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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BS1TV_천상의컬렉션_25편_마스터_CHF_1920X1080.mp4 1.27 GB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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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
UCI I801:1612002-001-V00035
제목 [KBS] 천상의 컬렉션 25회 - 순종 황태자 금책, 나혜석 자화상, 백범 김구 회중시계
콘텐츠 유형 동영상 언어정보 국문
생산자 정보
생산자 정보
생산자 생산일자
한국문화재재단 2018-07-05
기여자 정보
기여자 정보
역할 정보 기여자 명
방송사 KBS
주연 서경석
주연 방은진
주연 안내상
기술 정보
기술 정보
기술 영역 기술 내용
기타정보
내용정보 등록문화재 제441호 백범 김구 회중시계, 등록문화재 제439호 백범 김구 혈의 일괄, 보물 제568-3호 윤봉길의사 유품
역사정보 조선시대
인물정보 고종, 순종, 나혜석, 김구, 윤봉길
지리정보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관련 키워드 ;KBS;천상의 컬렉션;순종 황태자 금책;나혜석 자화상;백범 김구 회중시계;탁부실대;김구;나혜석;자화상;회중시계;순종;금책;
내용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단 하나의 보물, 천상의 컬렉션!
우리 문화재도 애정을 가지고 오래, 자세히 보았을 때 진정한 가치를 드러낸다.
수많은 세월을 지나 기적처럼 전해진 문화재의 아름다움과 가치,
그에 얽힌 살아있는 역사 이야기를 호스트의 생생한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살펴보고,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을 단 하나의 보물을 선정한다.

개그맨 서경석이 소개하는 '순종 황태자 금책'
영화감독 방은진이 소개하는 '나혜석 자화상'
배우 안내상이 소개하는 '백범 김구 회중시계'
대본 정보 MC 한상헌>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단 하나의 보물을 선택하는 시간!
<천상의 컬렉션>입니다. 반갑습니다.

한국의 근대사-라고 하면
보통 개항 시기부터
광복 이전까지를 말하는데요.

오늘 천상의 컬렉션에서는
가장 드라마틱했던 근대사!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는
보물 세 가지를 만나보는
특별한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이 자리를 빛내주신 100분의 현장 평가단은
호스트 세 분의 이야기를 듣고
가장 마음에 드는 보물에
불을 밝혀주시면 됩니다.

이 자리에 계신, 100분의 현장평가단은
세 개의 보물을 다 보고,
‘이 보물이 가장 내 마음을 움직였다’고 생각하는
단 하나의 보물에 투표를 해야 하는데요.

세 개의 보물 가운데 가장 많은 표를 얻은 보물이
이번 주 <천상의 컬렉션>에 오르게 됩니다.

자, 여러분, 준비되셨나요?
그럼 지금 바로!
첫 번째 보물을 만나보시죠.

1. 서경석 <고종 금책>
서경석> 오늘 오신 청중 평가단 여러분
화려하고 찬란한 색 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세요?
우리 어린이 평가단의 입모양이 핑크...

...그 어떤 것도 견줄 수 없는 고귀함의 극치
바로 골드, 황금색이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금은
불변의 가치를 지녔고
엄청난 부와 강력한 권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어떻습니까? 부와 권위가 느껴지십니까?
제 주변의 모든 금들을 다 모아봤는데요,
제가 오늘 여러분께 소개할 보물!
바로 이 금과 관련 있습니다.

금!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도 마음껏 쓸 수 있던 게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왕도 금을 함부로 쓰지 못했어요.

왕이 입는 곤룡포 아시죠?
자, 잘 한 번 떠올려보세요. 조선시대 왕들...
정조든 세종이든...
다 붉은색 곤룡포를 입은 초상화만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최초로 금 옷을 입은 왕이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자
대한제국을 세운 고종 황제입니다.

그리고 고종에게는 그의 아들 순종이 있었죠.
고종과 순종, 부자사이에 주고받은 책 한권이
있었는데요, 평범한 책이 아니었습니다.
금으로 만든 책이었죠. 오늘의 보물!
순종 황태자 ‘금책’입니다!!

말 그대로 번쩍번쩍 금으로 되어 있어요.
무게가 무려 4kg이 넘습니다.
들고 다니면서 읽으려면 체력이 필요해요

글씨를 좀 볼까요?
아버지 고종이 황태자 순종에게 전하는 글을
한 글자 한 글자 새긴 뒤,
그 위에 당주홍이라는 붉은 물감,
중국에서 수입한 최고급 안료로 메우고,
금 책 사이를 역시 붉은 끈, 홍조로 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황금과 붉은 색의 오묘한 콜라보!
정말 화려하지 않습니까?


자, 그런데... 그 전에는 왕이 왕비나 왕세자에게
‘금책’을 하사하지 않았습니다.
왕세자에게는 대나무 편으로 만든 죽책
왕비에게도 옥으로 만든 옥책을 내렸습니다.

이상하죠? 그런데 고종은 왜!
아들 순종에게 ‘죽책’이 아닌, 그렇다고 ‘옥책’도 아닌 ‘금책’을 하사한 걸까요?

더욱 이상한 것은, 당시 조선의 상황입니다.
아시다시피 열강의 간섭과 내부 분열로
혼란이 극심했던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국운은 쇠하고 있는데... 값비싼 금으로 된 책을
내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청나라도, 일본도 조선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흔들리는 나라를 지켜내야 했던 왕,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고종은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국격을 높이고
격에 맞게 황제가 됩니다.
기억하시죠?
고종과 순종만이 금옷을 입었던 것.
바로 황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황제가 황태자에게 내리는 책문이기에,
‘죽책’이나 ‘옥책’이 아닌 ‘금책’이었던 것이지요!!

“황제의 나라를 더 이상 우습게보지 말라!
청나라든 일본이든 그 누구에게도 놀아나지 않겠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다음 황제인
황태자 순종에게 이릅니다.

“제도를 새롭게 하였으니
지금 너를 책봉하여 황태자로 삼노라
대통을 이어 종묘를 지키도록 하라.
군사를 위로하고 나라를 감독하라.“

여기까지만 보면 내용이 평범합니다.
세자를 책봉하는 여느 책문과 다르지 않아요.

그런데 여기 제 가슴에 박힌
네 글자가 더 있었습니다.

‘탁부실대’
부탁함이 실로 크다!!!

고종이 순종을 황태자로 책봉했던 그 때,
말씀드렸듯이...태평성대를 누리다가
나라를 물려주는 행복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위기를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혹여 내가 못하면 아들인 너라도
나라와 백성을 지켜내 달라는 애절한 마음을 담은
부탁이었던 것입니다.

왕이자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해줄 수 있었던 것이,
황태자로 책봉하고, 금책을 내려,
겉으로라도 화려해 보이게 해준 것이지요.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요.

그런데, 더 안타까운 사실 하나 말씀드릴게요.
지금 보고 계신 저 금책은!!
현전하는 순종 황태자 금책의 모습이 아닙니다.

저것은 <대례의궤> 속에 쓰여진
금책 제작 방식을 바탕으로 재현해 본 것이고요.

현재 상태는
붉은 물감은 누군가에 의해 씻겨 졌고,
붉은 끈 또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곳곳에 얼룩도 보입니다.
온전히 전해지지 못하고 여러 사람들의
손을 타며 상처를 입은 것이지요.

‘금책’을 하사받은 순종,
아버지 고종의 부탁대로 어떻게든 나라를 지키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한 많은 생을 마감하지요.

