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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I I801:1709002-001-V00013
제목 백두대간 문화유산 1부
콘텐츠 유형 동영상 언어정보 국문
생산자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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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자 생산일자
한국문화재재단 2017-12-31
기여자 정보
기여자 정보
역할 정보 기여자 명
제작사 미디어하마
기술 정보
기술 정보
기술 영역 기술 내용
기타정보 백두대간
내용정보 국보 제35호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전라남도 시도기념물 제138호 구례장죽전녹차시배지, 국가무형문화재 제130호 제다, 사적 제146호 무주 적상산성,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88호 적상산사고지유구, 사적 제417호 괴산 송시열 유적, 명승 제32호 문경새재, 사적 제147호 문경 조령 관문, 국가무형문화재 제105호 사기장
역사정보 삼국시대, 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
인물정보 백제성왕, 연기조사, 대렴, 세종대왕, 광해군, 세조, 단종, 우암 송시열, 효종, 현종, 태조 이성계, 신립장군, 김비안, 김정옥
지리정보 전라남도 구례군,전라북도 무주군,경상북도 성주군,충청북도 괴산군,경상북도 문경시
관련 키워드 ;백두대간;화엄사;제다;적상산성;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안국사;화양구곡;송시열;문경새재;사기장;
내용 백두대간의 의미와 역사를 알아보고, 백두대간 남쪽구간 지리산에서 문경새재까지 백두대간을 따라가면서 그 속에서 만나는 대표적인 문화유산들인 담긴 숨은 가치를 재발견한다.

대본 정보 먼 옛날 천지간에 백두산이 우뚝 솟아오르고, 그 기운을 이어받아 모든 산들이 줄지어 일어섰다.

물은 산을 타고 내려와 바다로 흘러들었다.
한반도는 백두대간의 땅이다.

백두대간 문화유산1부

우리나라는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으로 채워져 있다.

조선시대 지리서인 산경표에는 백두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이 땅의 산줄기를 1대간 1정간 13 정맥으로 구분했다.

그중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척추를 이루는 가장 크고 긴 중심 산줄기다.
그리고 이 땅에 기대 사는 우리네 삶과 문화의 근원이기도 하다.

짙은 구름을 발아래 거느린 이곳은 해발고도 1915미터 지리산 천왕봉. 남쪽에서부터 북쪽을 향해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지리산은 백두대간의 끝이 아니라 시작점이다.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 두류산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백두산이 흘러내려서 된 산이라는 뜻입니다.
백두대간의 시작이자 마지막이 되는 곳입니다 이곳이.

우리 삶의 근원이자 이 땅 문화의 깊은 뿌리. 백두대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이 시작된다.

남도의 젖줄 섬진강은 남해로 빠지기 전 전라남도 구례에서 지리산을 만난다.
지리산 중턱에 자리한 구례 화엄사.

백제성왕 22년, 544년에 인도에서 온 연기스님에 의해 창건된 천년사찰.
화엄사상의 근본도량으로 알려진 곳이다.

화엄사 경내 효대라는 언덕에는 특이한 석물들이 있다.
바로 국보 제35호 사사자삼층석탑.

네 마리의 사자가 중앙의 인물상을 비호하는 독특한 형태의 석탑이다.

한편 석탑 앞 석등에는 탑을 향해 꿇어앉아 차를 올리는 인물상이 배치되어 있다.
이는 효심 깊은 연기스님이, 어머니를 위해 차를 공양하는 모습이라는 것.

이곳 지리산과 차의 깊은 내력을 알 수 있다.

화엄사를 창건할 당시 연기조사가 인도에서 차 씨앗을 가져와 심으면서,
이 땅에 차나무가 자라게 되었으며, 한편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차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녹차의 시배지가 바로 이곳 지리산 기슭, 장죽전이다.

