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이미지 및 저작권 정보(N2L)
| 대표이미지 | 저작권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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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 한국문화재재단 | ||
| 전자자원소장처 | 미디어소풍 | ||
| 공공누리 저작권 |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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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CL 정보 | |||
| 소스코드 | <iframe width="1000px" height="480px" src="http://uci.k-heritage.tv/resolver/I801:1501001-001-V00785?t=3"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
관련 파일 및 자원정보(N2R)
| 번호 | 파일명 | 파일크기 | 다운로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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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열흘에 걸친 묘 이장 작업, 400년 전의 타임캡슐을 열다 -진주하씨 묘 출토 유물_1280X720.mp4 | 353.48 M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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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N2C)
| UCI | I801:1501001-001-V0078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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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열흘에 걸친 묘 이장 작업, 400년 전의 타임캡슐을 열다 -진주하씨 묘 출토 유물 | ||||||||||||||
| 콘텐츠 유형 | 동영상 | 언어정보 | 국문 | ||||||||||||
| 생산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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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여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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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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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키워드 | ; | ||||||||||||||
| 요약 정보 | 1980년대 말, 경상북도 달성군의 한 야산, 그곳에서 현풍 곽씨 후손들이 묘 이장작업을 하고 있었다. 묘의 주인은 400년전 조선시대에 살았던 먼 윗대 할머니, 그런데,하루면 끝이 날거라 생각했던 이장 작업은 열흘이나 계속되었다. 관이 송진으로 완전히 밀봉이 되어 있어 이를 제거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기도 했고, 관 뚜껑이 열리는 순간 관 속에서 새어 나오던 희뿌연 김을 맡고 곽병도 할아버지가 정신을 잃는 일도 발생했었기 때문이다이런 우여곡절 속에 관속에서는 놀라운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완전한 형태의 옷과 백여통이 | ||||||||||||||
| 내용 | 1980년대 말, 경상북도 달성군의 한 야산, 그곳에서 현풍 곽씨 후손들이 묘 이장작업을 하고 있었다. 묘의 주인은 400년전 조선시대에 살았던 먼 윗대 할머니, 그런데, 하루면 끝이 날거라 생각했던 이장 작업은 열흘이나 계속되었다. 관이 송진으로 완전히 밀봉이 되어 있어 이를 제거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기도 했고, 관 뚜껑이 열리는 순간 관 속에서 새어 나오던 희뿌연 김을 맡고 곽병도 할아버지가 정신을 잃는 일도 발생했었기 때문이다 이런 우여곡절 속에 관속에서는 놀라운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완전한 형태의 옷과 백여통이나 되는 편지 누가 쓴 편지일까,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까, 400여 년 전, 무덤 속 편지를 따라가는 흥미로운 발굴이 시작됐다. <국립대구박물관 방문정보> 위치: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70 문의 안내: 053-768-6051 주변 볼거리: 대구시립미술관 관련 홈페이지: http://daegu.museum.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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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본 정보 | 1980년대 말, 경상북도 달성군의 한 야산, 그곳에서 현풍 곽씨 후손들이 묘 이장작업을 하고 있었다. 묘의 주인은 400년전 조선시대에 살았던 먼 윗대 할머니, 그런데, 관속에서 놀라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닌가. 완전한 형태의 옷과 백여통이나 되는 편지 누가 쓴 편지일까,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까, 400여 년 전, 무덤 속 편지를 따라가는 흥미로운 발굴이 시작됐다. 대구광역시 현풍면 대리. 이 마을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유명한 곽재우장군의 고향으로, 대대로 현풍 곽씨들이 살고 있는 집성촌이다. 오래된 가문이다보니 모셔야 할 조상묘 또한 많은데, 문제는 조상의 묘가 위치한 선산의 산림이 우거지면서 묘에 가는 일 자체가 어렵게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89년, 현풍곽씨 문중은 유독 험한 곳에 있는 12대 조상의 묘를 이장하기로 결정한다. 몇 명의 남자들이 대니산에 있는 묘지로 떠났다. 그곳은 차도 다닐 수 없는 험난하고 깊은 산중이었다. 그렇게 산을 오른지 2시간 만에 조상의 묘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묘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은 곧장, 이장작업에 들어갔다. 파고, 또 파고, 3미터 깊이의 땅을 파자, 드디어 관이 드러났다. 