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이미지 및 저작권 정보(N2L)
대표이미지 | 저작권정보 | ||
---|---|---|---|
저작권자 | 한국문화재재단 | ||
전자자원소장처 | 미디어파크 | ||
공공누리 저작권 | |||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출처표시 -비상업적 이용만 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금지 |
|||
CCL 정보 | |||
소스코드 | <iframe width="720px" height="480px" src="http://uci.k-heritage.tv/resolver/I801:1501001-001-V00795?t=3"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콘텐츠 기본 정보(N2C)
UCI | I801:1501001-001-V00795 | ||||||||||
---|---|---|---|---|---|---|---|---|---|---|---|
제목 | 추사 김정희 1부 세한도, 천년의 신의를 담다 | ||||||||||
콘텐츠 유형 | 동영상 | 언어정보 | 국문 | ||||||||
생산자 정보 |
|
||||||||||
기여자 정보 |
|
||||||||||
기술 정보 |
|
||||||||||
요약 정보 | 시리도록 새하얀 설원, 그 안에 자리잡은 사람 하나 없는 토담집 한 채, 그리고 그 집을 둘러싼 네 그루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려진 수묵화 한 점 조선 최고의 명필 추사 김정희의 걸작인 국보 180호 세한도다 모든 것을 잃고 철저히 고립 되었던 유배지에서의 삶, 그 때 발견한 제자 이상적과의 진실한 우정이 담겨진 걸작 속의 이야기를 만나본다. |
||||||||||
내용 | 시리도록 새하얀 설원, 그 안에 자리잡은 사람 하나 없는 토담집 한 채, 그리고 그 집을 둘러싼 네 그루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려진 수묵화 한 점 조선 최고의 명필 추사 김정희의 걸작인 국보 180호 세한도다 모든 것을 잃고 철저히 고립 되었던 유배지에서의 삶, 그 때 발견한 제자 이상적과의 진실한 우정이 담겨진 걸작 속의 이야기를 만나본다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 방문정보>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1661-1 연락처 : 064-760-3406 주변볼거리 : 모슬포, 오설록, 소인국 테마파크, 제주 조각공원 <과천 추사 박물관 방문정보> 위치 : 경기도 과천시 추사로 78 (주암동) 추사박물관 연락처 : 02-2150-3650 주변볼거리 : 과천 아해박물관, 정우식물원 관련 홈페이지 : www.chusamuseum.go.kr |
||||||||||
대본 정보 | 시리도록 새하얀 설원, 그 안에 자리 잡은 사람 하나 없는 토담집 한 채, 그리고 그 집을 둘러싼 네그루의 소나무와 잣나무. 쩍쩍 갈라지는 갈필로 거친 종이 세 장을 이어 붙여 그린, 초라하기까지 한 수묵화 한 점. 추사 김정희의 걸작인‘세한도’다. 유배지에서의 시리디 시린 삶은 깨달음을 가져다주었다. 모든 것을 잃고 철저히 고립되었을 때 발견한 진실한 우정. 그 송백처럼 변함없는 신의가 추사 일생의 걸작을 만들어냈다. 1840년, 세도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김정희는 제주도로 유배된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조선 최고의 문사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아온 그를 기다린 건 유배형 중에도 극형인 위리안치형이었다. 가족조차 만날 수 없는 철저한 고립. 아무런 희망도, 힘도 없는 늙은 호랑이 추사. 그런 그를 변함없이 대했던 이가 있었다. 우선 이상적. 중인 출신이었으나 출중한 능력으로 열 두 차례나 연경에 다녀온 조선 최고의 역관이자 시인이었다. 우선은 추사의 오랜 제자이기도 했다. 추사는 세한도 한 켠에 제목과 함께 ‘우선 감상하게나’라는 뜻의 글을 덧붙였다. 그리고 세한도를 그리게 된 연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지난해에는 만학과 대운 두 책을 보내주더니, 올해는 또 황조경세문편을 보내주었다 고된 귀양살이를 버티게 한 추사의 유일한 낙은 서책이었다. 하지만 유배지에서 새로운 서책과 정보를 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학문에 대한 추사의 갈증을 해소해 준 건 이상적이 연경에 다녀올 때마다 전해주는 귀중한 서책들과 연경학계의 소식이었다. 절해고도에 갇혀 아무런 힘도 없던 늙은 스승. 누구도 찾지 않던 추사에게 우선은 변함없는 의리를 보여주었다. 사실 우선의 의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1830년, 효명세자의 죽음은 그 측근이었던 추사 부자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추사의 부친인 김노경이 유배를 떠난 후 막 연행에서 돌아온 우선은 추사를 찾아가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어느 가지에 내려앉을지 결정하지 못한 채 바람 속을 맴돌던 까치처럼 이상적도 추사를 찾아가며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추사와 연을 이어간다는 것은 당시 집권세력의 눈 밖에 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추사를 찾아갔다. 권력보다 의리를 택한 것이다. 그리고 14년이 흐른 뒤에도 이상적은 추사와의 의리를 지켰다. 추사는 논어의 한 구절을 인용해 이상적의 신의에 답하였다. 추운 계절이 된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를 안다. 추사는 이 글을 해서체로 써 내려갔다. 예서체의 느낌이 남아있는 해서는 강한 울림을 남긴다. 고난의 세월을 겪으며 알게 된 진실한 우정을 기리기 위해 그린 세한도. 이 작품은 추사의 작품 중 유난히 거친 종이에 그려졌다. 심지어 짧은 종이 세 장을 이어붙이기까지 했다. 유배지에서도 질 좋은 종이를 고집했던 추사는 거친 종이를 통해 자신의 궁핍하고 어려운 처지를 극대화해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세한도는 그림 자체도 추사의 처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림의 나무들은 소나무와 잣나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백송을 제외한 나무들은 그 정체가 불분명하다. 결국 그림의 중심은 백송이다. 몸통은 썩고 구부러진 가지 하나만 남은, 유배 생활에 지친 추사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이 가지는 추사의 이름을 받치고 있다. 결국 백송은 이상적의 절개를 표현하는 동시에 자신의 외롭고 힘든 처지 역시 보여주고 있다. 이상적은 스승의 그림 세한도를 연경에 가지고 가 문사들과 시사회를 가졌다. 세한도의 전체 길이는 14미터. 그림 자체는 1m 남짓하지만 세한도를 본 청의 문사들, 그리고 이후 작품을 본 문사들의 제영이 이어 붙여져 14m나 되는 대작이 되었다. 세한도를 본 이마다 그림 속 절개와 추사가 일궈낸 문인화의 경지에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추사의 처지에 가슴아파하며 제영을 남겼다. 이후 귀국한 이상적은 중국의 문인들이 남긴 제영들을 추사에게 보내주었다. 이 제영들을 본 추사는 크게 기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세한도는 어쩌면 절망 속에서 보낸 추사의 구조신호였을 지도 모른다. 추사는 세한도를 마무리하며 장무상망이라 새겨진 인장을 찍었다.‘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의미다. 텅 빈 설원을 가득 채워준 벗들의 신의와 우정. 그것은 노쇠한 대가가 계속 정진해 나아갈 힘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