마지막 순간!
순종은, 아버지 고종의 묘가 있는 쪽으로
자신의 머리를 돌려 달라합니다.
그리고 유언을 남깁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백성들이여,
몸과 마음을 바쳐 광복을 이루라.
내 넋이라도 그대들을 도우리라.’

아버지 고종이 금책에
탁부실대..부탁함이 실로 크다...
며 전했던 나라지킴을 해내지 못한 죄스러움,
그 한을 죽어서라도 풀겠다고 다짐하며,
그렇게 마지막 황제는 세상을 떠납니다.

화려한 모습으로 등장했지만
훼손되고 바래진 ‘금책’과
한 단계 승격된 황제의 나라로 출발하려 했지만
불과 13년 만에 아픈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억된 채 막을 내린 대한제국.

둘의 시작과 끝이, 아이러니하게도 닮아있습니다.

힘이 없어 당했던 아픈 역사, 실패한 역사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란,
층층이 밟고 올라가는 계단과 같습니다.
앞서 지나온 계단을 없애기 시작하면
우리는 계속 제자리걸음만 할 뿐이죠.

쓰라리고 아립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기억하고 되새겨야,
같은 아픔을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너무도 화려해서 더 가슴 아픈
순종 황태자 금책입니다.

MC 한상헌> 순종 황태자 금책, 당시 나라의 상황이 이 금책에 모두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그저 슬프기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서경석 씨께서 또 이렇게 웃음과 감동을 적절히 섞어서 선보여 주셨네요. 홍경민 씨는 어떠셨나요?

홍경민> 한 마디로 좀 속상했어요. 뭔가 해보려고 했는데 무엇 하나 제대로 되지 않았구나 싶어요. 사실 순종에 대한 평가가 그닥 좋지 않잖아요? 그런데 한편으론 어머니도 끔찍하게 살해되고 아버지까지 곁에 안 계시는데 사방에선 어떻게든 망하게 하려고 공격만 했을테고... 참 안타까웠습니다.

박영진> 안타까운데 저는 또 궁금한 게...이게 금이잖아요. 저도 금, 참 좋아하는데 금책의 무게가 4KG이라고 하셨잖아요. 이게...순금이었나요??

키 썸> 아니! 이 귀중한 보물을 가지고 순금인지 아닌지를 따지다뇨! 너무하잖아요!

박영진> 아냐! 사실 오늘 방송보는 시청자 모두 궁금해하고 있었을걸요? 맞죠? 제가 여러분을 대변해서 궁금증 해결에 나선거라고요!

서경석> 아-주 훌륭한 질문이었습니다. 저도 실은 금책! 이야기 듣자마자 순금인가? 궁금하긴 했어요. 근데 순금은 아니고요, 황동을 이용해 제작해서 도금을 했다고 해요. 아무리 금을 내세워 싶었다고 해도 당시 상황과 형편에 맞춰서 우리도 자주국가다! 라는 사실을 내세우지 않았나 싶어요.

다니엘> 전 또 하나 속상했던 부분이 훼손 됐다는 사실이었거든요. 황제가 황제에게 물려준 금책이라면 잘 지켰어야했는데 어쩌다가 훼손된 건지 궁금했어요.

박영진> 맞아요!누군가 씻어낸 흔적이 있었다고 했잖아요. 얼룩도 남아있고!! 대체 누가 저 붉은 글씨를 지운 걸까요?? 이유도 너무 궁금하네요

키 썸> 빨간색이 나쁜 것을 물리쳐주고 지켜준다라는 의미도 있는 걸로 알거든요. 그런 의미를 없애버리려고 당시에 일본 사람이나 누가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의심돼요!

서경석> 이게 사실 한국전쟁 당시에 한 미국인이 서울에서 이 금책을 손에 넣게 돼요. 그래서 헐값에 사게 됩니다. 그래서 미국에 한 박물관에 있었던 걸 1987년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우리 교민들이 모금행사를 열어요. 그래서 금책이랑 당시 여러 궁중 유물들을 다시 국내로 반환시키게 됐어요. 그래서 당시에 그런 식으로 이곳저곳을 떠돌 때 어디선가 손상이 된 게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홍경민> 와 아니! 힘없이 또 다른 나라로 건너간 걸 우리나라 교민들이 사온 거 아니에요! 광복도 그렇잖아요. 고종과 순종 땐 나라가 망했었지만 그 뒤에 국민들이 독립을 이뤄내고! 금책도 국민들이 힘을 모아서 다시 고국으로 돌려보내주고! 뭔가 운명이 반복되는 것 같아! 희한해!

강아랑> 왜 순종이 마지막에 죽으면서 자기가 귀신이 되어서라도 이 나라를 지키겠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오게끔 한 건 아니었을까요??

홍경민> 아니 그럼 순종이 금책에 빙의라도 된 겁니까?

박영진> 갑자기 왜 호러로 만들고 그래요. 무섭게

키 썸> 사극 드라마에서도 고종의 이야기는 참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어떤 드라마에서는 좀 최선을 다한 느낌이고, 어떤 드라마에선 존재감도 없던 왕이고...대체 고종은 어떤 왕이었나요?

홍경민> 나라가 망하긴 망했지만 우리가 인정해줄 건 인정해 줘야하지 않겠어요? 미국 워싱턴DC를 모델로해서 도시개조사업도 벌이고 도쿄보다 3년이나 앞서서 전차도 개통했었다는데...주위 나라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노력은 한 것 같아요!

키 썸> 저는 고종 황제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사실 고종이라고 하면 떠오르는게 커피거든요. 나라가 망해가는 가운데 커피 마실 여유는 있었나? 라는 생각이 가끔 들긴 해요.

홍경민> 에이 여유 있게 커피를 마셨겠어요? 딱 커피를 마시면 양옆으로 일본 사람들도 있고 러시아 사람들도 있었을텐데... 커피를 마시면서 이제 고종이랑 순종이 뭔가를 주고받지 않았을까?

박영진> 아버님~오늘은 일본 사람이 한 명 더 는 것 같네요.

홍경민> 그러게나 말이다...쟤는 내가 화장실 가도 쫓아오더라...

박영진> 저는 화장실 갈 때 두 명이 따라 붙습니다.

홍경민> 아니 뭬야?그나저나 이 코피는 입맛에 맞느냐.

박영진> 좀 쓰긴한데, 요즘 워낙 인생이 씁쓸하다보니...마실만 합니다...뭐 이런식으로? 약간 그 일본인들 욕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겠어요??

다니엘> 저는 경복궁 도서관을 구경하면서 고종을 알게 됐는데 당시 고종은 책 4만 권을 모아서 나라를 살리기 위해 공부도 많이 했고 나라를 강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더라고요. 일본 러시아가 싸울 때 두 나라가 다 망하게 하려고 머리도 많이 쓴 왕이던데...제가 생각하기에 고종은 100% 나라를 강하게 하려고 노력했고 금장식도 그러한 노력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박영진> 그런데 어쨌든간에 나라가 망했잖아요. 사실 회사가 부도가 났으면 사장이 책임을 져야죠. 광복을 위해 뒤에서 애를 많이 쓰셨다고 하지만 나라가 망하게 했던 것에 대한 책임을 피하긴 어려운 것 같아요

이기환> 사실 금책이든 금지팡이든...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뭔가를 만들면 뭐하나 싶어요. 나라가 망해버렸으니 말이죠. 그리고 사실 한일합병 후 고종과 순종은 당구를 매일 치고 담배를 즐겨피우고 일반 배우를 불러서 가무와 연극 관람을 하거나 정원에서 스모를 보기도 했다고 하거든요. 뭔가 할수 없다보니 답답해서 잠시 긴장을 잃었던 건가 싶기도...

