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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I I801:1506005-005-V00001
제목 명분이냐? 실리냐? 최명길 vs 김상헌
콘텐츠 유형 동영상 언어정보 국문
생산자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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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자 생산일자
한국문화재재단 2016-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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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 정보 기여자 명
제작사 미디어소풍
기술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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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영역 기술 내용
기타정보 조선시대
내용정보 ;
내용정보_신규
역사정보 조선시대
역사정보_시대국가
인물정보
지리정보 ,
관련 키워드 ;전론;주화론;병자호란;인조;홍타이지;청태종;삼전도;
내용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구원군을 보냈던 명은, 파병의 여파로 쇠락의 길을 걸었고 그 사이 여진족이 세운 나라 후금, 즉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청의 신하가 되라는 청나라 황제의 요구에 조선 조정은 청과 끝까지 싸워 명과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김상헌의 주전론과 실리를 따져 청에 항복해야 한다는 최명길의 주화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과연 조선은 명분을 택할 것인가? 실리를 택할 것인가?
대본 정보 na>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구원군을 보냈던
명은, 파병의 여파로 쇠락의 길을 걸었고
그 사이 여진족이 세운 나라 후금,
즉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sub> 인조@조선의 16대 왕은 나 인조 14년(1636년)
홍타이지가 황제 즉위식 한다고 오라는데 어찌 해야겠소?

댓글>
김상헌@주전론 : 오랑캐 주제에 황제라니 응대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아옵니다
최명길@주화파 : 지난 정묘호란 때 형제의 맹약도 맺었는데 참석해야지요.
인조@조선의 16대 왕은 나 :그럼 나덕현과 이확을 축하 사신으로 보내도록 하겠소.

na> 청과 형제맹약을 맺는 것으로 정묘호란을
수습한 조선! 하지만 여전히 명에 대한
의리를 중시 하였고, 여진족의 청을
오랑캐라 무시하였다.

청나라 뉴스 앵커>
홍타이지 황제 즉위식 현장입니다
앗! 그런데 꼿꼿이 허리를 펴고 선 저..저..
조선의 사신들 아~ 이게 뭔가요?

뉴스자막형식>1436년 4월 11일 홍타이지 황제 즉위식

sub> 홍타이지@청나라 두 번째 황제·인조 14년(1636년) 12월
전쟁을 통해 강약과 승부를 겨룰 뿐 사신을 죽이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겠다.
스스로 죄를 깨우쳤다면 자제(왕자)를 볼모로 보내라

na> 조선은 청태종이 즉위식을 치렀으나
동조하지 않았고, 군신관계 요구도 거절했다. 청은 이를 빌미로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sub> 인조@조선 16대 왕·인조 15년(1637년) 1월
청의 홍타이지가 이번에는 군신관계를 맺자는데 어찌 해야겠소?

감상헌@주전론 : 명의 원수인 청과 군신이라뇨?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준 명의 은혜를 잊으셨사옵니까?
최명길@주화파 : 지금은 화해를 통해 몇 년이라도 화를 늦추고 방어를 튼튼히 하고 나라를 보전해야 합니다.

na> 청의 신하가 되라는 홍타이지의 요구에
조선 조정은 청과 끝까지 싸워 명과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김상헌의 주전론과
실리를 따져 청에 항복해야 한다는 최명길의 주화론의 팽팽하게 맞섰다

sub>
명분을 택할 것인가? 실리를 택할 것인가?

na> 명분과 실리! 과연 조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청의 침략 소식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 한 채 청군에 맞섰다.
하지만…

sub> 인조@조선 16대 왕·인조 14년(1636년) 12월 17일

우리 계속 청과 싸워 명과 의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오? 아니며 항복하고 청의 신하가 되어야 하는 것이오?