신라시대에 시작된 차 재배는 불교문화와 함께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전국 녹차생산의 25%를 차지하는 지리산 자락.
특히 야생차가 자라는 최적의 환경조건을 갖추고 있다.

김종원 (계명대 생물확과 교수) /
지리산은 한반도에서 가장 강수량이 풍부하고 연중 안개일수도 높고
가뭄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 차나무가 자랄 수 있는 최고의 분포중심지입니다.

화엄사의 산내암자인 구층암, 경내의 수행자들을 위한 차를 만들고 있다.

찻잎 따는 손길이 분주한 구층암의 덕제스님.
양력 4월 20일경, 곡우를 전후로 나는 보드라운 햇잎이제일 품질이 좋다보니,
찻잎 따는 손길도 분주해 진다.

졸음을 쫓고 정신을 맑게 해주는 차의 효능 덕분에 불가에서는
오랫동안 차가 사랑받아 왔고, 이 땅의 차 문화 역시 불교를 통해 이어졌다.

덕제스님 (화엄사 구층암) /
차나무는 뿌리가 이렇게 쪽 아래로 내려가서 땅의 기운을 먹고 자랍니다.
그래서 차를 마시면 차분해지고 곧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고유의 차 제조법이라 불리는 제다(製茶)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30호에 지정되어 있다.

한반도 남부 지방에 차 산지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고,
이를 중심으로 다양한 방식과 형태의 차제조법이 공유, 전승 되어왔다.

그리하여 일찍이 차 문화가 발달된 중국이나 일본과는
구별되어 이어진 우리의 전통문화로 제다가 자리 잡았다.

달궈진 가마솥에서뜨거운 물로 차를 볶아 수분을 빼는 이른바 ‘차를 덖는 과정’
덖기를 마친 찻잎을 식힌 후 일일이 손으로 비벼준다.

찻잎의 모양을 바로잡고, 차가 물에 잘 우러나게 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자연의 시간이 만들어낸다.

지리산 야생차로 차를 덖는 덕제스님은

오랜 세월 차와 함께 하면서, 그만의 다양한 제다법을 익혔다.
맛과 향을 따라, 생녹차를 만드는 가하면,
최근에는 시간을 두고 묵히는 발효차도 빚어낸다.

덕제스님 (화엄사 구층암) /
제작년에 만들어진 건데요, 처음에 만들면 녹색을 갖고 있지만 지금은 발효가 돼서
색깔이 좀 변하고 있는 과정이예요.

다선일미(茶禪一味)
불가에서 차와 선은 한가지 맛이라는 뜻.

차관에 물을 끓여 차를 우려내고 또 기다려 맛을 음미하는 과정은
수행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불가의 궁극적인 지향점과 다르지 않다.

차를 다루어온 다승(茶僧)덕제스님.
그에게 있어 제다는 한편 ‘수행’이다.

덕제스님 (화엄사 구층암) /

차는 어떻게 만드느냐가 아니라 차 자체가 우리몸을 이롭게 하고 정화시켜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차분하고 하고 안정시키고 몸속 기름기를 분해주는 성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차를 한마디로 한다면 우리 몸을 균형잡게 해주는 약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덕제 스님은 정성껏 빚어 내린 차를 부처님 전에 올리며,
그의 정성과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

지극한 정성과 오랜 달임의 시간이 만들어낸 맑고 그윽한 향기가
지리산 자락, 산야를 적신다

백두대간은 지리산 능선을 타고 남원 함양을 넘어 덕유산에 이른다.

소백산맥 중앙에 우뚝 솟아있는 덕유산은 능선을 따라 두문산 칠봉 삿갓봉등을 거느리고 있다.
그 중 향적봉 북쪽으로 10킬로미터쯤에 무주 적상산이 있다.

붉을 적 치마 상 적상.
붉은 암반이 여인의 치마처럼 산을 두르고 있다하여 적상산이다.
이 깎아지른 절벽 위에 적상산성이 있었다.

