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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
UCI I801:1609001-001-V00020
제목 18강 조선의 실학
콘텐츠 유형 동영상 언어정보
생산자 정보
생산자 정보
생산자 생산일자
문화재청 2016-06-01
기여자 정보
기여자 정보
역할 정보 기여자 명
배포사 한국문화재재단
개발사 문화재청
제작사 CL9
주연 최태성
기술 정보
기술 정보
기술 영역 기술 내용
기타정보
내용정보 사적 제3호 수원 화성
역사정보 조선시대
인물정보
지리정보 경기도 수원시
관련 키워드 ;;최태성;큰별쌤;선사시대;실학;조선시대;성리학;양반;신분제;사상;학문;교육;
요약 정보 마스터
내용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다.
하지만 양반 중심의 신분제가 요동치는 등 조선 후기, 새로운 사상이 등장한다.
실생활의 유익을 목표로 유행한 학풍, 바로 실학이다.
자주적이고 민족적이며 근대 지향적인 학문 실학이 남긴 결과물들을 살펴본다.
대본 정보 안녕하세요! 큰별쌤 최태성입니다.
지금 보시는 것은
1997년에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입니다.
수원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던 곳이죠.
효심이 강한 정조가 이곳에
10년을 계획해서 신도시를 만들려고 했어요.
그런데 거대하고 아름다운 화성을
2년 반 만에 완성했죠.
물론 그렇다고 속전속결로 대충 지었다는 건 아니에요.
우선 전국에서 모여든 가난한 농민들을 돈을 주고 고용해
백성들의 참여가 높았습니다.
또 다산 정약용이 개발한 거중기와 녹로와 같은
새로운 첨단 기술을 활용했거든요.
커다란 돌을 옮기는 대신 벽돌을 구워서 성을 쌓는 등
사회경제적 현실에 맞도록 공사를 진행한 거죠.
수원화성은 정조와 정약용의 ‘실학’ 정신으로 세운 겁니다.
오늘은 조선시대의 실학에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퀴즈를 보죠.
다음 글을 쓴 실학자들의 주장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농업은 물론이고 상공업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이고 배워서
우리 백성을 이롭게 한 다음에야,
중국에는 볼 만한 것이 없다 하여도 좋을 것이다.
먼 지방의 물자가 통한 다음이라야 재물을 늘리고
백 가지 기구를 생산할 수 있다.
무릇 수레 백 채에 싣는 양이
배 한 척에 싣는 것에 미치지 못하며,
육로로 천 리를 가는 것이
뱃길로 만 리를 가는 것보다 편리하지 못하다.
이 퀴즈를 풀기 위해서는
실학의 이론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함께 볼까요.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죠.
하지만 성리학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조선 후기가 되면 새로운 사상이 나타나는데요,
실생활의 유익을 목표로 유행한 학풍, 바로 실학입니다.
실학은 자주적이고 민족적이며 근대 지향적인 학문입니다.
실학 정신을 집약한 표어들을 볼까요.
우선 실사구시를 강조했습니다.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죠.
실증적으로 증명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진리가 아니라는 거죠.
지식을 진리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것이 실생활에 얼마나 효용가치가 있느냐를 따집니다.
실학자들은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조선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키려고 했습니다.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여러 이론들을 내놓았는데요,
농업중심개혁론과 상업중심개혁론입니다.
지금부터 실학을 중심으로 그들이 남긴 결과물을 볼게요.
먼저 농업중심개혁론입니다.
농업중심개혁론을 외친 이들을 중농학파라고 부르죠.
요즘 교과서에서는 쓰지 않는 표현이지만
귀에 익은 단어일 테니 중농학파라고 할게요.
중농학파는 경기 지역 남인들이 주축을 이룹니다.
숙종 때 서인에게 카운터 펀치를 맞고
정권에서 밀려난 이들이죠.
그런데 지방으로 낙향해서 살다 보니
주변에 있는 백성의 삶이 너무 고달픈 걸 깨달은 겁니다.
가난한 소작농은 한 뼘 디디고 설 땅조차 없었거든요.
지주에게 지대를 바치느라 허리만 휘고요.
국가의 근본이 뭐지요? 농민 아닙니까.
그래서 일단 농민부터 살리는 것이
시급하다고 여깁니다.
이들은 토지분배를 강조했어요.
당시에 나라의 땅은 대부분 누가 가지고 있었나요?
양반이지요.
그래서 이들 학자들은
이것을 혁파하고 자영농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려면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죠.
예, 토지개혁 시행입니다.
이들이 어떤 개혁안을 내놓았는지 꼭 기억해 두세요.
중농학파의 시초인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균전론을 주장했어요.
우선 전국의 토지를 국유화한 다음에
신분에 따라 나눠주자고 한 거죠.
여러분 ‘고를 균(均)’ 자가 들어간다고 해서
헷갈리면 안 되는 게 있어요.
토지분배를 주장했지만, 균등분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형원은 일단은
신분제의 한계에 갇혀 있는 거지요.
후에 유형원의 책을 본 제자들이
스승의 이론이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토지분배를 하려면
먼저 전국의 토지를 몰수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양반들이 얌전히 내놓겠어요?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한전론을 주장합니다.
한전론은 토지를 제한하는 이론이라는 뜻인데요.
먹고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토지를
영업전으로 설정하자고 합니다.
영업전은 매매 불가, 즉 사거나 팔 수 없는 건데요
혹시라도 최악의 상황이 닥쳐서
“세금을 못 냈으니까 땅이라도 대신 내!”라는 말을 들어도
영업전만큼은 빼앗기지 않게 하자는 거죠.
