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이미지 및 저작권 정보(N2L)
대표이미지 | 저작권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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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 | 한국문화재재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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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누리 저작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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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N2C)
UCI | I801:1501001-001-V0079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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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역사와 문화를 잇는 소통의 고개 문경새재 | ||||||||||
콘텐츠 유형 | 동영상 | 언어정보 | 국문 | ||||||||
생산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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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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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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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정보 | 조선시대 옛길을 대표하며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잇는 영남대로 중 가장 유명한 길목인 문경새재. 문경새재는 산세가 높고 험해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조선 시대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기 위해 넘는 과거길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옛길 중 가장 아름다운 옛길로 꼽히는 문경새재를 만나본다. <문경새재 도립공원> 위치 :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새재로 932(상초리 288-41) 문경새재도립공원 연락처 : 054)571-0709 주변볼거리 : 조령산, 주흘산, 문경석탄박물관, 수옥폭포 관련 홈페이지 : http://saejae.g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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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조선시대 옛길을 대표하며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잇는 영남대로 중 가장 유명한 길목인 문경새재. 문경새재는 산세가 높고 험해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조선 시대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기 위해 넘는 과거길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옛길 중 가장 아름다운 옛길로 꼽히는 문경새재를 만나본다. <문경새재 도립공원> 위치 :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새재로 932(상초리 288-41) 문경새재도립공원 연락처 : 054)571-0709 주변볼거리 : 조령산, 주흘산, 문경석탄박물관, 수옥폭포 관련 홈페이지 : http://saejae.gbmg.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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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정보 | 영남대로가 주흘산과 조령산을 만나 이루어진 고갯길 문경새재. 조선시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며 한양을 중심으로 X자 모양의 도로가 구축되었다. 영남대로는 한양에서 동래에 이르는 큰 길이다. 문경새재는 영남과 기호 지방을 잇는 길로 영남대로 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였다. 지리학적 위치상 영남, 충청, 강원 지역의 문화와 문물 교류의 중심이기도 하였다. 백두대간을 넘는 고개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다니던 길. 옛길에 얽힌 역사와 문화를 만나본다. 문경새재는 높고 험한 고개로 예로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최정예 부대를 이끌던 신립 장군은 문경새재를 버리고 충주의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친다. 결국 대패한 신립 장군은 처참한 죽음을 맞고 왜군은 한양까지 직행하게 된다. 2년 후인 1594년. 문경새재에 처음으로 관문과 성곽이 축성된다. 지금의 제2관인 조곡관이다. 이후 병자호란을 겪으며 제1관문인 주흘관과 제3관문인 조령관을 차례로 쌓아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문경새재의 새재는 순 우리말이다. 새들도 날아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에서 새재라 붙여졌다고 전해지는데, 한자로 표기하면 鳥嶺(조령)이다. 문헌상에 조령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1531년 동국여지승람을 보완해 완성한 지리지다. 이 책의 ‘문경현 산천조’에 조령이 언급돼 있다. ‘조령, 현의 서쪽 27리 연풍현의 경계에 있는데 속칭 초점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초점은 풀고개 라는 의미다. 조선시대에 이 지역의 행정구역명은 문경현 초곡(草谷)이었다. 새재에는 ‘억새가 우거진 재’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새재는 또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문경새재는 이미 있던 고개인 하늘재를 제쳐두고 새로 닦은 고개이다. 하늘재는 156년, 신라 아달라 아사금 3년에 개척된 길이다. 여기에서 계립령로가 바로 하늘재다. 옛 고개인 하늘재를 두고 새로 닦은 길이라 하여 새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전해진다. 마지막으로 이우릿재(이화령)와 하늘재 사이에 있다고 하여 새재라 불린다는 설도 있다. 문경새재에 이렇게 많은 유래설이 전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지역 사람들에게 새재가 그만큼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로부터 문경새재는 과거 길, 장원급제의 길로 불리었다. 영남 지방의 유생들이 과거길을 떠나 한양에 올라갈 때에는 반드시 문경새재를 넘어가려 했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죽령, 추풍령 등 다른 길도 있었다. 영주 삼척 등의 지역에서 한양을 갈 때는 죽령을 넘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과거를 앞둔 유생들은 멀리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굳이 문경새재를 넘고자 했다. 그 이유는 죽령을 넘으면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문경이라는 지명은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과거시험은 수 천대 일의 경쟁률을 보일 정도로 어려웠다.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에 올라가면 과거에 급제할 것이라는 간절한 희망과 바람이 선비들을 이 길로 불러들였다. 선비들이 쉬어 가면서 장원급제의 소원을 빌었다는 ‘책바위’라는 돌무덤. 이 길을 찾던 이들의 간절함을 짐작할 수 있다. 청운의 꿈을 안고 넘던 길. 하지만 낙방한 이들은 절망과 좌절 속에 다시 이 길을 지나야 했다. 한 선비가 그 과정을 글로 남기기도 하였다. 과거길을 떠난 영남의 유생들은 새재를 넘기 전 하룻밤을 묵고 갔다. 호랑이를 비롯한 맹수와 도둑들을 피하려면 아침 일찍 여럿이 모여 새재를 넘어야 했다. 유생들은 조령원이나 동화원과 같은 숙박시설에 묵었다.‘원’은 본래 관리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공적 숙박기관이었는데, 17세기를 전후해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이후 주점, 여점, 주막 등으로 불리는 상업적인 숙박업소로 바뀌었다. 조선후기 해동지도에서 조령성을 살펴보면 현재의 1관문인 동성문 안쪽에‘초곡주막’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고갯길마다 자리잡은 주막은 민중들의 삶과 함께 하는 공간이었다. 옛길의 정취가 그대로 남아있는 문경새재는 2007년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옛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다. 문화와 문화를 이어주는 소통의 공간이고 옛 사람들의 삶을 담은 역사의 공간이다. 600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가장 아름다운 옛길로 꼽히는 문경새재. 그 길에 또 다른 역사가 쌓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