적상산

해발 1029미터 적상산 꼭대기에 있는 적상산성을 찾아가는 길이다.
산성을 한눈에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성벽은 대부분 무너지고 잔해는 흙에 묻혔다.

드디어 성벽의 흔적이다. 고려시대에 지어진 적상산성은 원래 전체 둘레 8킬로미터가 넘는 거대한 성이었지만, 지금은 폐허가 되고 서문과 북문이 있던 자리 일부만 복원되어 있다.



게다가 1995년 무주양수발전댐 건설로 산 정상부에 인공호수가 생기면서 산성부지 대부분이 물에 잠겨버리고 말았다.

무주부지도

무주의 고지도에는 간략한 산성의 모습이 남아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 내부는 가운데가 평탄하고 넓으며 네 개의 못과 23개의 샘과 사찰들이 있었다.

교수 인터뷰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를 대비한 산성은 적성산성처럼 높고 험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게 특징입니다. 성 안에는 물이 있고 식량이 갖춰져 있어서 유사시에는 성 안으로만 들어가면 농성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돼있었습니다.

식량을 자체 조달할 수 있는 경작지와 물, 적이 쉽게 달려들지 못할 높고 험한 위치. 적상산성은 이런 조건 덕에 대대로 인근 백성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해설사
“고려 때 기록에 보면 3도의 안념사들이 난이 있을 때마다 백성들을 대피시키고 여기에 의지해서 싸우거나 생명을 보전했던 유서 깊은 산성입니다.”

민초들의 피난처 적상산성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또 하나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족보를 보존하는 사고가 이곳에 설치된 것이다.

조선은 역사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 왕조였다. 그래서 왕을 중심으로 궁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 하나까지 기록으로 남겼다. 그 방대한 기록물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이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이 기록을 보관했던 사고의 역사는 참으로 다사다난했다.

세종대왕 때부터 춘추관 청주 성주 전주 등 네 곳에 사고가 안치됐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가 파괴됐다. 다시 제작된 실록은 평지를 피해 전국의 깊은 산속에 분산 보관된다.

그러다 후금과의 분쟁으로 북방이 위태로워지자 광해군은 묘향산 사고를 이곳 적상산으로 옮기게 한다. 이후 300년 가까이 이곳은 국가의 역사를 보관하는 성소였다.

안국사

안국사는 사고의 수호사찰이었다. 수몰을 피해 호수 가장자리로 옮겨온 안국사에 유일하게 남은 사고의 흔적이 있다. 천불전 건물이 바로 사고지의 선원각을 옮겨온 것이다.

국난이 있을 때마다 목숨 걸고 사고를 지킨 건 승병들이었다.

병자호란 때 청군이 쳐들어오자 승병들은 비밀리에 실록을 옮긴다. 장소는 성벽 끝 낭떠러지 안념대의 바위 틈. 사람이 발을 딛기도 힘든 공간이었다.

석실비장
(석실비장/사고를 지켜낸 공을 치하하여 승정원에서 내린 현액)

덕분에 실록은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지켜낸 실록들은 지금 이곳에 없다.

해설사 인터뷰
적상산 사고에 보관되고 있던 실록은 육이오때 김일성에 의해서 북한으로 반출돼서 지금 현재는 김일성종합대학에 있습니다.

오랜 세월 복잡한 인간사를 묵묵히 지켜봐왔던 산성. 적상산 붉은치마는 여전히 넉넉한 품으로 역사를 품고 있다.

덕유산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산줄기는 가야산을 지나 오르고 내리다 낙동강 너른 평야를 펼쳐낸다.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산줄기들이 성주 땅에 이르러 마침내 닿은 곳은 성석산의 한 자락.

예로부터 풍수지리 상 길지 중의 길지라고 알려진 이곳에, 조선시대 왕실의 특별한 문화가 담겨있는 유적이 있다.
봉우리의 이름은 태봉이다.