중농학파 중에 또 한 사람 정약용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 철학자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죠.
『경세유표』나 『목민심서』로 유명하잖아요.
정약용은 평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어허, 농민이 이렇게 궁핍해서야
이 조선 사회가 유지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유교적 이상에 따라
농사짓는 사람이 토지를 소유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합니다.
정약용은 여전론을 제안했어요.
공동으로 토지를 소유하고 노동량에 따라 분배하는 거죠.
토지의 사유화를 인정하지 않는 거죠.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개혁안이었지만,
사실 이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정약용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정전제를 주장했어요.
토지를 ‘우물 정(井)’ 자 그리듯
9등분으로 구획을 나눈 후에,
가장자리의 여덟 토지는 농민 여덟 명에게 나누어주고,
가운데 부분은 공동으로 경작하자는 거였어요.
그리고 이 공동 소유인 땅에서 나온 생산물을
세금으로 내자고 했습니다.
물론 아쉽게도 이 이론도
중농학파의 다른 이론들처럼
안타깝게도 정책에는 하나도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중상학파는 어땠을까요?
중상학파는 상업중심개혁론자들입니다.
중농학파를 경세치용학파라고 부른다면,
중상학파는 이용후생학파라고도 해요.
중상학파도 중농학파처럼 토지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다만 토지 분배가 아닌
토지의 생산력을 향상하는 데에 주안점을 뒀어요.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상업이 발달해야 하고,
그러려면 돈이나 다름없는 쌀을
더 많이 생산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또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수용하자고 주장합니다.
어떤 개혁자들이 있었냐면요,
유수원은 『우서』를 써서
중상학파의 기본 이론이 되는 개념들을 정립합니다.
사농공상의 직업 평등을 주장했고요,
또 농업과 상업에 전문적인 경영을 도입하자고 합니다.
농부와 상인이 무시당하지 않고
전문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거였어요.
홍대용은 『임하경륜』에서
문벌제도의 폐단이 없어져야
조선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열하일기』로 유명한 박지원 아시죠.
『열하일기』는 청나라 건륭제의 생일을 맞아
사절단에 끼어서 중국에 다녀온 일을 기록한
여행문이에요,
박지원이 중국의 여기저기를 다니다 보니
사대부들이 오랑캐라며 상종하지 않았던 청나라가
장난 아니게 융성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조선과 청나라를 조목조목 비교하며
여러 가지 개혁안을 내놓았어요.
박지원은 우선 수레와 선박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어요.
당시에는 육로가 제대로 깔려 있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도로를 닦고 수레를 발전시키자는 뜻이었죠.
오늘날로 치면 고속도로를 내고 자동차를 만들자는 거예요.
그래야 상품이 대량으로 왔다 갔다 하며
유통이 활발해질 것 아니에요?
선박을 발전시키자는 말도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또 박지원은 화폐를 쓰자고 주장합니다.
돈이 돌고돌아야 상업이 발달한다는 거겠죠?
무거운 쌀가마니로 물물매매하기보다
가벼운 돈 한 냥을 주고받는 게 낫잖아요.
박제가도 『북학의』를 써서
청나라의 학문을 보고 배우자고 독려합니다.
박지원과 마찬가지로 수레와 선박을 굉장히 중시하고요.
그런데 중상학파로서
박제가를 특히 눈여겨볼 이유가 있습니다.
박제가는 소비를 강조했다는 것!
이게 박제가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박제가는 지나치게 절약하는 것보다는
적당한 소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죠.
왜 그럴까요?
그래야만 상업, 수공업이 발달하기 때문입니다.
이거 굉장히 자본주의적인 마인드잖아요?
박제가는 이런 예시를 듭니다.
주전자가 찌그러졌는데 계속 쓰면
주전자 만드는 장인은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사냐,
적당히 쓰다가 못 쓰게 되면 버리고 새것을 사라.
그래야 장인은 물건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돈이 돌아야 경제가 산다는 이론입니다.
소비론은 요즘도 종종 들리는 매우 혁신적인 이론이죠?
수원화성 건축에 참여한 정약용처럼
실학자들은 다른 분야에서도 활약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홍대용은 천문을 관측할
기계식 혼천의를 발명했죠.
자, 숨 가쁘게 달려왔습니다.
다시 퀴즈를 볼게요.
다음 글을 쓴 실학자들의 주장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요. //
수레 이용을 강조한 사람들은 중상학자들이죠.
북학파, 이용후생학파라고 불린
중상학자 실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이들은 화폐의 이용을 늘리자고 주장했죠.
화폐 사용을 금지하자는 주장은
중농학자 실학자인 이익의 주장입니다.
정답은 2번이네요.
오늘은 조선의 실학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조선 후기에 실학자들은 비주류였습니다.
이론은 앞섰지만 개혁을 이뤄낼 만한 실권이 없어
정책에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오늘날에는 어떤가요?
실학은 현재 민족주의적이며 근대 지향적인 학문으로
재평가 받고 있습니다.
만약 조선 사회가
이들의 목소리를 좀 더 귀 기울여 들었다면,
이들의 입장을 탄력적으로 수용해
정책에 반영했다면 어땠을까요?
조선 후기는
사회적으로 양반 위주의 신분제가 요동치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고
농업과 상업을 발전시키려는 학설을 내는 등
변화가 많았던 시기입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오직 성리학적 이상만을 좇았던 게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강의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