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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
UCI I801:1709002-001-V00003
제목 역사를 품은 치마폭, 적상산성
콘텐츠 유형 동영상 언어정보 국문
생산자 정보
생산자 정보
생산자 생산일자
한국문화재재단 2017-12-28
기여자 정보
기여자 정보
역할 정보 기여자 명
제작사 미디어하마
기술 정보
기술 정보
기술 영역 기술 내용
기타정보
내용정보 사적 제146호 무주 적상산성,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88호 적상산사고지유구
역사정보 고려시대, 조선시대
인물정보 광해군, 세종대왕, 김일성
지리정보 전라북도 무주군
관련 키워드 ;적상산성;선원각;;조선왕조실록
내용 백두대간 덕유산구간의 대표 문화유산으로 전쟁 등이 있을 때 백성들의 피신처의 역할을 수행하고 왕조실록 등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던 적상산성을 통해 안식처로서 백두대간 산의 의미를 짚어 본다.
대본 정보 역사를 품은 치마폭 적상산성

해발 1029미터 적상산 꼭대기에 있는 적상산성을 찾아가는 길이다.

산성을 한눈에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성벽은 대부분 무너지고 잔해는 흙에 묻혔다.

드디어 성벽의 흔적이다.
고려시대에 지어진 적상산성은 원래 전체 둘레 8킬로미터가 넘는 거대한 성이었지만,
지금은 폐허가 되고 서문과 북문이 있던 자리 일부만 복원되어 있다.

게다가 1995년 무주양수발전댐 건설로 산 정상부에 인공호수가 생기면서
산성부지 대부분이 물에 잠겨버리고 말았다.

무주의 고지도에는 간략한 산성의 모습이 남아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 내부는 가운데가 평탄하고 넓으며 네 개의 못과 23개의 샘과 사찰들이 있었다.

서정석 교수 인터뷰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를 대비한 산성은 적성산성처럼 높고 험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게 특징입니다.
성 안에는 물이 있고 식량이 갖춰져 있어서 유사시에는 성 안으로만 들어가면 농성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돼있었습니다.

식량을 자체 조달할 수 있는 경작지와 물, 적이 쉽게 달려들지 못할 높고 험한 위치.
적상산성은 이런 조건 덕에 대대로 인근 백성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정이환 (적상산사고 해설사)
고려 때 기록에 보면 3도의 안념사들이 난이 있을 때마다 백성들을 대피시키고
여기에 의지해서 싸우거나 생명을 보전했던 유서 깊은 산성입니다.

민초들의 피난처 적상산성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또 하나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족보를 보존하는 사고가 이곳에 설치된 것이다.

조선은 역사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 왕조였다.
그래서 왕을 중심으로 궁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 하나까지 기록으로 남겼다.
그 방대한 기록물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이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이 기록을 보관했던 사고의 역사는 참으로 다사다난했다.

세종대왕 때부터 춘추관 청주 성주 전주 등 네 곳에 사고가 안치됐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가 파괴됐다.
다시 제작된 실록은 평지를 피해 전국의 깊은 산속에 분산 보관된다.

그러다 후금과의 분쟁으로 북방이 위태로워지자 광해군은 묘향산 사고를 이곳 적상산으로 옮기게 한다.
이후 300년 가까이 이곳은 국가의 역사를 보관하는 성소였다.

안국사는 사고의 수호사찰이었다.
수몰을 피해 호수 가장자리로 옮겨온 안국사에 유일하게 남은 사고의 흔적이 있다.
천불전 건물이 바로 사고지의 선원각을 옮겨온 것이다.

국난이 있을 때마다 목숨 걸고 사고를 지킨 건 승병들이었다.

병자호란 때 청군이 쳐들어오자 승병들은 비밀리에 실록을 옮긴다.
장소는 성벽 끝 낭떠러지 안념대의 바위 틈. 사람이 발을 딛기도 힘든 공간이었다.

(석실비장/ 사고를 지켜낸 공을 치하하여 승정원에서 내린 현액)

덕분에 실록은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지켜낸 실록들은 지금 이곳에 없다.

적상산 사고에 보관되고 있던 실록은 육이오때 김일성에 의해서 북한으로
반출돼서 지금 현재는 김일성종합대학에 있습니다.

오랜 세월 복잡한 인간사를 묵묵히 지켜봐왔던 산성.
적상산 붉은치마는 여전히 넉넉한 품으로 역사를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