바닥부터 이어진 돌계단의 끝, 태봉 정상에 자리 잡은 것은 세종대왕자 태실이다. 태실이란 왕실에서 아기가 태어난 후 그 태를 봉안하는 곳을 말한다.

이곳 세종대왕자 태실은 전국의 태실유적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곳이다.

학예사 걸어가며 설명
여기 보시면 원래 선원록이라고 해서 왕실족보에 보면 세종대왕의 자녀가 18남 4녀로 돼있습니다.

19기 태실의 주인은 후에 세조가 된 수양대군서부터 태어난 순서대로 8대군 10군의 왕자들이다. 제일 끄트머리에 있는 태실은 세종대왕의 손자 단종의 것이다.

세종대왕은 자그마치 19명이나 되는 아들 손자의 태실을 왜 이렇게 정성스레 한곳에 모셔놓은 것일까

조선왕조실록

傳旨 令安胎使所經各官 勿用軍容威儀以迎 是時 安胎使所過州郡 結彩棚 呈雜戲 備軍容以迎
京畿 忠淸 慶尙三道路邊之民 廢農奔走 故有是命

안태사가 경과하는 대소의 각 고을에는.........
경기ㆍ충청ㆍ경상 등 3도의 인민들이 농사를 폐할 정도로 바쁘게 되니

태실을 설치하려면 그 지역 백성의 노역이 필요했다. 합동태실에는 그 수고를 덜어주려 했던 세종대왕의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면 태실은 언제부터 만들어진 것일까. 왕실에서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태안양식을 행해왔는데, 왕자가 태어나면 태를 깨끗이 씻어 백자 항아리에 담았다가 전국의 명당을 찾아 보관하도록 했다.

왕자의 태를 잘 보관해 국가의 길운을 빌었던 태실제도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문화다.

세종대왕은 태실의 자리를 찾는데도 공을 들였다.

조선왕조실록

其好地 皆端正突起 上接雲霄爲吉地

그 좋은 땅이란 것은 땅이 반듯하고 웃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받치는 둣 하여야만 길지(吉地)가 된다

태봉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선석산의 맥이 좌청룡 우백호로 둘러서 있고 앞에는 인촌지가 물 주작 형세를 갖추고 있다. 거기에 실록의 말처럼 들판에 홀로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니, 그야말로 최고의 명당이다.

태봉이 모든 노력은 왕가의 평안이야말로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곧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다는 대왕의 믿음에서 출발한 일이었다.

선석사

인근의 선석사는 세종대왕자태실의 수호사찰이었다. 지금 선석사 내에 있는 태실문화관에는 태실에 관한 각종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태에 관한 믿음은 왕실이나 민간이나 다르지 않았다.
탯줄은 뱃속 아기와 엄마라는 세상을 연결하는 끈이며 생명의 상징이다.

조선 후기부터는 일반 백성들도 태항아리를 사찰에 보관해 아이의 복을 비는 일이 많아졌다.

최고의 정성으로 최고의 길지에 태가 안치된 세종대왕의 자손들은 대왕의 바람처럼 모두 평안한 삶을 누렸을까?

19개의 석물 중에는 눈에 띄는 것들이 있다. 중간중간 몸통 없이 바닥의 연엽대석만 있는 태실이다.


학예사 인터뷰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 찬탈한 다음에 자기 형제 중에 세조가 왕이 되는걸 반대했던 왕자들의 태실을, 석물을 파괴해서 산 밑으로 던져버리고 자리는 없애버렸죠.

자신을 반대했던 동생들의 태실을 부숴버린 주인공. 세조의 태실 앞에는 거북 모양의 큼지막한 가봉비가 있다. 태의 주인공이 왕이 되면 가봉을 하는 전통에 따른 것이다.

권력을 움켜쥐는데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들....남아있는 태실의 모습은 그 운명만큼이나 대조적이다.