sub>
최명길@주화파 : 굶주림이 심하여 살아 있는 말과 소는 서로 그 꼬리를 뜯어 먹는다 하옵니다. 백성들을 생각하여 청과 화해도 고민해 보심이...
김상헌@주전론 :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도원수 김자점이 1만 7천 여 명의 군사를 모아 미원(경기도 양평)지역까지 당도 하였고, 곧 청과 싸울 것이옵니다. 청을 몰아내고 명과의 의리를 지킬 수 있사옵니다.

na> 그야말로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
하지만, 전쟁 중에도 명과의 의리를 지킬 것인지 실리를 따져 청과 화해 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계속 되었다.

sub>
나만갑@식량담당관·인조 15년(1637년) 1월
남한산성에 들어온 지 24일째, 남은 군량은 겨우 2800석. 하루 130석 만 먹어도 20여일 밖에 버티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어찌 해야 하옵니까?

인조@조선 16대 왕: 김상헌에 한표. 군량 부족하다 소리만 말고 어찌 지구전을 준비해야 할지 방안부터 마련하시오
최명길@주화파 : 군사들은 방한복 대신 빈 가마니를 쓰고 버티다 제대로 한번 싸우지도 못한 채 얼어죽는다 하옵니다. 의리도 좋지만 백성을 위한 실리도 생각해 주시옵소서
김상헌@주전론 : 오랑캐의 신하는 될 수는 없소이다. 나라가 없어져도 명에 대한 의리는 저버릴 수 없습니다.

na> 명분과 실리를 앞세운 논쟁이 계속 되는 가운데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 졌고,
주전론을 지지하던 인조 역시
점점 더 버티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sub> 최명길@주화파 · 인조 15년(1637년) 1월
조선 국왕은 삼가 대청국 관온 인성 황제에게 글을 올립니다.
황제께서 바야흐로 만물을 살리는 천지의 마음을 갖고 계신다면, 소방이 어찌 온전히 살려주고 관대하게 걸러주는 대상에 포함되지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황제의 덕이 하늘과 같아 반드시 불쌍하게 여겨 용서하실 것이기에, 감히 실정을 토로하며 공손히 은혜로운 분부를 기다립니다

na> 실리를 추구하던 최명길은
청에 대한 항복문서를 작성하였다
하지만…

명과의 의리를 중시하던 김상헌은 최명길의
상소를 찢어버렸고, 최명길은 다시 이를 붙여 청에게 보내는 일이 발생한다.

sub> #삼정도 나루/ 인조항복
홍타이지@청나라 두 번째 황제·인조15년(1637년)1월 28일
인조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아나게 하였으며
거의 망해가는 그대의 종사를 온전하게 하고
이미 잃었던 그대의 처지를 완전하게 해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생각하라

na> 결국 청에 항복한 조선, 인조는 삼전도 나루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었고, 조선은 청과 군신의 관계를 맺었다.

삼전도 나루는 지금의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부근이며,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의 강압으로 세운 삼전도비가 지금도 남아있다.
비석에는 인조가 삼전도 수향단에서 항복한 사실이 몽골문자, 만주문자, 한자로 새겨져있다.

주전론자인 김상헌은 청의 연호를 쓰지 않는 다는 이유로, 주화파 최명길은 명에 밀서를 보냈다는 이유로 청으로 끌려갔다.
김상현이 청으로 끌려가며 지은
시조가 지금도 전해진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sub> 김상헌@주전론·인조 22년(1644년)
從尋兩世好(종심양세호) - 조용히 두 사람의 생각을 찾아보니
頓釋百年疑(돈석백년의) - 문득 백년의 의심이 풀리는구료.

댓글>
최명길@주화파
君心如石終難轉(군심여석종난전 ) - 그 대 마음 돌 같아서 돌리기 어렵고
吾道如環信所隨(오도여환신소수) - 나의 도는 고리같아 경우에 따라 돌리기도 한다오.

na> 7년 정도의 세월을 청에서 볼모로 지내며 수모와 시련을 겪은 두 사람은
이후 모두 조선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