자루. '발굴'이라는 개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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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1970년대 경주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시작된 대릉원 일대 계림로 조성사업. 경주를 제일의 관광도시로 만들기 위한 고분발굴과 더불어 그 일대 도로공사도 같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도로 공사가 아니었다. 땅을 파기만 하면 무덤이 나왔던 것이다. 거대왕릉과는 달리 모두 중소형급 작은 무덤이었지만, 그 안에서는 신라의 화려한 면모를 보여주는 놀라운 유물들도 함께 출토되었다. 그중 계림로 14호분에서 나온 황금보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고,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칼 한 자루. '발굴'이라는 개념이 미치 정립되지도 않았던 당시 고고학계에서는 이 검의 정체를 설명할 수 없었다. '환희'와 '아쉬움'이 공존했던 계림로 황금보검 출토! 그 곳에 숨겨져 있는 이야기를 들여다 보자. <국립경주박물관 방문정보> 위치:경상북도 경주시 일정로 186 문의 안내:054)740-7500 주변 볼거리:대릉원, 첨성대 관련 홈페이지: http://gyeongju.museum.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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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정보 | 신라시대의 거대왕릉들이 자리잡고 있는 경주시 황남동 ‘대릉원’ 지역. 대릉원 바로 옆으로 너비 10미터의 2차선 도로 계림로가 조성돼 있다. 세상을 놀라게 한 신라의 유물이 발굴된 곳은 바로 이 평범한 도로 밑에서였다. 1973년 계림로의 배수로를 공사하던 중 신라무덤속에서 놀라운 유물이 나온 것이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고,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칼 한자루, 한국 고대사 최대의 수수께끼 황금보검이었다. 1970년대 초, 경주시는 정비되지 않은 고도였다. 왕릉과 유적지 주변에 민가들이 들어서면서 신라 천년의 유산들이 훼손되는 상황이었다. 이 무렵 나온 것이 경주 관광종합개발계획,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지대한 관심속에서 시작된 이 사업은 사적지구를 정비해서 문화재를 보호하고 경주를 관광도시로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 방치돼 있던 왕릉들이 정비되기 시작하고, 낡고 허물어진 도로망도 재정비에 들어갔다. 그중의 하나인 계림로는 주변에 첨성대를 비롯,대릉원과 고분군이 산재해 있어서 정비가 시급한 중요 도로였다. 첨성대 앞에서 화랑로까지, 길이 1.1킬로미터에 너비 10미터의 도로, 그런데 이 도로밑에서 놀랍게도 신라의 옛무덤들이 발굴된 것이다.배수로 공사를 하기 위해 하수관을 매설하던 중이었다. 부랴부랴 박물관 직원들이 급파됐다. 발굴조사가 시작됐지만 문제는 경주박물관엔 고고학을 전공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1973년 5월부터 석 달동안 200미터 구간에서 무려 55기의 무덤들이 발굴됐다. 그러다보니 인력부족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고미술전공)이었던 강우방학예사가 투입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서울 중앙박물관 소속의 고고학자들이 현장에 투입된 것은 십여 개의 무덤이 발굴되고 난 후의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무렵, 작업을 마친 인부들이 파헤쳐진 현장의 흙을 다시 덮던 중이었다. 그런데 흙더미가 날아가는 순간, 우연히 그 옆을 지나던 강우방 학예사의 눈을 사로잡는 뭔가가 있었다. 순간의 일이었다. 날아가는 흙속에서 그가 본 것은 뭔가가 그려진 파편이었다. 예감은 적중했다. 인부들이 작업하던 부근을 조심스럽게 파내려가자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유물은 수레모양을 한 토기였다. 25호 무덤에서 발굴된 이 수레모양의 토기는 마치 당장이라도 바퀴가 굴러갈 것같은 사실적인 외관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전문가적인 눈썰미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묻혔을지도 모를 유물, 그만큼 발굴현장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매일같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계림로 고분들은 거대 왕릉과는 달리 모두 중소형급 작은 무덤들이었다. 그러나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은 신라의 화려한 면모를 보여주는 놀라운 것들이었다. 대체 누구의 무덤인 것일까, 발굴이 시작된 지 두 달째인 6월 중순, 열네 번째 무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굴 순서에 따라 이름 붙여진 계림로 14호묘, 놀랍게도 이 무덤에서는 말과 관련된 유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금으로 용무늬를 입힌 말안장 꾸미개.유리로 장식한 금동말띠드리개.비단벌레 날개로 장식한 화살통 등,국보급 보물 270여 점이 출토됐다. 14호묘를 둘러싸고 호기심이 커지던 무렵, 흙속에서 칼로 보이는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장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지금껏 발굴된 신라의 유물과는 확연하게 다른 형태의 황금칼이 나온 것이다. 도대체 이 칼의 정체는 무엇일까, 황금보검이라 이름 붙여진 이 칼의 독특한 형태는 전 세계에서도 극소수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그런 황금보검이 왜 신라인의 무덤에서 나온 것일까. 이국적인 빨간 석류석과 유리장식에 감춰진 비밀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금보검’이라는 특별한 유물이 나왔지만. 사람들은 이 보검의 정체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 후로도 황금보검의 진실은 안개 속에 가려져있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 마침내 2010년. 경주박물관은 40여 년이 지난 뒤에야 ‘황금보검’에 대한 학문적 접근과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정리한 최초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발굴’이라는 개념이 미처 정립되지 않았던 무렵이니 보고서를 염두에 둔 발굴작업이 아니었다. 따라서 ‘계림로 14호묘’의 보고서 작업은,기록과 기록 사이에 끊어진 연결고리를 잇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여기저기 분산된 유물에 대한 기록을 찾아 분석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보고서 작성에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과정에서 발굴당시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특히, 유물과 유물과의 입체적인 분석을 통해 계림로14호묘 전체의 상태를 가늠할 수게 있게 되었다. 현대과학 기술의 발달에 따라, 황금보검에 대한 내용분석도 정밀해졌다. X-레이 사진촬영을 통해, 보검의 칼집 속에 들어있던 보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성과였다. 또한 석류석과 유리의 성분분석을 통해 5,6세기 당시 석류석과 유리는 동유럽에서 산출됐다는 것,태극무늬도 당시 동유럽의 문양과 흡사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또 황금보검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검과 유사하다는 것도 밝혀냈다. 카자흐스탄과 멀리 동유럽까지 연결되는 신라 황금보검의 비밀스런 행로, 도로 배수로 공사 중에 발굴된 수수께끼의 칼 한자 루, 황금보검의 존재는 고대 신라가 저 멀리 동유럽까지 연결된 국제적인 국가였음을 말해준다. 황금보검의 나라, 신라는 결코 한반도의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