홍경민> 아버지가 금책에 부탁한 내용을 꼭 지키고자 다짐하잖아요. 사실 우리 아버지가 다 망해가는 회사를 나에게 물려줬는데 아무리 사장이라도 좋을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순종은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참 각별했던 것 같아요. 고종과 순종 사이는 어땠는지 궁금해요!

서경석> 순종이 마지막에 목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그랬지만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많이 따랐다고 해요. 고종이 군밤을 엄청 좋아했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순종이 어릴 때 창덕궁 정원에서 직접 밤을 따서 군밤을 구워가지고 아버지 고종에게 자주 가져다 줬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고종에게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으면 순종이 구워온 군밤이라도 말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박영진> 힘드니까 서로 의지하지 않았을까요? 고종과 순종이 같이 커피나 식혜도 자주 마셨다고 들었거든요! 어찌보면 비슷한 처지니까...같이 상의도 많이 했을 것 같아요.

강아랑> 그런데 그러다가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두 사람이 먹는 커피에 아편을 잔뜩 넣은 거예요. 그 커피를 고종은 맛이 이상한 것 같다고 바로 뱉어냈는데 순종은 그러지 못하고 마시다가, 몸이 많이 아프고 약해졌다고 하더라구요.

이기환> 고종이 전화기를 참 좋아했거든요. 궁궐에도 전화를 놓고 신하에게 명령을 내릴 때도 전화로 했다고 해요. 이후 왕위에 오른 순종은 가장 먼저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곳까지 전화를 놓게 하거든요. 그 이유는 고종이 죽고 장례도 제대로 못 치르게 되니까 답답한 마음에 순종은 무덤에 전화를 걸어 곡을 했던거죠.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던 전화를 통해 애도했던 것입니다.

MC 한상헌> 오늘 가장 눈에 띄었던 단어가 ‘탁부실대’ 였잖아요. 부탁함이 실로 크다,인데 보통 우리가 진짜 진심으로 부탁을 할 때 다양한 표현을 하잖아요? 우리 패널분들은 어떠세요?

박영진> 사실 제가 부탁하는 모습을 가장 많이 보는 곳이 이 천상의 컬렉션이거든요. 특히 우리 서경석 선배님을 통해 부탁하는 모습을 하나 배우는데, 대놓고 부탁! 버튼을 눌러달라는 부탁을 대놓고 하시는 걸 볼 때! 참 간절하고, 진심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대놓고 부탁해볼 작정입니다.

홍경민> 사실 나라 상황이 말이 아니다보니, 여기저기 부탁할 일이 참 많았을 것 같아요. 고종 입장에서. 사실 주말에는 되도록 제가 아이들과 놀아주려고 하는데 스케쥴이 잡힐 때가 있거든요. 그럼 와이프랑 딸에게 부탁을 하죠. 제 부탁방법은 되도록 눈을 안 마주치면서 응 다녀올게~하면서 스윽-사라지기?

키 썸> 전 SNS로 부탁을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간절히 부탁하고 싶을 땐 별별 이모티콘을 이용해서 부탁해요. 손바닥 빌거나 눈물 흘리거나 바짓가랑이를 붙들거나 하는 다양한 모습의 이모티콘을 보내면서 부탁해요!

다니엘> 저는 저희 엄마도 부탁을 잘 들어주고 저도 부탁을 잘 들어주는 편이에요. 거절을 못하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방송을 하다 보니까 평소에 연락도 안하고 별로 친하지 않던 사람들이 갑자기 부탁을 할 때가 있더라고요. 그럴 땐 거짓말을 하면서 거절하게 돼요.

강아랑> 저는 뭔가 부탁을 할 때 직접 얼굴을 대면하고 말을 하기 보다는 진심어린 글로 쓰면 상대방이 더 마음을 잘 알아줄 것 같아서 손편지를 쓰는 경우가 많아요. 글로 남기면 그 당시의 진심이 담긴 글을 간직할 수 있고, 그걸 나중에 꺼내보면서 아 이랬구나 느낄 수 있는 부분도 있거든요.

박영진> 순종에 대해서 들리는 소문 중에는 순종이 좀 바보였다는 이야기도 있었잖아요? 그래도 한 나라의 왕인데 바보라니! 좀 속상하기도 한데...어디까지가 사실인지 궁금하더라고요

홍경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능적으로 부족한 사람에게 어떻게 한 나라를 맡기겠어요. 아까 말했듯이 아편을 많이 먹게 되면서 몸이 약하다보니까 사람들이 오해했던 것 아닐까? 아니면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악의적으로 소문을 낸 게 아닌가 의심스럽네.

다니엘> 순종이 어린 시절에 소꿉친구가 예거후버라는 독일인이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랑 귀한 비석 위를 뛰어넘으며 놀다가 다른 신하들이 예거후버를 야단쳤대요. 그때 순종이 얘는 내 친구니까 괜찮다 라고 하며 말렸다고 하는데, 당시 예거 후버의 어머니 기억으론 의젓한 황태자의 모습이었고 조선이 큰 나라구나 라는 이미지를 남겼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전 순종이 바보가 아니라 정말 배려있고 생각도 깊은데 나라 상황이 너무 힘들고 본인도 워낙 약하다보니까 혼자 어쩔 수 없던 것 같아요.

키 썸> 그리고 아까 말씀하셨지만 한일합병조약 때 도장을 안 찍으려고 애도 썼다면서요. 일본인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괴롭히려고 하니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허수아비 노릇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너무 마음 아파요.

이기환> 사실 그래서 순종이 더욱 공기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거든요. 한일합병조약에 날인 문제랄지, 마지막 유언이랄지 진위여부를 놓고 의견들이 많은데, 아무리 무능한 군주라도 그 정도의 의식은 있어야 그래도 우리네 자존심은 지킬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정도도 안했다면 너무 우리 민족이 비참하니까요.

MC 한상헌> 화려함 뒤에 망국의 한이 새겨진
<순종 황태자 금책>,
근현대사의 아픔을 온 몸에 지닌 채 다시
어렵게 고국으로 돌아왔는데요,
서경석 씨의 최후 한마디를 들어보시죠.

서경석> 이번 공부를 통해 순종 황태자 ‘금책’은
단지 화려함만을 위해 ‘금’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 전처럼 대나무나 옥으로 만들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영원불멸의 상징 ‘금’, 참 귀한 금속이에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제게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의 소-중한 한 표!
감사합니다.


MC 한상헌> 서경석 씨의 <고종금책>
최후 한마디까지 잘 들었습니다.
여러분, 서경석 씨께 다시 한 번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서경석 씨 이제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자, 그럼 다음은 어떤 호스트가
어떤 보물을 소개해 줄까요.
지금 바로 만나보겠습니다.


2. 방은진 <나혜석 자화상>
방은진> 100년 전,
전대미문, 미술계의 아이돌이 나타납니다.
명민한 두뇌에 장래가 촉망되는 재원이라며
신문 기사가 여러 번 나올 정도였죠.

조선 최초! 서울에서 서양화 전시회를 열어요.
하루 만에 5천명이 찾고,
그림을 서로 사려고 난리였다죠.
연일 초대박 전시회였습니다.

근대 조선의 루키였던 이 사람,
누굴까요? 궁금하시죠?


도쿄여자미술학교의 첫 번째 조선인 유학생,
근대 최초의 전업 화가,
심지어 최초로 개인전을 연 여성,
수많은 ‘여성 최초’ 타이틀을 거머쥔,
나혜석입니다!

