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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 | KBS | ||
전자자원소장처 | 한국문화재재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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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N2C)
UCI | I801:1805001-001-V000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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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KBS 파노라마 - 무형문화유산 2부 통영십이공방 | ||||||||||||||
콘텐츠 유형 | 동영상 | 언어정보 | 국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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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키워드 | ;통영12공방;KBS;파노라마;통영;12공방;국가무형문화재;한산대첩; | ||||||||||||||
내용 | 삼도수군통제영을 줄여 지명이 된 통영에는 통영십이공방이 있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장인들이 만들어내는 공예품은 통영소목과 나전칠기, 장석, 통영의 갓, 통영소반 등등 가지각색에, 협업을 통해 만들어내는 것들도 있다. 이들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우리 전통 공예를 보존하고 이어나가고 있다. 통영에서 우리 전통 공예와 무형문화재들의 모습, 그리고 우리나라의 무형문화재 현황에 대해 알아보자. | ||||||||||||||
대본 정보 | 토지의 작가 박경리가 마지막까지 글을 쓰던 공간에 낡은 장롱이 하나 남겨져있다. 오래전 통영의 장인이 만든 나비장. 장석은 느슨해지고 세월의 상처가 가득하지만 이 장롱을 통해 작가는 언제나 고향 통영과 이어져 있었다. 작가 박경리의 생전 육성 지금 어릴 때 기억하지만 통영소반, 통영갓, 또 선자방이니, 칠방이니, 주석방이니 이런 게 다 있거든요. 박경리는 “소설을 쓰며 끊임없이 들여다보았던 국어사전이 나의 문학이며 옷을 지을 때 사용했던 재봉틀은 나의 생활이고 통영에서 가져와 평생 곁에 두고 아꼈던 장롱은 나의 예술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지금은 기술자지만 그땐 쟁이바치(장인)고, 쟁이바치는 어떤 면에선, 창조하는 예술가라고 볼 수 있거든요. 그 사람들의 정신이랄까 혼이라고 할까, 그런 게 이제 통영의 예술의 토양이 풍부해진 거죠. 한반도의 남쪽 끝 그만 도시 통영. 그 곳에 400년 이상 화려하게 명맥을 이어온 전통공예 통영십이공방이 있다. 매년 8월 통영은 떠들썩한 축제의 현장으로 변신한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통영 앞바다에서 대승을 거둔 한산대첩을 되새기는 축제다. 축제기간 내내, 평소에는 쉽게 볼 수 없는 통영지역의 중요 민속공연들이 관광객들을 매료시킨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통영 앞바다에서 펼쳐지는 한산대첩 재연 행사. 130여척의 배들에서 쏘아 올리는 불꽃으로 이 바다가 수백 년 전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낸 자랑스러운 승리의 바다였음을 힘차게 표현한다. 1592년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은 조선의 운명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작은 시골 포구였던 통영의 역사까지 바꾸었다. 다음해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한산도에 수군통제영을 설치했다. 조선수군의 총사령부 한산도엔 전국에서 공인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전선 을 건조하고 수군이 사용할 병장기를 만들었다. 400년 전통 12공방의 시작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통제영은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공인들도 이곳으로 공방을 옮겨 무기뿐만 아니라 통제영에 필요한 각종 물자를 만들었다. 통제영이 폐지된 1896년까지 12공방은 한양을 제외하면 조선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번성한 공예품 생산지였다.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준말이다. 