이 묘는 현풍곽씨 12대 조상의 묘로, 400년전 조선시대에 살았던 진주 하씨의 묘였다. 창녕군 오야마을에서 태어나 오야댁으로 불리던 진주 하씨, 진주하씨는 ‘곽경’의 19세손이자 곽재우의 조카인 곽주에게 시집을 왔다. 족보에는 진주 하씨가 곽주의 두 번째 부인이라고 (3남 5녀를 낳았다고) 기록돼 있다. 12대조 할머니 진주 하씨의 관. 이제 관만 수습하면 되는 상황이었다.그런데 왠일일까, 도대체 관이 열리질 않는 것이다. 다음날, 사람들이 다시 산을 찾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관 뚜껑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이유일까? 수차례 관을 조사하고서야 그 원인이 밝혀졌다. 바로 송진 때문이었다. 곽병도INT 이게 오백년 가까이 된 송진이라요. 송진을 녹여가지고 녹은 물 자체 가 적어도 2,30만원 안되겠나 이래 볼 때는. 그래 이런 덩어리를 산 에 가지고 수집해 올 때는 수 십 섬이지 뭐. 이런 송진이 이 정도로 수집을 하려고 하면 대단한 노력을 해야하지 않느냐. 송진으로 단단히 관을 밀봉해 보호할 정도로 중요한 무덤이었던 것일까, 가까스로 정을 쪼는 방법으로 송진을 없앤 후에야 관을 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관이 열리는 것을 지켜보던 곽병도 할아버지가 어느 순간 정신을 잃어버렸다 관속에서 새어 나오던 희뿌연 김을 맡자마자 생긴 일이었다. 곽병도 INT 그냥 (관)뚜껑을 열고, 옛말로 속담을 말하면. 저 산, 명지엔 짐이 터진다고 하잖아요, 그 운기가. 뿌연 안개같은 연기가 솟고 그런 형 용이 나타나는데. 요즘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개스 한가지지예. 쉬운 용어로 하면은. 근데 그 짐에 서려가지고 내가 약 오분동안 정신을 잃었어요. 그러니 짐이 날라가면서 용의 형태도 나타나는 수도 있고. 학의 형태도 나는 수가 있는데. 그 김 자체가. 그런 형태가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런 걸 내가 느꼈다고. 우여곡절 끝에 열린 관, 그 속에서 나타난 것은 미라였다. 미라는 놀랍게도 옷이 입혀진 상태 그대로였다 그리고 치마와 저고리, 장옷, 바지 등, 17세기 조선시대의 복식들이 완전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관속에는 많은 양의 편지도 들어 있었다. 당장 글씨를 알아볼 수 있을만큼 선명한 한글편지였다. 무덤 속에서 나온 유물은 상상 이상이었다. 곽병도INT 유물자체가 그렇게 보존 될 수가 없어요, 생생하게. 실이 여러 타래 (관속에)들어가 있었는데. 그 실로 지금 바느질 해도 되겠고. 옷감이 많이 들어가 있고. 버선도 많이 들어가 있고. 조금이라도 (유물이)손 상되고 손실될까 싶어서. 그래하다보니 자연적으로 시간이 오래 많이 걸렸죠. 그리고 교수님들이라든지 소문이 그렇게 나다보니까, 구경거 리도 인산인해라요.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화제가 되었던 사건, 하루 예정이던 이장 작업이 열흘이나 걸리게 된 것도 유물의 희소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유물을 수습하게 된 현풍곽씨 문중은 고심에 빠졌다. 곽병숙 INT 유물이 나왔으니까 유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문제 때문에 약간의 고심이라 할까. (종친회의)종원들이 모여가지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 느냐 해서. 이건 사료의 가치가 있는 것 아니냐. 편지내용도 사백년 전의 편지니까. 우리가 그냥 소홀하게 간단하게 처리할 문제가 아니 다 하고.(조상의)제사를 모시기 위해서 지어놓은 재실이 있습니다. 그 유연재라는 재실에 모시자. 곽씨 문중의 집성촌인 대리에 위치한 재실. 문중의 뜻에 따라, 조상의 묘에서 수습한 시신과 유물은, 일단 이곳으로 옮겨졌다. 시급한 것은 유물의 보존처리와 발굴된 유물이 어떤 가치를 갖는 지 파악하는 일. 경북대 백두현 교수가, 편지를 분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백두현INT 가서 실제로 자료를 손으로 접하면서, 만지면서 볼때는 정말 감회가 (경북대 교수/깊었습니다. 거의 사백년 가까이 된 편지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 유물편지연구자)다는 것은 아주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죠. 게다가 관속에서 오랫동 안 있다가 나온 그런 신비감도 있고. 또 그 편지속에 무슨 내용이 들 어 있을지, 그 호기심. (편지를)연구하며 어떤 내용이 있을지 기대 감. 이런 등등으로 해서 아주 설레이는 마음으로 봤다. 이 편지는 무덤의 주인인 진주 하씨에게 남편인 곽주가 보낸 편지가 대부분이었다. 편지는 모두 170 여 매, 그런데 편지를 읽어갈수록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백두현INT 이렇게 부부간에 한글편지를 많이 주고받은 이유는 뭘까. 이게 사실 궁금하죠. 근데 편지, 170매가 넘는 내용속에 그 답이 나와있어요. 그게 뭐냐면 곽주라는 전처가 광주 이씨가 계셨는데, 이 분이 아들을 하나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후처로 진주 하씨가 새로 들어왔는데. 이 진주 하씨 후처와 전처의 아들, 이 (두 사람의)사이가 원만치 못했어요. 그래서 곽주가 살고있는 마을, 현풍 소례라는 마을인데요. 그 마을에서 약 걸어서 한 시간. 또는 한 시간 남짓 걸리는 논공이라는 데가 있어요. 논공으로 집을 따로 하나 지어서 하씨 부인이 그곳으로 나가 살게 된 거죠. 결국 그런 사정으로 떨어져 사는 아내 진주 하씨에게 남편 곽주는 자주 편지를 썼던 것이다. 곽주는 이처럼 백 여 통이 넘는 편지를 보내는데, 눈길을 끄는 점은 어린자녀들에게 언문, 즉 한글교육을 시키라는 부분이다. 당시 곽주는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선비였다. 그런만큼 곽주가 한문이 아닌 한글을 가르칠 것을 강조하는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한글창제 이후 민간에서 한글교육을 어떻게 했는지 알려주는 귀한 자료다. 자신이 직접 가르칠 수 없는 상황에서 곽주는 편지로 3남 5녀 자녀들의 교육을 걱정하고 있다 편지속엔, 아내를 걱정하는 남편의 애틋한 정도 보인다. 진주 하씨가 아이의 출산 때문에, 친정에 가있을 동안 소식이 없자 곽주가 아내의 기별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새 인편을 보내는 상황도 적혀있다. 헤어져 사는 아내를 애달파 하는 남편의 마음을 토로한 편지도 있다 하루하루,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썼던 곽주의 편지. 그 편지들은 우연히 벌어진 묘 이장작업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는 400년만에 공개된 한 부부의 이야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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