태실위로 햇살 보이면아버지 세종은 온 힘을 기울여 왕권의 안정과 자식들의 평안을 기원했지만, 역사는 그들의 삶을 이렇게 다른 길로 이끌었다.



다시 백두대간 산줄기를 따라 올라가 민주지산 삼도봉에 이른다.

삼도봉

삼도봉 꼭대기는 충청북도 영동과 전라북도 무주, 경상북도 김천이 만나는 접점이다. 조선초 태종이 전국을 8도를 나눌 때, 이 봉우리를 삼도의 분기점으로 삼았다 한다.

이 삼도봉에서 갈라져 나온 서기봉 대불리 마을에는 특별한 마애불이 있다.

60도 경사의 가파른 암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탑 모양으로 불두 세 개가 쌓여있는 삼두마애불이 보인다.

백두대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삼두불이 삼도의 경계 삼도봉 자락에 새겨진 것은 어떤 우연일까.

속리산 문장대

삼도봉에서 다시 북상하는 백두대간을 타고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속리산 자락으로 들어간다.

속리산 화양동 계곡은 예로부터 금강산 남쪽에서 으뜸가는 산수라 일컬어지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이름난 절경 9곳을 일러 화양구곡이라 부른다.

화양서원

충청북도 괴산군 화양동 골짜기에선 지금도 봄가을 일 년에 두 차례 제사가 열린다.

송시열

제사를 받는 주인공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이다. 조선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혹은 망국적 당파싸움의 시조. 송시열을 둘러싼 역사의 평가는 엇갈린다.

곽신환 인터뷰/
노선 자체가 대의중심으로 살아야한다를 표방한 사람. 이런 삶은 본질적으로 험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학문에 있어서는 동아시아 최고봉이었다.

주자의 예학을 깊이 따른 우암에게 적통인 명나라를 밟고 들어선 청나라는 받들 수 없는 오랑캐였다. 그는 병자호란 후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후학을 가르치는데 힘썼다. 후에 제자들이 그를 기려 이곳에 세운 것이 바로 화양서원이다.



송시열이 죽은 지 몇 세기가 지났지만, 지금도 그의 가르침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복원된 화양서원에 모여든다.

화양계곡

화양동 계곡에는 그의 학문과 사상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남아있다.
그는 주자의 무이구곡에 비추어 9곳의 절경을 찾아내고 화양구곡이라 이름 붙였다.



경천벽
화양구곡의 입구가 되는 제 1곡은 경천벽. 절벽들이 하늘을 떠받들고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운영담
경천벽에서 400미터 쯤 북쪽으로 올라가면 계곡물이 유난히 맑은 연못이 나온다.
구름의 그림자가 비친다는 뜻의 2곡 운영담이다.

읍궁암
운영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남쪽 물가에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다.
3곡, 엎드려 운다는 뜻의 읍궁암이다.

초구송시열은 효종과 현종 두 왕의 스승이었다. 특히 청나라에서 볼모생활을 했던 효종은, 청을 인정하지 않는 송시열을 북벌정책의 동반자로 여기고 신임했다. 그러나 효종이 급서하는 바람에 북벌은 무산됐고, 왕의 승하 소식을 들은 그는 새벽마다 이 바위에서 통곡 했다고 한다

금사담
화양구곡 최고의 절경인 4곡이다. 맑은 물에 비치는 모래가 금싸라기 같다하여 금사담이다.
송시열은 금사담 바위 위에 암서재를 짓고 이곳에서 글을 읽었다.
암서재에서 내다보이는 맞은편 바위에는 송시열이 직접 썼다는 글씨들이 새겨져있다.

충효절의 창오운단 무이산공
명의 멸망과 효종의 승하를 안타까워하며 적은 글

첨성대
물줄기를 따라 북쪽으로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화양교 위로 층층이 쌓인 바위들을 볼 수 있다. 5곡, 별을 바라본다는 뜻의 첨성대다.