그리고 오늘 제가 소개할 보물은?
바로, 화가 나혜석의 자화상인데요.

음, 어떠세요?
조금 전 사진 속 나혜석과 닮았나요?
네, 비슷하다고 하기는 좀 어렵죠.
여성의 자화상인데 남성스럽기도 하고요.
서양인처럼 선 굵은 모습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동양인처럼 보이기도 해요.
모호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은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근대 조선에서 그려진
최초의 여성 자화상이기 때문이죠.
여러분, 이 그림이 그려진 때는 1928년 즈음입니다.
당시 여성이 당당히 한 사람으로서 주체가 되고,
그런 자신의 얼굴을 표현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획기적인 일이었어요.

그렇다면 왜 나혜석은 당시 어떤 여자들도 시도하지 않았던 자화상을 그렸을까요?

나혜석은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도쿄에 있는 여자미술학교로 유학까지 갔죠.
그 때는 남자들도 일본 유학을 가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거든요.

미술학교에서도 그녀는 남다른 선택을 합니다.
당시 여학생들은 대부분 재봉, 자수
이런 분야들을 배웠어요.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집에서 하던 일들을
주로 공부했죠.
그런데 나혜석은
여성 조선 유학생 사상 최초로!
서양화 전공을 택합니다.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는 이런 딸이 좀 못마땅하셨나 봐요.

여자애가 이만큼 공부했으면,
이제는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시부모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며 살아라! 이거죠.

당장 결혼하라면서 집으로 불러들입니다.
나혜석이 순순히 돌아갔을까요?
아니오.

“아버지, 지금은 여자도 사내처럼 돈도 벌 수 있고, 벼슬도 할 수 있는 세상이에요.”
야무지죠.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와서, 스스로 학비를 벌고,
졸업까지 해냅니다.
여성들이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하고,
학교를 나와도 취업하는 일은 드물던 그 시절,
나혜석은 당당히 자립을 선언한 겁니다.

그렇게 본인 뜻대로 유학을 마치고서야 결혼한 나혜석,
화가로 승승장구합니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선
출품할 때마다 수상하고요,
일본의 미술전에서도 상을 받아요.
당시 신문들과 미술계 역시
나혜석을 칭찬하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 활동이 마냥
자유롭고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어요.
여러분, 결혼한 직업여성의 최대 고민이 뭔가요?

맞습니다. 나혜석은 결혼식을 올린 지 9개월 만에
임신을 하고, 엄마가 됩니다.

갓난아이를 두고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었을까요?
붓을 들면, 아기가 때마침 빽빽 울죠.
그럼 그리던 것을 집어 내던지고 달려갔을 거예요.
아이만 보나요.
세 끼 밥을 짓고, 바느질을 하고,
가사노동은 끝이 없었습니다.

나혜석은 이런 고충을 작품으로도 표현했어요.
이 판화를 같이 한 번 볼까요?
‘부글부글 이것을 두고 시를 지어’ 라고 써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저기 있는 냄비를 보니,
밥을 지으며 시를 쓴다는 것 같네요.
살림을 하면서 틈틈이 자신의 일을 하는
여성의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꼭 지금 워킹맘들의 하루를 그려낸 것 같지 않나요?

나혜석은 그렇게 바쁘고 힘들어도
그림을 계속, 잘, 그리고 싶어 했습니다.
외교관인 남편과 함께 파리에 머물렀을 때는,
화실까지 다니면서 그림 공부를 했어요.
예술의 중심지 프랑스에서 야수파, 입체파, 표현주의...
최신 미술을 접하고 배웁니다.
의지가 정말 대단하죠.

그리고 그녀는 자신 뿐 아니라 조선 여성들이 모두
자기 꿈, 자기 일을 갖고 살길 바랐습니다.
나혜석은 끊임없이 이야기했어요.
“꼭 현모양처로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남자의 부속물로 사는 겁니다.
여자도 자기의 실력을 키우고 개성을 발휘해야 해요.”

지금은 뭐, 놀랄 것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머리에 상투를 튼 어르신들에게
이런 주장은 너무나 급진적인 것이었어요.
여기에 남성 지식인들, 그리고 여성들까지
그녀를 비판하고 비난했죠.

당시 가장 앞선 생각을 하던 나혜석.
그러나 그런 그녀가 살아야 할 곳은
여전히 유교가 지배하는 조선 땅이라는 것,
이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자, 다시 자화상을 한 번 볼까요.
머리는 단발인데 얼굴선이 굵어서 중성적으로 보이죠.
여잔 것 같은데 남자 같기도 하고,
동양인 같으면서 서양인 같기도 한 모습.
저는 여기서 그녀의 혼란스러운 마음이 읽힙니다.

남자들처럼 집안일에 얽매이는 것 없이 일하고 싶지만
나는 여성이고,
프랑스에서처럼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싶지만
내가 있는 곳은 조선이죠.
안타깝고 간절한 마음이 느껴져요.

하지만 화가 나혜석으로 살고 싶었던 그녀의 꿈은
이혼이라는 사건을 겪으며 끝내 스러지고 맙니다.
보수적인 남성들과 거침없이 토론하고
논쟁하기를 주저하지 않던 여성이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자,
세상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비난하고 나섰죠.

나혜석을 찬양하던 신문들은
불미스러운 작품이니
줬던 상도 뺏어야 한다며, 돌변했고요.
한 때 5천명이 넘게 찾아들던 전시회는
아무도 찾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렇게 철저하게 냉대 받던 나혜석은,
병든 몸으로 이 곳 저 곳을 떠돌다가,
마침내 홀로 숨을 거둡니다.
관보는 그녀의 죽음을 이렇게 알립니다.
‘행려병자로 사망’.

나혜석은 평생 300점 가까이 그림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작품이 홀로 떠돌아다니는 동안
불에 타거나, 한국전쟁 중에 사라져 버렸어요.
그러나 그녀의 자화상만은 남아
우리에게 지금도 유효한 질문을 계속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욕심을 내지 않으면
우리의 역사를 무엇으로 꾸밀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이 사회에서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세상을 향해 뛰는 가슴을 가지고
불꽃처럼 살면서 시대를 앞서갔던 나혜석이
이 땅의 여성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나혜석의 자화상이었습니다.

MC 한상헌> 나혜석의 자화상을 처음 봤을 땐 세상 풍파를
다 짊어진 듯 우울한 모습이라 생각했는데,
숨은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말 다르게 보입니다.
여러분들 어떻게 보셨나요?

홍경민> 이게 1928년에 조선 사람이 그렸다는 거잖아.
물론 유럽에서야 피카소 같은 화가들이 활약하던 시기지만. 구도나 붓질도 거침없고.

박영진> 유관순 누나 같은 분이 먼저 나오고 자화상 딱! 나오는데 충격적. 너무 다른 느낌인거야

키썸> 저는 되게 세련된 느낌을 받았는데. 그런데 정말 중성적 느낌 아냐? 첫 느낌은 남자인줄 알았다.

강아랑> 주변에 여자분들 결혼하고 나면 생각 많아지던데, 전업주부된 분은 사회활동하는 분을 부러워하고. 워킹맘들은 미혼 전문직들 부러워하고. 뭔가 그런 복잡한 생각이 많은것처럼 보여.

다니엘> 조선 근대 여성화가의 자화상은 이거 하나만 있다며? 그거 알고 봐서 그런지 자아 강한 여성이었을 것 같다.

키썸> 그런데 자화상 속 나혜석 단발. 방은진 감독님도 단발이다?