아름다운 풍광에 기후는 온난하며 각종 해산물이 풍부한 곳이다. 통영이 자랑하는 나전칠기는 남해안에서 자라는 참 전복이 중요한 재료다. - 그물 올리고 - 이거는 몇 년 된 거에요? - 이게 한 15개월 정도 된 겁니다. - 우리 남해안의 참전복은 다 골이 이렇게 있습니다. 다자란 남해안의 전복은 곧 바다를 떠나 화려한 변신을 하게 된다. 이금동씨는 통영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섭패장인이다. 섭패란 전복껍데기를 자르고 연마해 만들어내는 나전용 자개를 말한다. 여섯 차례나 갈고 닦아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오색의 섭패. 오직 남해안의 전복만이 이런 색깔을 낼 수 있다고 한다. 이금동 / 섭패장인 차이가 많이 나지요. 다른 나라의 전복은 보통 두 가지 색, 세 가지 색정도 밖에 안 나오는데 우리 국내 전복은 다섯 가지 색이 그대로 살아납니다. 가장 아름다울 때는 제가 물건을 갖다가 (나전)장인들한테 드려서 물건 만들었을 적에, 그 때가 참 야 내가 이 물건을 이렇게 만들어서 물건이 이렇게 곱게 나오는 구나하는. 자개를 붙여 가구의 화려함을 극대화하는 나전공예는 통영12공방의 가장 자랑스러운 전통의 하나다. 나전장 송방웅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평생 나전칠기를 만들어온 자칭 자개쟁이다. 송방웅 / 중요무형문화재 10호 나전장 어머니 뱃속에서 으앙 하고 나오니까 이걸 아버지가 가업으로 집에서 하고 계셨어요. 그러니까 자라면서 눈으로 보고, 만지고, 느끼고 이렇게 해서 배웠죠. 아버지 송주안은 엄격한 스승이었다. 수시로 떨어지는 불호령 속에서 10년 동안 나전일을 배웠고 자신만의 나전을 찾아 또 다른 10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녔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내 몸으로, 내 눈으로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집을 많이 비웠어요. 전국의 박물관이란 박물관은 안 빠지고 다니면서, 진열장 속에 있는 작품을 눈가늠으로 가로세로 높이 스케치 해 와가지고, 만들어보고 이런 독학으로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통영나전의 가장 큰 특징은 가구전체를 꼼꼼하게 뒤덮는 기하학적 문양이다. 국화무늬, 당초무늬의 연속적인 반복은 화려하다 못해 탐미적이다. 나무로 만든 필통에서도 알루미늄으로 만든 반지고리에서도 나전은 한결같은 광채를 뽐낸다. 나전공예는 두 가지 기법이 있다. 전통적인 끊음질은 자개를 톱으로 실처럼 가늘게 잘라 상사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상사를 문양에 맞추어 끊어 연속적으로 이어가는 것이 끊음질의 핵심이다. 미리 아교를 칠해놓은 바탕에 체온을 담은 침을 묻혀야 자개의 접착력이 좋아진다고 한다. 송방웅 / 중요무형문화재 10호 나전장 우리 선배,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교 세말은 먹어야 기술자가 된다. 아교 세말은 먹어야 기술자가 된다. 줄음질은 근대 이후에 새롭게 도입된 것으로 여러 장의 자개를 압축해 만든 판자개를 본대로 잘라내는 기법이다. 이렇게 잘라낸 문양들을 이어 붙이면 자개는 대나무로, 꽃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하나의 나전공예 제품이 완성되기까지 거치는 공정은 약 30가지. 커다란 작품은 1년 이상, 소품도 두 달 정도가 필요하다. 송방웅 / 중요무형문화재 10호 나전장 정말 이 나전공예만은 민족공예가 아닌가. 고려시대부터 역사적으로 내려온 공예이기 때문에. 그리고 세계에서 우리뿐이기 때문에 민족공예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전통대패를 이용해 20일 이상 물에 불린 버드나무를 동일한 두께의 얇은 판들로 벗겨낸다. 호장이라 불리는 이 판은 통영소목만의 특별한 재료다. 김금철 / 중요무형문화재 55호 소목장 전수교육조교 우리 통영만의 기술입니다 이게. 딴 지방의 소목을 봤지만 우리 통영 소목보다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자존심을 느끼며 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소목일을. 통영소목은 여러 종류의 전통 목 가구 중에서도 아주 까다로운 공정을 거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큰 특징은 성태뇌문이라 불리는 전통 문양. 그가 만드는 장롱은 동일한 문양들이 완전하게 대칭을 이룬다. 통영소목의 성태뇌문은 복잡하고도 정교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먹으로 물들인 검은색 호장 3장과 흰색 호장 2장을 교대로 겹쳐 아교를 칠해 붙인다. 아래위로 나무를 대 줄로 묶고 하루 동안 굳혀 단단하게 만든다. 