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진흥원 국가유산 콘텐츠 검색 서비스


대표 이미지 및 저작권 정보(N2L)

대표 이미지 및 저작권 정보
대표이미지 저작권정보
저작권자 국가유산진흥원
전자자원소장처
공공누리 저작권
제4유형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CCL 정보
소스코드 <iframe width="1000px" height="480px" src="http://uci.k-heritage.tv/resolver/I801:1609002-001-V00022?t=3"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관련 파일 및 자원정보(N2R)

관련 파일 및 자원정보
번호 파일명 파일크기 다운로드
1 박시백의 세계유산순례_팔만대장경_마스터_CHF_1280X720.mp4 557.56 MB 다운로드
2 박시백의 세계유산순례_팔만대장경_마스터_CHF_1920X1080.mp4 557.30 MB 다운로드

콘텐츠 기본 정보(N2C)

콘텐츠 기본 정보
UCI I801:1609002-001-V00022
제목 박시백의 세계유산순례 팔만대장경
콘텐츠 유형 동영상 언어정보
생산자 정보
생산자 정보
생산자 생산일자
한국문화재재단 2016-09-29
기여자 정보
기여자 정보
역할 정보 기여자 명
제작사 4U 미디어
기술 정보
기술 정보
기술 영역 기술 내용
내용정보 국보 제32호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역사정보 고려시대
인물정보 고려 고종 23년
지리정보 경상남도 합천군
관련 키워드 ;불교;박시백;세계유산순례;법보사찰;해인사;팔만대장경;국보;국보 32호;부처님;
요약 정보 마스터
내용 불(佛), 법(法), 승(僧)을 불교의 삼보 중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을 담고 있는
국내 제일의 법보사찰 해인사. 이곳에서 품고 있는 또 다른 보물은 팔만대장경이다.
그런데 이 팔만대장경은 처음부터 해인사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팔만대장경은 언제, 어떻게 해인사에 오게 되었을까? 해인사에 옮겨진 뒤에도 단 한 장의 손실 없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팔만대장경.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또 창건 이후 수많은 화재와 전란을 겪으며 해인사를 지켜낸 사람들의 이야기도 만난다.
대본 정보 #. 북치는 스님 + 팔만대장경 교차
* 자막) 제작기간 총 16년 → 연간 동원인원 130만 여 명 → 경판 수 81,258장 →
새겨진 글자 오천만 여자 → 팔만대장경 (* 이런 순서대로 자막)
-------------------------------------------------------------
[MC 오프닝]

#. 앉아있는 MC~장경판전 건물 보는 MC 28초

박시백의 세계문화유산.
오늘은 천년의 우리 유산, 팔만대장경이 있는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로 떠난다.

#. MC 멘트 중 해당 부분 자막
* 자막) 불교의 삼보 ‘불(佛), 법(法), 승(僧)’
해인사는 부처의 가르침 ‘법’을 담고 있는 사찰

-------------------------------------------------------------
[VCR ① 대장경 8백년의 비밀]

#. 산과 구름 흐르는 16초
(좀 보다가)
합천 가야산은 빼어난 아름다움 때문에
예로부터 해동의 10승지, 조선 8경으로 꼽혔다.

#. 계곡물 8초 홍류동 계곡은 조선 8경중에서도 으뜸인 장관이다.

#. 가야산에서 해인사로 부감 풀샷 15초
가야산 첩첩산중에 천년 사찰 해인사가 있고,
그 해인사에 팔만대장경이 있다.

#. 해인사 문~ 해인사는 가야산에 자리한 고요한 사찰이지만,
이름은 예로부터 널리 퍼져있었다.

#. 담장 PAN 부처가 전해준 ‘깨달음의 진리’를 새겨 놓은 팔만대장경과
팔만대장경을 모신 건물 장경판전.
해인사에 간직되어온 이 보물은 민족의 긍지 자체였다.

#. 사찰 부감 PAN 해인사는 처음부터 대장경을 모시고 있던 건 아니었다.
1251년 고려 고종 때 완성된 팔만대장경은
대장경판당에 보관됐다가, 강화도 선원사에 모셔졌다.

#. 실록 대장경이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온 건 조선 초기로,
조선왕조실록엔 그 이동 기록이 남아있다.