방은진> 마침 시기 맞았어. 나혜석 호스트가 될 운명이었던가! 일제강점기 단발머리는 신여성 상징. 나혜석이 살던 시절엔 단발머리 여성이 지나가면 구경꾼이 몰려들고 해괴하다고 놀랬다지. 그리 먼 과거도 아닌데 당시엔 단발을 가지고 신문에서 찬반 토론을 할 정도였다. 가리고 숨기는 전통에 반발하면서 매력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신여성들의 상징 아닐까.

홍경민> 신체발부수지부모의 나라였으니... 남성들도 단발령 땐 난리였잖아. 어쨌든 머리를 자른다는 건 당시 조선사회에선 충격이었을듯

강아랑> 나혜석이 단발머리 했을 때도 신문에도 실렸다고 한다.
나혜석 여사 단발하다! 라고.

박영진> 지금은 미대 가면 여학생들 많잖아. 그런데 당시엔
나혜석처럼 서양화 공부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나봐?

이기환> 일본 유학 가는 여학생들은 좀 있었는데 상당수는 수예라든가 자수 같은 전공으로 일본 유학을 많이 갔어. 그게 학교 선생으로 취업이 용이해서 배운 여성들이 자립을 위해 많이 선택. 그런데 나혜석은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이라며 일부러 서양화 전공하고 전업화가의 길을 간다

다니엘> 20세기 초반 유럽 역시 전업 여성 화가 찾기는 어려웠다. 나혜석 보니 “마리 로랑생”이 생각난다. 피카소나 앙리루소 등과 어울리며 입체파의 소녀, 몽마르트의 뮤즈로 불릴 정도였다. 당시 유럽에서조차 여성이 전업 화가를 하는 것 역시 힘들었다. 그래서 마리 로랑생 역시 명사들의 초상화를 그리거나, 공연 무대 디자인, 잡지 상표 디자인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했다고 한다.

키썸> 역시 그림 하나로는 힘드니까 투잡 쓰리잡...해야했군요

강아랑> 나혜석은 최초의 여류화가이기도 하지만 남녀 통틀어 최초의 전업화가라는 거 기억해야한다. 서양화 배우던 다른 남자들은 다른 직종으로 이동. 또 나혜석은 화가로서도 남자 화가를 압도했다는 기사가 실렸지. 당시 시대적 분위기 생각했을 땐 정말 대단하다.

홍경민> 일제시대 때 그정도로 잘 살았으면 친일 논란에서 벗어
나기 힘들텐데, 나혜석이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고?

방은진> 맞아. 3.1운동 때도 5개월간 감옥살이했어. 그때 나혜석의 나이는 23살. 남편 김우영이 만주에 발령 났을 땐 일본 몰래 현지에서 독립운동도 지원. 조선총독부에서도 나혜석이 정치적으로 이용할 가치가 높다고 생각했는지 엄청 회유했는데 단칼에 거절. 창씨개명, 신사참배도 거절. 그런데 나혜석의 이런 점은 그동안 많이 부각되지 않았어.

키썸> 아 예전에 방송에서 봤는데, 나문희 선생님의 고모할머니가 오늘 주인공 나혜석이었대.

박영진> 어 정말? 대단하다.. 영화계에서 미술계에서 큰 획을 긋는 나씨 집안이네!


MC 한상헌> 신문에 소개될 정도로 뛰어난 여학생이 결혼 이후
사회활동을 하기 힘들어서 그 꿈을 접었다는 이야기,
오늘 날에도 그리 낯선 이야기가 아닌데요.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결혼은 안하려고 했다는 나혜석 이야기 인상적이었습니다.

방은진> 나혜석이 결혼 압박을 받던 시기에 쓴 자전적 소설
“경희”에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좋은 곳에 시집가서 배불리 먹으면 좋지 않냐는 아버지에게 “먹고만 살다 죽으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금수지요. 보리밥이라도 제 노력으로 제 밥 먹고 사는 것이 사람인줄 압니다” 라고 하죠. 나혜석은 결혼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자립하는 길에 대해 계속 고민합니다.

홍경민> 내가 부잣집에 태어나서 그림 그렸다면, 그냥 평온하게 예술활동 하면서 지냈을 것 같은데. 안주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게 대단해.
사회적 파장 일으키는 메시지 많이 던졌잖아?

키썸> 힙합도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는 음악. 나혜석은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것 같다. 여성도 사람이다! 지금 세상에 태어나셨으면 래퍼 하셨어야해.

강아랑> 사이다발언 제조기 나혜석! 요즘 나혜석 같은 말을 하면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엄청 난리였을 것. 나혜석의 발언들은 지금 봐도 사이다 같은 시원함이 있어!

이기환> 당시엔 공격받을만했지만 지금 남자의 시각에서 생각하면 나혜석 주장들이 너무 과격하기만 한건 아니다. 동거 후 결혼 하는 게 어떨까 하는 거라든지, 이혼 할 때 재산 반반 나누자는 이야기. 일리 있는 이야기들 있어.

키썸> 이혼 할 때 재산 분할이 당시엔 과격한 발언인가요??
지금은 당연한 건데.

박영진> 당시엔 이혼도 거의 안했을 때잖아. 재산분할이라니 어디 상상했겠어? 어디 여자가!! 이런 생각들이었겠지.

강아랑> 이젠 당연한 이야긴데 그땐 그랬나봐. 나혜석의 판화 보면 당시에도 며느리가 명절증후군 걱정하더라. 세상이 많이 바뀐듯하면서도 그대로인 것같아.

홍경민> 아 그래 우리 할머니들도 명절증후군 힘들어했구나.

다니엘> 유럽의 여성 참정 운동도 생각해보면 그리 오래 되지 않았어. 하지만 당시 사람들의 공격과 무시를 받으면서도 신념을 지키려는 투사들 덕분에 이뤄낸 것. 나혜석도 그 길을 걸어간 것이라고 생각해.

박영진> 지금도 세상 좀 바뀌고 있지 않나. 시작은 힘들지만, 누군가 물꼬를 트면 세상을 바꾸는데 일조. 지금 일어나고 있는 미투운동도 그러하고.

MC 한상헌> 나혜석의 발언들은 당대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선진적인 생각이었고, 그림으로서의 성과도 엄청났는데. 말년은 행려병자로 길거리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마음 아프다.

방은진> 이혼 이후 나혜석은 재기를 위해 준비 많이 했지만, 번번히 실패합니다. 여성미술학교를 열었지만 잘 되지 않았고, 화실에 불이 나서 작품도 불타 사라지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수전증까지 오면서 작품활동도 어려워지고 결국은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말년은 쓸쓸함 그 자체였죠.

키썸> 생전 대단한 일들을 이뤘는데 결국 이혼 때문에 모든 것이 다 무너진 거? 당시 남성들은 이혼했다고 그렇게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거나 하지 않았다며. 왜 여자만?

강아랑> 화려하고 장래가 촉망되었던 여학생이라고 기사도 그렇게 났는데. 마지막이 너무 슬프다...

이기환> 결국 나혜석은 스캔들로 이혼하면서 당시 이혼고백서 발표한거 파장이 컸어. 조선 남성이란 참으로 이상하다. 남자들은 몇집 살림을 하면서 여자한테는 정조를 지키라고 하냐. 여자도 사람이다! 라면서 비판해.

키썸> 완전 사이다네요!

홍경민> 가족들 입장에선 참 난처했겠다. 뻔히 나혜석의 가족이 누군지 알고 남편이 누군지 아는데. 저렇게 쓰면 직접적으로 가족을 언급하는 거잖아. 가십으로 오르내리게 되는 거.