비례부동
예가 아니면 따르지 않는다는 뜻

만절필동
물은 아무리 꺾여도(돌아도) 결국 동쪽으로 흐른다.
충신의 절개는 꺾을 수 없다는 뜻

이 바위에도 그의 글씨들이 새겨져있다.

곽신환 인터뷰
곧을 직으로 살아라. 자기의 뜻을 잊으면 안되는 것을 글자로 새겨놓고 실현하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능운대
6곡은 큰 바위가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듯 늠름한 능운대다.

와룡암
7곡은 용이 누워 꿈틀거리는 모양을 닮았다 해서 와룡암이다.

학소대
층암절벽 곳곳에 노송이 우거진 학소대는 8곡이다

파천
여기가 화양구곡의 마지막 절경 9곡이다.
매끄럽고 흰 바위 위로 맑은 물이 흐르는 파천이다.

그는 아름다운 화양동 계곡에 자신의 학문과 사상이 담긴 이상향을 만들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송시열은 숙종의 사약을 받고 83세에 생을 마감했다. 살아서 영광과 좌절을 두루 맛본 송시열이었지만, 그에게 가장 평온했던 시간은 화양구곡에서 보낸 날들이 아니었을까.


한반도 지도 백두대간

지리산에서 출발한 백두대간은 속리산을 지나며 동쪽으로 방향을 크게 틀어 태백산으로 향한다.
산줄기가 방향을 트는 중간 지점에 이화령과 조령 하늘재가 차례로 늘어서 있다.

비교적 완만한 경사에 부드러운 품새를 지닌 남쪽의 산들과 달리 이쯤부터는 본격적으로 백두대간의 거친 산세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시작이 바로 문경새재다. 새재는 새들도 힘들어 쉬었다 넘어간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그만큼 험한 산이지만 사람들은 이곳에 길을 냈다.

경상북도 문경시
지금은 인구 7만 5천명의 소도시지만 조선시대 문경은 영남의 인재와 문물이 모여드는 중심지였다.

조선도로지도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자마자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을 연결하는 도로망을 정비한다.
그중 동래에서 한양을 연결하는 최단거리 길이 영남대로였고, 영남대로에서 가장 높고 험한 고개가 바로 문경새재였다.



한양을 향해 길을 나설 때 문경새재의 시작점은 주흘산 자락 상초리다. 상초리 일대는 문경새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 입구에 문경새재 세 개의 관문 중 첫 번째인 주흘관이 있다.

국가가 나서서 지정한 공식 도로인 만큼, 초기에 이 길은 관리의 길이었다.

1관문 지나 1.2킬로미터를 가면 조령원터가 나온다. 고려와 조선은 일정 거리마다 역과 원을 두어 도로통신체제를 운영했다. 초기에 원은 국가에서 파견한 관리들이 묵는 숙소였지만 후기로 가면서 선비나 장사꾼들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원은 나라의 엄격한 관리 하에 운영되었다. 하지만 한양을 오가는 장사꾼들이 모여드는 장소였던 만큼, 조령원에는 돈과 물건이 넘쳐났다.

뒤쪽에는 주막이 있었다. 새재 고개를 넘던 배고픈 이들이 이곳에서 술과 밥 한 끼를 해결했다.

원터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정자가 나온다. 새로 부임하는 경상감사가 전임자에게서 인수인계를 받던 교귀정이다.

이런 유적들은 이 길이 국가의 공식 국도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교귀정 지나 1킬로미터를 더 가면 제 2관문인 조곡관이 나온다. 지금은 관문 주변 일부가 복원되어있을 뿐이지만, 원래는 이 성벽들이 봉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기껏해야 관리나 상인들이 지나던 산길에 왜 이런 관문들이 있는 것일까.

임진왜란 당시 동래에서부터 파죽지세로 올라오던 일본군과 조선육군의 총지휘관이었던 신립장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맞닥뜨린다.