자막) “임금이 용산강 행차 강화선원에서 운반해온 대장경판을 봤다.”
<태조실록 7년 5월>
“해인사에서 대장경을 인쇄하는 승려들에게 공양하게 했다.”
<정종 원년 정월>

#. 경판 대장경판 한 장의 무게는 약 3kg.
팔만 장에 이르는 무게를 다 합치면 무려 240톤이다.
엄청난 규모의 대장경을, 그것도 강화도에서 해인사까지
운반하는 일은, 상상을 초월하는 작업이였다.

#. 나루터 PAN 해인사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령에
대장경과 관련 깊은 나루가 있다.
나루의 이름도 대장경이 도착했다고 해서 ‘장경나루’다.
장경나루를 거쳐 해인사에 도착한 팔만대장경은
오늘날까지 소중하게 보존돼 왔다.

#. 운반하는 그림 그것은 팔만대장경을 모시고 있는
장경판전 건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 산 PAN 장경판전은 세 개의 계곡이 흐르는 가야산 중턱에
서남향으로 서있다. 동남향으로 불어오는 습기 찬 바람을
거스르기 위해서였다.
#. 사찰 부감 이런 위치 덕분에 계곡의 바람은
장경판전 건물을 비스듬히 지나칠 수 있었다.

#. 건물 PAN 또한 장경판전 자리는 풍부한 일조량이 보장되는
천혜의 장소이기도 했다.
겨울철 산 속 평균 일조량은 일곱 시간이 넘었고,
따뜻한 햇빛은 하루 한번 장경판전 전체를 골고루 비춘다.

#. 김현민 (지역환경해설사) 인터뷰
“(장견판전 보존의 과학성) 숯, 석회, 소금으로 습기를 조절”

#. 장경판전 내부 목판에 치명적인 습기를 피하고,
햇빛을 확보하는 최적의 장소에 세워진 장경판전.

#. 판전 건물 PAN 조상들의 빼어난 지혜는
장경판전의 구조에서도 찾을 수 있다.
#. 건물 T.D 창으로 건물 안 공기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창문.
장경판전 건물의 앞면은 윗창이 작고, 아랫창이 크다.
반면, 뒷면의 창은 윗창이 크고, 아랫창이 작다.

#. CG / 공기흐름도
서로 크기를 달리한 창들을 마주보게 해서,
공기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건물 내부의 온도차를 줄였다.

#. 판전 내부 서가배열 역시 팔만대장경 보존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깃들어 있다.
-경판들 T.S 경판과 경판 사이엔 약간의 공간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경판에 부착된 마구리 덕분이다.
경판을 서로 떨어뜨려서 공기가 움직일 공간을 확보하고
습기를 원천봉쇄한 것이다.
-서가 PAN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의 움직임까지 고려한 섬세한 배치.
대장경에 대한 조상들의 지극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서가 T.D 대장경을 보존하기 위한 건축공학은
판전 내부 흙바닥에도 숨어 있었다.
-바닥 T.S 습기에 타격을 입는 나무의 성질 때문에
원활한 배수만큼 중요한 조건은 없었다.
이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장경판전의 바닥은 매우 독특한 지층 구조로 만들어졌다.

-CG / 지층구조 소금과 숯 모래횟가루가 만들어낸 독특한 지층구조.
이러한 바닥의 재질 덕분에 장경판전은
지금까지 침수나 습기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서가 PAN 장경판전은 조선 초기 과학의 집대성이자
그 시대가 낳은 지혜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했던 것은 단 하나.
대장경을 영원히 보존코자 하는 마음이었다.

#. 판전 부감 Z.O~해인사 경내 풀샷 Z.O
(좀 보다가)
대장경에 대한 경외심으로
최적의 장소에 최고의 건축을 선보인 사람들.
장경판전을 완성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팔만대장경은 천 년의 세월 동안 우리 곁에 남을 수 있었다.

----------------------------------------------------------------------
VCR ② 해인사를 지킨 사람들

#. 사찰의 문~나무들 해인사가 창건 된 건, 1200년 전 신라 애장왕 때였다.
기록에 의하면, 불치병에 걸린 왕비를
순응스님과 이정스님이 법력으로 치료해주면서
해인사가 세워졌다고 한다.
이처럼 해인사의 역사는
나라의 안녕과 왕조의 번영을 기원하면서 시작됐다.

#. 나무 기둥 T.S 긴 세월 동안, 가슴 아픈 역사도 있었다.
신라 말의 혼란기, 각처에서 도적떼들이 일어났고,
이들로부터 해인사를 지키다가 목숨을 잃은 스님들이 있었다.