박영진> 연예인들 방송에서 가족 이야기 안하려는 이유도 그런데... 유명인이 함께 산다는 이유로 희생 너무 컸겠다

방은진> 그런데 나혜석 자화상 본래 아들이었던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가 소장하고 있었던 그림이야. 그런데 돌아가시기 전 기증하신 것. 나혜석 자화상과 같은 시기 그려진 미완성작 ‘김우영 초상’도 기부. 아마 생전엔 그토록 원망했던 어머니였지만 나중엔 이해하고 용서했던 게 아닐까 싶다.

이기환> 나혜석의 첫째 딸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 화가나 작가로 빼어난 재능을 가진 어머니가 그렇게 힘든 삶을 살다 갔다는 것은 당대의 큰 손실이다-라고 덧붙였다고. 나혜석이 좀 더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어땠을지...

MC 한상헌> 일제강점기에 불꽃같은 삶을 살며
새로운 화두를 던진 신여성, 나혜석을
만나본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방은진 감독님의 <나혜석 자화상>,
최후의 한마디 들어보겠습니다!

방은진> 여러분, 오늘이 마침 나혜석이 태어난 지
122주년이 되는 날 입니다.
이렇게 그녀의 인생을 돌아보니,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성들이 하고 있는 고민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며 시대를
앞서갔던 나혜석.
그녀는 우리 곁에 한 폭의 그림으로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MC 한상헌> 방은진 씨의 <나혜석 자화상>
최후 한마디까지 잘 들었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자, 그럼 이제 오늘의 마지막 무대를 장식해줄
보물만이 남았는데요.
어떤 보물인지, 바로 만나보시죠!

3. 안내상 <김구 시계>
안내상> 1949년 6월 26일.
그날은 햇살이 유난히 눈부신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서울 한복판에 네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손님으로 가장한 암살범이었습니다.
그가 당긴 방아쇠는
남자의 얼굴과 목, 가슴, 그리고 아랫배를
차례로 관통했습니다.
남자는? 과다 출혈로 그 자리에서 즉사했죠.

이것은 미국의 한 사진기자가
남자가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방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창문에 새겨진 날카로운 총알 자국..
그 너머로..
남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엎드려 통곡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담겨 있죠.
그의 죽음에 나라 전체가
깊은 슬픔과 통곡 속에 휩싸였습니다.

네.. 그날, 비극적인 총성이 앗아간 생명은
우리 민족의 큰 어른, ‘백범 김구’였습니다.
일생을 조국 광복과 독립에 바친
위대한 민족지도자의 최후는 이토록 허망했습니다.

조선왕조 500년부터 망국,
식민시대 그리고 해방에 이르기까지
‘가장 평민다웠던 평민’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백범 김구 선생을 꼽겠습니다.

백범 김구 할 때, ‘백범’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평범한 보통 사람.
백범이라는 호는 이 땅에 와서 살다 간
숱한 보통 사람들처럼
자신도 그렇게 평범한 민초로 살다 가겠다는 다짐으로
김구 선생께서 스스로 지은 겁니다.
그리고 평생..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사셨죠.

이것은 세상을 떠난 김구가 남긴 유품인데요.

김구 선생이 피살 당시 입고 있었던 피 묻은 옷가지,
편지나 붓글씨에 사용했던 인장이 전붑니다.
살아생전 얼마나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죠?

그런데 여기! 한 가지 유품이 더 있었습니다.
검소의 대명사 김구 선생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는데요.

바로 이겁니다.
딱 봐도 금빛이 반짝반짝~ 아주 비싸 보이죠?
이게 뭘까요?

여러분, 이런 시계 본 적 있으세요?

독립 운동가들의 뜨거운 삶과 활약을 그린 영화,
<밀정>에서도 이런 시계가 등장합니다.
바로 회중시계라는 건데요.
몸에 지닐 수 있게 만든 작은 시계죠.

백범 김구의 시계는 지름 4.5센티미터.
한손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습니다.
자세히 보면 월섬(Waltham)이라고 적혀 있는데요.
월섬은 1900년대 초반,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시계 브랜드 중 하납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던 조선 땅에
전해질 정도로 아주 유명했죠.

시계 줄 끝엔 네모난 장식이 하나 달려 있는데요.
하트 모양에 꽃무늬로 장식이 된 덮개를 열면,
나침반이 있습니다.
열두 방위가 한자로 표시돼 있죠.

시계가 참 멋스럽죠?
실제로 김구 선생이 남긴 유품 가운데
그. 나. 마.
유일하게 값이 좀 나가는 게
바로 이 회중시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이 시계는 김구 선생, 혼자만의 시계가 아닙니다.
김구의 시계이긴 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시계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
지금부터 87년 전, 바로 오늘!
4월 29일 아침으로
멈춰 있던 시계를
돌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윤봉길> 김구 선생님! 저 윤봉길입니다!
이번에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 히로히토 일왕의
생일 축하 파티가 열린다고 합니다!
파티에 참석하려면 도시락을 지참하라고 되어 있는데
도시락 폭탄과 물통 폭탄을 만들어주시면
제가 직접 가서 처단하겠습니다!

안내상>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마지막 길을 위해
김구는 미리 고깃국과 좋은 반찬을 준비했습니다.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도..
윤봉길은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워냈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구는
목이 메여 한 숟갈도 뜨지 못했죠.

김구> 여기.. 폭탄은 완벽하게 준비됐네.
그럼 이제 서로 시간을 정확히 맞추세.

윤봉길> 시계가.. 많이 낡았네요. 선생님.. 제 시계와 선생님의 시계를 바꾸시지요.

김구> 아니, 왜 그러는가?

윤봉길>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을 마치고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이나 주고 산 좋은 시곕니다.

김구> 그 좋은 시계를 어째서 날 주는가?
내 건 2원짜리, 아주 오래된 시계일세.
자네가 좋은 시계 차고 가시게..

윤봉길> 아닙니다. 바꿔주세요.
저한텐 좋은 시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 쓸 수 없으니까요.

이게 바로 지금으로부터 87년,
김구가 윤봉길에게 건넨 2원짜리 회중시곕니다.

SHOCK-PROOF(쇼크 프루프)라고 쓰여 있는,
철도 그림이 그려진 스위스제 시계인데요.
아까 금빛 시계와는 달리 투박하죠?
모든 물건은 주인을 닮는다더니..
김구와 꼭 닮은 시계,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거사를 앞둔 윤봉길에게..
김구는 왜 하필 ‘시계’를 사라고 했을까요?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가들은
주로 점조직으로 움직였습니다.
일본의 삼엄한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조직의 구성원끼리도
서로의 직책이나 직위를 전혀 알 수 없도록
아주 비밀스럽게 활동했죠.

목숨은 하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도 단 한 번!
그러니 매순간, 순간..
얼마나 철저하고, 치밀하게 준비했겠습니까.

분초를 정확히 따질 수 있는 이 회중시계는
독립 운동가들의 필수품이었습니다.
왜? 그들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생명시계였기 때문이죠.

자, 거사 당일을 떠올려 볼까요.
일왕의 생일잔치가 진행되는 동안
윤봉길은 이 회중시계를 손에 꼭 쥐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김구와 약속한 바로 그 시간!
시계의 바늘이 11시 50분을 가리키자
윤봉길은 회중시계를 품에 넣고,
단 일 초도 망설임 없이, 그리고 미련 없이!
물통 폭탄을 있는 힘껏 던졌습니다.