다른 장수들은 문경새재의 험한 지형을 이용해 방어전을 펴자 했지만 ,신립은 천혜의 요새였던 새재를 버리고 탄금대에서 전면전을 펼친다.

탄금대전투

이 싸움에서 조선군은 전멸하고 곧 한양도성은 함락되고 만다.

학예사 인터뷰
징비록에 보면 왜군이 지금 2관문 앞에 와서 저기는 반드시 조선군이 숨어있을 것이다 척후병. 세 번을 확인을 하고 조선군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춤을 추면서 여길 지나갔다고 합니다.

신립장군이 왜 문경새재를 포기했을까 하는 문제는 임진왜란 최고의 논쟁거리다.

3관 조령관

어쨌든 뒤늦게서야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을 깨달은 조선정부는 문경새재에 3겹의 저지선을 만들고 방어를 강화했다. 문경새재는 곧 군사적 방어의 길이었다.



장원급제의 길

그러나 일반 백성들에게 이 길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길이었다.

옛길 박물관

택리지에는 조선 선비의 반이 영남에서 나왔다는 말이 나온다. 그만큼 많은 선비들이 이 길을 통해 과거를 보러 다녔다.

사실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로는 죽령과 추풍령도 있었다. 그러나 선비들은 하나같이 그중에서 가장 험한 문경새재를 고집했다.

학예사 인터뷰
과거시험을 보시는 분들이 문경을 넘어갔는데 문경이란 말이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 해서 조금 힘들더라도 문경새재를 넘어가면 합격률이 높아진다고 해서.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고, 죽령은 죽죽 미끌어진다고

책바위
돌탑들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추풍령을 피하고, 죽죽 미끄러지는 죽령을 피해 문경새재를 넘었던 선비들은, 그 간절했던 마음처럼 경사스런 소식을 듣게 되었을까.

관리의 길이었고 군사적 방어의 길이었고 선비의 길이었던 문경새재 고갯길. 새들도 힘들어 쉬어간다는 그 길로 사람들의 삶은 끝없이 이어져왔다. .




백두대간의 사람들 가운데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고집스레 걸어가는 이들이 있다. 문경에서 대를 이어 도자기를 만들어온 김정옥씨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김정옥 (국가무형문화재 제105호 사기장 보유자) /
”여기가 이제 도자기 만드는 흙이다“

도자기의 몸이 되는 사토를 구하는 것도 고스란히 그의 몫이다.
좋은 재료는 좋은 도자기의 시작, 양질의 사토를 구하려면 직접 발품을 팔아야 한다.

김정옥 (국가무형문화재 제105호 사기장 보유자) /
사토라고 하는 흙인데, 이게 요... 보면 모래도 있고, 고운 분말도 있어요, 이걸 채로 쳐서는 안 되고, 물에 풀어서 침전을 시켜서 그릇 만드는 원료(로 써요)

그는 250년 전 이곳 문경으로 들어온 도공의 후손.
도자기는 가족의 역사이자 삶 그 자체.


김정옥 (국가무형문화재 제105호 사기장 보유자) /
우리 할아버지가 이곳(문경)에 오신지가 대력 250 정도 됩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조선시대 왕실의 도자기를 만들었던
경기도 광주 관요 출신의 김비안 사기장.

관요가 폐쇄되면서 도공들이문경, 괴산, 단양 등지로 흩어져
민간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민요가 번창하게 되었고,
그의 가문도 이곳에 터를 잡았다.

김정옥 사기장은 선친인 김교수 사기장에 이어,
7대째 조선 도자기의 맥을 잇고 있다.

대를 이어 전통을 지키는 것에는 많은 수고로움이 따른다.
재료를 모으는 것에서부터, 제작에 이르기 까지
그는 철저하게 전통방식을 따른다.