#. 탑 SK 묘길상탑은 그 때 죽어간 쉰여섯 명의 스님들을 기려
세운 탑이다.

#. 경내 PAN 전설 같은 이야기도 남아 있다.
고려 개국 당시, 견훤과 전쟁 중이었던 왕건은
해인사 주지 스님이었던 희랑대사에게 도움을 청한다.
#. 대사 그림~상 이에 희랑대사는 화엄신장을 불러내 견훤의 군대를 물리쳤다.
왕건은 보답의 뜻으로 해인사를 고려의 국찰로 지정한다.
왕건이냐, 견훤이냐 선택의 기로에서 섰던 희랑대사.
해인사는 시대를 읽을 줄 아는 혜안을 가진
선승들의 고향이었다.

#. 사찰+구름~ 난세를 만났을 때, 해인사 스님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해인사 서쪽에 위치한 암자, 홍제암.
#. 사명대사 영정 이곳에선 사명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던 구국의 영웅은
모든 영광을 뒤로하고 해인사로 들어왔다.
그리고 3년 뒤, 이곳 홍제암에서 입적했다.

#. 전투도 나라에 커다란 전란이 닥칠 때마다 가야산 일대에선
많은 승병과 의병들이 일어났다.
(자막/ 1592년 임진왜란)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해인사 앞 성주까지 점령했지만,
해인사를 넘보지 못했던 건 이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과 승병들의 눈부신 활약 덕분이었다.

#. 비석들 (자막/사명대사석장비)
그들의 숭고한 희생은 해인사 곳곳에 새겨져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 전투 자료영상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리고 1년 뒤 9월 18일.
공군비행단 제1전투비행단은 가야산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목표지점은 합천 해인사.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 해인사를 구한 건 김영환 장군이었다.

#. 비행기 날고~김영환 장군 사진들
김영환 장군은
우리나라 공군 최초로 붉은 머플러를 두르고 출격해
공군의 상징인 ‘빨간마후라’를 만들어낸 주인공이었으며
공군 창설의 주역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김영환 장군은 공군비행단 소속 대령이었다.

#. 산 PAN 1951년 9월 가야산 일대에선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과 국군이 접전 중이었다.
공군비행단이 인민군을 소탕하기 위해 출격했는데,
폭격 지점을 알리기 위해 연막탄이 떨어진 곳은
바로, 해인사 앞마당이었다.

#. 비행기 날고+장군 사진
해인사에 닥친 위험을 알게 된 김영환 장군은
다급히 폭격 중지 명령을 내린다.

자막) “수백 명 공비를 소탕하는 것보다 세계적 보물인 팔만대장경이 더 소중하다”

그리고 비행기를 돌려 해인사 너머 가야산을 폭격했다.
위기의 순간, 김영환 장군의 기지 덕분에
해인사는 무사할 수 있었다.

#. 김정기(김영환 장군 아들) 인터뷰
“저희 아버님께서는 팔만대장경의 참뜻을 알고 계셨던 거 같습니다. 글자 하나하나가 결국은 호국정신이겠죠 나라가 정말 어려운 시기에도 정신적인 것을 계승할 수 있는 8만대장경이 없어지면 안된다는 굳은 신념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 해인사 SK 해인사에 깃들여진 정신은 때론 나라를 구했고,
때론 그 정신을 잇고자 하는 이들에 의해 지켜져 왔다.
이곳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호국의 정신이 새겨져있다.

----------------------------------------------------------------------
VCR ③ 마음을 다해 새긴 심작 (心作)

#. 앞마당 (4초) (보고)
-pan 장경판전 (10초) 해인사에 봉안돼있는 팔만대장경.
대장경은 부처님의 말씀과 교단의 계율, 경률의 해석까지

-서가 (18초) 이 세 가지를 모은 불교문헌의 총집을 뜻한다.
수많은 나라들이 대장경을 간행했지만,
고려의 팔만대장경은
가장 완벽한 대장경으로 꼽힌다.
-판전 한 장 z.i (5초) (보고)
글자 pan (7초) 팔만 여 장의 경판을 오직 한 사람이 써내려간 듯,
한결같고 아름다운 글씨.
장경판전 td (5초) 오 천 만 여 자를 새긴 완결성.
장경판 pan (10초) 대장경이 만들어진 배경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거란침입 지도 td 1010년 거란의 군대가 고려의 수도 개경을 향했다.
고려 현종은 부처님의 힘을 빌려, 외적을 물리치고자
고려사 기록 (9초)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 초조대장경을 간행한다.