스물다섯.. 청년의 의거는 성공이었습니다.
하지만 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즉시 체포됐고,
당당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여러분, 거사 당일 윤봉길은 김구에게
이런 말을 하며 시계를 바꿨습니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 쓸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김구 선생님,
저는 이 시계를 한 시간밖에 쓸 수 없지만..
선생님은 더욱더 오래 사셔서
이 나라를 위해 끝까지 싸우셔야 합니다.’

윤봉길 의사의 당부대로
김구 선생은 1929년, 일흔네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끝까지! 싸웠습니다.

그 당시 이미 없어진 나라,
언제 독립이 될지도 모르는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친 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여러분, 김구 선생이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품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물건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뭔지 아십니까?
네, 바로 윤봉길 의사와 맞바꾼 회중시곕니다.

윤봉길 의사가 갖고 있었다면..
한 시간밖에 쓸 수 없었던 이 시계를
김구 선생은 무려 18년 동안이나 사용했습니다.

김구 선생이 평생 이 시계를 품고 있었던 건
청년 윤봉길의 희생을 잊지 않고,
그를 기리며 살았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저는 오늘 백범 김구의 시계이면서
동시에 윤봉길 의사의 시계이기도 한
회중시계를 보면서
그들이 바꿔 놓은 시간이
지금도 우리에게 흐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저와 여러분 모두..
자신이 살고 싶었던 세상을 만들어 주기 위해
삶 대신 죽음을 택했던
독립 운동가들의 희생과 헌신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김구와 윤봉길.
우리 민족을 이끈 빛이자 영웅이 남긴 위대한 유산,

백범김구 회중시계 였습니다. 감사합니다.

MC 한상헌> 김구와 윤봉길의 위대한 유산! 두 사람이 맞바꾼 회중시계를 안내상 씨가 소개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윤봉길기념관에서 이 두 개의 시계를 흔쾌히 대여해주셨다고 들었는데요. 맞나요?

안내상> 네, 이 자리를 빌려서 윤봉길기념관에 다시 한 번 감사하단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덕분에 아주 영광스러운 보물을 소개할 수 있게 돼서 기쁘고요. 현재 윤봉길 의사의 회중시계는 보물 제568-3호, 백범 김구 회중시계는 등록문화재 제441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키썸> 사실 저는 회중시계를 처음 보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토끼가 들고 있었던 게 회중시계인가?

박영진> 그래! 맞아! 조끼 입은 토끼가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보면서 바쁘다 바빠~ 이러고 막 뛰어가고, 그 토끼 때문에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 떨어지게 되지.

다니엘> 그런데 그거 알아? 최초의 회중시계가 독일이라는 거? 16세기 독닐 뉘른베르크의 기술자였던 페터 헨라인에 의해 만들어져 ‘뉘른베르크의 달걀’이라고 불리며 유럽에서 명성을 얻었어. 하지만 회중시계에 들어가는 부품은 매우 작아 제작이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가격이 비싸 대체로 상류층의 지위를 상징하는 물건이었지. 그래서 원래는 목걸이처럼 걸고 다녔어.

강아랑> 맞아. 1900년대 초반에 조선에 외래 문물이 막 들어올 때, 회중시계도 같이 들어왔는데 조끼에 시곗줄을 늘어뜨리고 다니다가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보는 게 개화기 신사의 상징이었대.

홍경민> 그러다가 이게 일제 강점기로 넘어오면서 독립운동가들의 필수품이 됐고, 회중시계 갖고 다니면서 시간 확인하는 게 사회적으로 평범하지 않은 존재라는 걸 암시하는 행위가 된 듯.

박영진> 1932년 당시 6원을 주고 산 시계면 대체 가격이 어느 정도였던 거야?

안내상> 1930년 대 6원이면 쌀 반 가마, 40kg이니까 4인 가족이 두어 달을 버틸 수 있는 양입니다. 나름 비싸죠? 그래서 이 회중시계는 누구나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또 아주 비싼 시계는 아니에요. 요즘의 가치로 환산해 보면 한 20만 원 짜리의 시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키썸> 그러면 2원짜리 시계는 정말 이름도 없는 그런 시계였던 거야? 김구 선생님 너무 검소하셨던 것 같은데?

안내상> 맞습니다. 윤봉길 시계는 당시 나름 꽤 알아주는 유명한 미국의 월섬 시계였는데 김구가 윤봉길에게 건넨 시계에는 스위스제라는 것 말고는 정확히 어디에서 제작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정말 이건 김구 선생님이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아주 싼값에 산 시계가 아니었을까요?

이기환> 김구가 정말 검소의 대명사였던 게 매끼 진지도 국과 김치, 나물 등 세 가지 반찬만 올리게 했고, 옷도 한복 하나의 단벌신사, 김구가 세상을 떠난 뒤에 유품을 수습하는데 윤봉길 의사와 상해 의거 때 바뀐 회중시계와 도장 이외에는 변변한 게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MC 한상헌> 시계 얘기를 하니까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는데 Q4) 아까 연극으로 본 김구와 윤봉길이 시계를 맞바꾸는 장면 어떻게 보셨나요?

박영진> 천상의 컬렉션 명대사가 탄생했습니다. ‘실패한 역사는 잊혀야 합니까?’에서 ‘이 시계는 한 시간밖에 쓸 수 없습니다!’ 이거로요!!

안내상> 저와 연극배우 김상훈 씨가 함께 보여드린 연극은 김구 선생이 쓴 <백범일지>에 나오는 내용을 재구성한 건데요. 그 날짜가 언제였는지 기억하세요?

안내상> 네, 4월 29일입니다. 이 방송이 4월 28일에 나간다고 하는데요. 방송일 기준으로 바로 내일이 바로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가 있던 날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보신 이 한 장면을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두시고, 이들을 떠올려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강아랑> 아, 갑자기 기분이 되게 묘해진다. 사실 나는 김구가 준비한 아침 식사를 윤봉길 의사가 깨끗이 다 먹었다는 이야기에서 정말 눈물이 나더라고.

홍경민> 두 분이 연기를 잘하셔서 너무 그런지 나도 정말 울컥했어. Q6) 대체 김구는 어떤 마음으로 윤봉길의 아침 식사를 준비했을 거며.. 또 윤봉길은 어떤 심정으로 그 밥을 꾸역꾸역 다 먹었을까? 이런 생각이 계속 맴돌아..

박영진> 독립 운동이라는 게 기약이 없잖아. 누군가 희생을 하는데 그 희생이 헛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김구 입장에서는 이렇게 새파란 청년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건 아닌지, 늘 고민하고, 괴로워했을 거야.

다니엘> 윤봉길이 김구랑 시계를 맞바꿀 땐 뭔가 이 거사를 반드시 성공시키겠다는 의지와 결의가 느껴졌어. 자기는 비록 죽어도 조국의 독립을 향한 시간은 반드시 멈추지 않고 흘러가야 한다는 당부 같았어.

키썸> 나는 윤봉길이 너무 대단한 게.. 내가 지금 그때의 윤봉길과 같은 나이인데 죽는 게 뻔한 길을 간 거잖아. 그런데도 어떻게 저렇게 의연할 수 있다는 게 존경스러워.

이기환> 우리 딸을 또래의 나이라 자식 같은 윤봉길, 아마 김구도 자기 자식 같은 청년들을 보내야했으니 그 마음이 찢어졌을 것 같아. 심지어 윤봉길은 아내와 두 아들도 있었는데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시대가 참으로 슬픈 시대였다는 생각이 들어.