이는 50년 넘게 흙, 불과 씨름하는 동안 꿋꿋이 지켜온 철칙.
장인의 손끝 발끝이 만들어 내는 미묘함, 최대한 그릇의 자연미를 살려내기 위해
발 물레를 고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열 여덟의 나이로 6대 도예장인인 아버지 김교수 선생으로부터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던 김정옥씨.

가족의 생계를 위해 결정한 일이지만, 도예의 매력에 빠졌고,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밤낮없이 그릇을 빚었다
그 노력은 고스란히 작품들에서 빛을 발한다.

정호다완
가장 완벽한 재현이라고 평가받는 정호다완,

- 청화백자

- 달항아리

청화백자와 달 항아리 등으로 조선 백자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린
그는 1991년 국내 최초로 ‘도예 명장’이 됐다.

이어 96년에는 전통도자기 분야에서는 유일한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또한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과 독일 동아시아 국립 박물관 뿐만 아니라,
영국의 대영박물관까지 그의 작품이 영구 전시되어 있다.



도자기 제작에 필요한 3대 요건이라면 흙, 불, 물.
그릇을 구울 때 필요한 불은 기름이나 가스가 아닌
백두대간의 소나무를 쓴다

사기장이 쓰는 가마는 이 지역의 전통 가마 ‘망댕이’

김경식 (국가무형문화재 제105호 사기장 전수조교) /
이 도자기 굽는 가마를 망댕이 가마라고 합니다. 보통 20~25cm 길이에 한쪽은 굵고
한쪽은 가늘게 해서 아치형으로 쌓았을 때 맞아떨어지게 됩니다.

사람의 장단지처럼 생긴 진흙덩이를 이 지역에서는 망댕이라고 부르는데
이 망댕이 1만 여개를 촘촘히 박아서 만든 전통칸 가마를 가리켜 망댕이 가마라 부른다.

반구형의 가마 칸 여러 개를 경사지게 연결한 형태다.

두 달에 한 번 씩 사기장의 전통가마에 불길이 오른다.
불을 때기 전 정갈한 마음으로 고사를 지내는 사기장

김정옥 (국가무형문화재 제105호 사기장 보유자) /
도자기가 잘 구워지는 것은 인간의 힘만으로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가마신이 잘되게 해 주세요 하고 신의 힘을 요청하는 겁니다.

장작으로 불을 때는 망댕이 가마, 뜨거운 불길 앞에서 10시간 이상 꼼짝하지 않고
불앞을 지켜야만 한다.
불꽃이 그릇을 잘 감싸는지 계속 지켜보다
불이 빠지려고 하면 얼른 장작을 집어넣는다.

김경식 (국가무형문화재 제105호 사기장 전수조교) /
불을 자꾸 집어 넣으면 공기가 들어갈 틈이 없어지고 불을 안 넣으면 공기가 들어가서 산화가 됩니다.

이제는 김정옥 사기장이 지켜온 불길을 함께 살피며, 같은 길을 걸어가는 아들에 손자까지....
250년을 이어온 그들 도예가문의 역사는 또 한 세월을 이어가고 있다.

20여 시간을 견뎌낸 그릇들이 말갛고 뽀얀 속살을 드러낸다.
지극정성으로 빚었다 하나, 장인의 엄격한 선별 과정에서 완성되는 것은 절반이다.

김정옥 (국가무형문화재 제105호 사기장 보유자) /
오직 내가 할수 있는 일은 그릇만드는것 뿐이다. “무한불성” 땀 없이는 못 이룬다

화려하진 않지만 투박함 속에 묻어나는 자연스러움
전통방법을 고수하며 200년이 넘는 세월 지켜온 한국의 미.



사기장 김정옥씨.그가 평생을 지켜온 흙과 불,
그것은 다름 아닌 이 땅의 전통과 가치,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백두대간의 산줄기들은 물길을 가르고 논밭을 나누고 사람의 마을을 나누었다. 촘촘히 나뉘어진 땅에서도 하나의 문화가 피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한반도 전체가 백두대간의 땅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