자막) “선종 정묘 4년 여름 4월 경자일에 왕이 귀법사에 가서 대장경의 완성을 경축하였다.” - ‘고려사’ 중에서

-“대장경” 불그림 하지만 이렇게 완성된 초조대장경은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버린다.

장경판전 (4초) 이에 고려인들은 다시 대장경 제작에 들어간다.
팔만대장경 z.i (8초) 고려 역사상 가장 불안정한 시기에 만들어졌지만
대장경 제작은 완벽을 추구했다.

강화도 갯벌 (3초) 경판용 목재는 7년간 갯벌에 묻어두었다.
거목들 pan (7초) 나무의 숨을 죽이고 갈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새기는 글씨 (11초) 목판에 새길 부처님의 가르침은 교정을 거쳐 필사되었다.
오천만자를 판각했지만 탈자나 오자가 없었다.

대장경판 마구리 판각이 끝난 경판엔 뒤틀림을 막기 위해
마구리를 부착했고, 방부와 방수를 위해 옻나무 액을 칠했다.
장경판전 서가 td 모든 제작 과정은 앞으로 대장경이 살아갈 천년의 시간을
계획한 듯이 만들어졌다.

장경판전 서가 pan 그것은 언젠가 국난이 끝나고,
고려의 역사가 계속되리란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해인사 입구 z,i 제작에 투입된 물자와 인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거목들 (6초) 8만 여 장의 경판을 위해
잘 자란 통나무 만 오천 그루가 필요했다.
나무 s.k (6초) 5만여 명의 사람들이 경전을 필사했고,
글씨 새기는 손 연인원 125만 명의 각수가 대장경을 판각했다.
핵심공정인 경전필사와 판각 외에도,
한지 제작과 경판 손질. 옻액을 얻고
칼질 (5초) 교정을 보는 등 다양한 일손을 필요로 했다.
한지 덧대 바르고 제작을 뒷바라지한 사람들까지 고려한다면
동원된 인원은 연인원 130만 명 이상.

장경판과 인경본 그야말로 ‘고려’라는 나라가
모든 힘을 쏟아 부은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장경판 pan (13초) 나라 전체가 몽고군의 말발굽에 짓밟히던 시절.
그 혼란을 불심에 의지해 이겨내려 했던 사람들.
장인의 이름 z.i+스틸 대장경판 곳곳엔 그들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다.

#. 아래 밑줄에 자막 표시!
‘진사’ 뜨고 사회지식인과 지배층의 이름은 물론이고,
‘천태산인’ 뜨고 (5초) 직접 경판 제작에 참여한 기술자의 이름,
‘사미’ 뜨고 (4초) 대장경 제작을 돕고자 재물을 시주한
이름 없는 백성의 이름까지.
‘신녀’ 뜨고 (4초) (보고)
새기는 손 (6초) 대역사를 위해선 남녀의 구분도, 신분의 차이도 없었다.
심작 새기고 (10초) 전 고려인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는
구심점이 바로, 팔만대장경이었다.

#. 김민현 (지역환경해설사) 인터뷰
(임금-신하-백성 일체감 형성. 대몽항쟁이란 국난극복이 당시의 시대정신)

심작뜨고 (6초) 대장경에 자주 등장하는 ‘심작’이라는 글귀는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담고 있다.

두 번째 심작 뜨고 (보고)
자막) 심작 “마음을 다해 만들다”

심작 여러 개 뜨고 수백 차례. 같은 글귀를 새기면서
그들이 진정, 이루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동국이상국집 (11초) 동국이상국집에는 팔만대장경 제작에 착수했던
고려인들의 간절한 염원이 남아있다.

자막) “현종때 거란이 쳐들어왔는데 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했더니 거란이 스스로 물러갔다. 어찌 그때만 거란이 물러가고 지금의 몽고는 물러가지 않겠는가?” - ‘동국이상국집’ 중에서

#. 스님 걸어오는 장경판 서가 (보고)

-팔만대장경 꺼내고~ 경판 수 팔만 천이백 쉰 여덟장.
새겨진 글자 5천 만 여 자.
담긴 것은 단 하나.
불심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고려인의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