키썸> 그런데 나 한 가지 의문이 있어! 윤봉길 의사가 던진 게 도시락 폭탄 아냐? 안내상 선배님이 아까 물통 폭탄이라고 하셨거든!!

MC 한상헌> 지금 도시락이냐, 물통이냐, 의견이 분분한데요. 도시락 대 물통이 3대 3입니다. 100인의 현장평가단께도 한번 물어볼게요. 손을 들어서 의견을 표시해주세요. 윤봉길 의사가 던진 건 도시락 폭탄이다? 아니다? 아.. 안내상 씨, 정답은 뭐죠?

안내상> 아, 이거 헷갈려하시는 분들 정말 많으시네요.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아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윤봉길이 폭탄을 두 개를 준비했는데요. 던진 것은 물통 폭탄입니다. 그리고 도시락 폭탄은 자결용이었습니다.

강아랑> 도시락 폭탄이 자결용이었다는 건 또 새로운 사실인데?

안내상> 윤봉길 의사가 물통 폭탄을 던진 뒤, 도시락 폭탄으로 자결을 하려고 했는데 그게 불발이 돼서 일본에 잡혔다고 합니다. 저는 윤봉길이 던지지 못한 도시락 폭탄은 저격수의 마지막 무기이자, 투사의 자존심이요, 그의 목숨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인서트 : 윤봉길 의거 피해자 등)

이기환> 윤봉길의 상해 의거를 두고 중국 국민당 장제스 주석은 중국의 100만 대군이 못하는 일을 한국이 한 의사가 능히 해내니 장하다고 격찬했고, 영국의 한 언론은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암살함으로써 제1차 대전을 촉발시킨 세르비아 청년의 거사와 견줄만하다며 놀라워했어.

MC 한상헌> 청년 윤봉길은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독립을 이룰 단 한 번의 기회를 택했습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에.. 키썸이 이제 스물다섯 살이 되었다고 했는데.. 우리 패널 여러분들의 스물다섯은 어땠나요? 홍경민 씨!?

홍경민> 스물다섯은 내 인생 최고의 전성기였지.. ‘흔들린 우정’으로~~ 미안해~ 내 친구야~♪♫

박영진> 흔들린 우정으로 대한민국을 흔들었었네?

홍경민> 그러니까 그런데 나와 같은 나이에 윤봉길은 자기와 가족의 미래보다 조국을 택했으니..

박영진> 나도 스물다섯 살 땐 내 앞가림 가름하느라 바빴어. 박성광, 김준현, 오나미랑 대학로에서 공연하면서 지냈어. 돈 빼곤 용기, 패기 다 있던 시절이긴 했지.

강아랑> 나는 스물다섯 살에 KBS 기상캐스터로 입사했어. 시험을 한 60~70번을 시험을 보고 다 떨어졌는데 스물다섯 살에 5~6군데 붙으면서 정말 꿈을 이루게 된 특별한 시기였어.

키썸> 나도 유럽여행, 좋은 음악 만들기 이런 게 꿈인데 나와 가은 스물다섯 살의 청년이 폭탄을 들고 뛰어들어야 했다는 게.. 얼마나 슬픈 시대였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다니엘> 요즘 나만 아니면 돼, 나만 잘 살면 돼, 이런 말 많이 하잖아요. 유행어처럼. 하지만 윤봉길은 자기, 가족보다는 조국을 택했다는 게.. 저런 분들이 있어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 같아서 감동적이다.

이기환> 청년은 청년답게 살아야 할 토대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렇게 새파랗게 어린 청년이 조국을 위해 죽어야 했던 시대 상황이 정말 안타까워. 윤봉길이 두 아들에게 남긴 편지가 너무 슬픈데 꼭 읽어주고 싶어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 잔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는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안내상> 여러분, 사실 윤봉길이 김구에게 준 건 회중시계만이 아닙니다. 밥을 먹고 훙커우 공원으로 가는 차를 타기 전에 자기 전 재산을 다 김구에게 줘요. 자기에겐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정말 한 치의 흔들림이나 미련 없이 죽음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갔던 윤봉길 의사를 이번 시간을 통해 모두가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MC 한상헌> 우리의 오늘은 선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많은 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는 없었을지 모르죠. 자 그럼, 안내상 씨의 ‘백범 김구 회중시계’ 최후 한마디 들어보겠습니다.

안내상> 1932년 4월 29일.
회중시계를 맞바꾼 뒤,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에게 건넨 마지막 인사는
‘우리.. 지하에서 만납시다’였습니다.

두 분 아마.. 좋은 곳에서 만나셨겠죠?

독립된 세상에서 만나자던 두 분의 약속을,
87년이 지났지만.. 천상의 컬렉션에서!
시계로나마 이뤄드릴 수 있게 되어
저 역시 참으로 감격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MC 한상헌> 안내상 씨의 ‘백범 김구 회중시계‘! 최후 한마디까지 잘 들었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이제 호스트 세 분의 무대가 모두 끝났습니다.
여러분, 어떠셨나요?
즐거우셨죠?

오늘 우리가 만난 세 개의 보물을 떠올려 볼까요?
나라를 지키고자한 애절한 마음이 단긴 <고종 금책>,
여성운동의 선구자 <나혜석 자화상>,
윤봉길과 김구의 위대한 유산 <김구 시계>를
차례로 만나봤는데요.

천상의 컬렉션!
이제 아주 중요한 순서만 남았습니다.
이 주의 천상의 컬렉션을 결정할 시간인데요.

100분의 현장평가단 여러분!
이제는 마음의 결정을 내려 주셔야 합니다.

오늘 만난 세 개의 보물 중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은
단 하나의 보물의 번호를 누르고,
옆에 있는 불을 밝혀주시면 됩니다.
서경석 씨의 <고종금책>는 1번,
방은진 씨의 <나혜석 자화상>은 2번,
안내상 씨의 <김구 시계>은 3번입니다

자, 여러분, 마음의 결정! 하셨습니까?

천상의 컬렉션!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단 하나의 보물에
불을 밝혀 주세요!

네, 이제 불이 하나둘 켜지고 있는데요.
딱 하나의 보물을 선택하는 게 고민스럽겠지만
이제는 결정해주셔야 합니다.

지금 집계 중이니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리고 이미 번호를 누르신 분들은
다시 한 번 해당 번호를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자, 100인의 현장평가단의 투표가 모두 완료됐습니다.

그럼 이제 세 분의 호스트를 무대 위로 모셔볼까요?
호스트 세 분 나와주세요!

천상의 컬렉션에서 멋진 보물을 소개해 준
세 분의 호스트를 무대 위로 모셨습니다.
자, 그럼 이번 주 천상의 컬렉션에 오른
보물은 무엇인지, 바로 확인해 봐야겠죠?
100분의 현장평가단의 마음을 사로잡은 보물!
최종 결과 보여주세요!

오늘 천상의 컬렉션에는
호스트 OOO씨의 OOOO가 올랐습니다!
축하드립니다!
1등 하신 OOO 씨,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이 주의 천상의 컬렉션엔 오르진 못했지만
멋진 무대 준비해 주신, 두 분의 소감도 들어봐야죠.
OOO 씨, 어떠셨나요?

오늘 천상의 컬렉션과 함께 한
여섯 분의 패널 여러분 감사합니다.
OOO 씨는 어떠셨나요?

오늘 함께 해주신 현장평가단 여러분 감사합니다.

100분의 현장평가단의 투표로
이번 주 천상의 컬렉션에는
호스트 000의 00000가 선정되었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불을 밝혀 줄
단 하나의 보물!
단 하나의 이야기가 찾아갑니다.
지금까지 천상의 컬렉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