김금철 / 중요무형문화재 55호 소목장 전수교육조교 성태뇌문은 우리가 쉽게 이야기하면 돌담길 담 쌓은 것 보면 서로 얹어 쌓기 때문에 여러 가지 형태가 나오는 거 아닙니까. 거기다 진흙을 해서 위에 또 쌓기 때문에 성태는 서로 이어서 붙인 것입니다. 성태뇌문은 가로로 뿐만 아니라 세로로도 무늬가 들어간다. 톱으로 섬세하게 파낸 홈에 세로로 무늬를 집어 넣어 입체적인 문양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완성된 무늬의 안쪽과 바깥쪽에 나무를 붙여 하나의 나무 블록을 만들고 세로 면으로 톱질을 한다. 김금철 / 중요무형문화재 55호 소목장 전수교육조교 톱질하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톱질을 해서 이렇게 톱자국이 안 생기고 부드럽게 나와야만 대패를 밀 때 나무도 안 얇아지고 이 두꺼운 상태 이대로 바로 쓸 수 있거든요. 하나의 나무 블록은 장인의 톱질을 통해 똑같은 성태뇌문을 가진 12개의 판으로 나뉘어진다. 김금철 / 중요무형문화재 55호 소목장 전수교육조교 조선 톱으로 켜가지고 똑같은 문양을 만들어낸다는 게 특이합니다. 그런 것도 아름답고 좋고요. 또 우리 통영지방에는 성태뇌문 넣는 것도 보면 좋고요. 귀 뇌문도 해놓으면 아름답고 좋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제가 빠져든 거죠. 배우게 된 거죠. 열여섯 살, 소목장이던 사돈집에서 소목의 매력에 빠진지 44년. 통영소목의 전통은 묵직한 연장들과 함께 그에게 이어졌다. 김금철 / 중요무형문화재 55호 소목장 전수교육조교 백 한 오십년 된 연장들이거든요, 이 연장들이. 우리 선생님의 아버지 천척동씨가 쓰고, (나의 스승인) 그 아들도 쓰고, 저도 쓰니까 3대가 쓰고 있는 것 아닙니까. 연장이. 지금 써도 연장이 참 좋아요. 통영 소목과 나전칠기는 좋은 장석을 만날 때 비로써 완성된다. 쇠를 잘라내고 두드려 만들어낸 장석이 있어야 가구는 그 형태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더욱 화려해지기 때문이다. 장인의 조상들은 조선시대 통제영의 12공방에서 쇠붙이를 다루던 공인이었다고 한다. 장인과 그 아들까지, 300년을 내려오는 가업인 셈이다. 김극천 / 중요무형문화재 64호 두석장 증조할아버지(때 까지는) 쇠를 다루는 주석방이라고 하는, 쇠를 다루는, 갑옷에 쇠를 붙이던지 말안장에 쇠를 붙이는, 그런 일을 했던 것 같아요. 그걸 이제 할아버지께서 이제 가업으로 가구에 붙는 장석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 우리의 전통 장석은 서양식 가구의 경첩처럼 미리 대량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크기와 모양을 일일이 개별 가구나 기물에 맞추어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 요즘은 작은 가구를 선호하는 추세에 따라 장석도 작아지고 있다. 통영지방의 대표적인 장석문양은 나비와 박쥐문양이다. 실톱을 사용해 문양의 세세한 부분까지 만들어 낸다. 장인의 망치와 끌이 거치고 지나가면 쇳조각은 한 마리의 나비로 변신한다. 그는 특히 나비문양의 화려함을 좋아한다. 김극천 / 중요무형문화재 64호 두석장 나비는 안방 가구에 들어가면 부부간에 사랑을 많이 하라고 나비 장석을 하고. 박쥐 문양은 복을 가져다주고 다산도 한다는 의미에서 옛날 분들이 박쥐도하고 사슴도 만들고. 통영 장인들의 가구가 유독 화려한 것도 이 지역만의 독특한 장석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김극천 / 중요무형문화재 64호 두석장 우리 통영은 장석을 많이 붙이고 화려해요. 다른 지방에는 장석을 간단하게 붙이는데 우리 목가구에 이음새라든지 벌어지지 말라고 그래서 장석이 많이 붙고 화려합니다. 나이 많은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전통장이기에 장석을 다는 일도 완벽을 기해야 한다. 장롱문은 부드럽게 열리고 닫혀야 한다. 농을 닦을 때 헝겊이나 손이 장석에 걸리는 일이 없도록 못질 하나에도 꼼꼼한 정성이 들어간다. 통영 충렬사 장석집, 무형문화재 장인의 아들로 자연스럽게 시작한 장석일 이었다. 김극천 / 중요무형문화재 64호 두석장 오래가면 우리가 전통적으로 손으로 만든 것은 은은하면서 아름다운 빛이 나는데 기계로 만든 장석은 가면 갈수록 싫증을 느끼기 때문에, 지금 진품명품 이런데 우리 전통가구 나오면 값어치가 그만큼 있잖아요. 임진왜란 중 시작되어 수 백 년을 이어온 통영 12공방의 전통. 18세기 후반에는 상호 분업 및 협업체제를 갖춘 규모 있는 공예품 생산단지로 발전했다. 이곳에서 만들어낸 가구와 각종 생활용품들은 조선 전체에서 명성을 떨쳤다. 통영 제품의 인기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이후 까지도 시들 줄 몰랐다 1960-70년대는 통영공예의 전성기였다. 송방웅 / 중요무형문화재 10호 나전장 그 당시에 우리(통영) 인구가 4만~4만5천쯤 될 땐데 우리 나전칠공예하는 인구가 이천여명 됐어요. 그러니까 엄청 많았지요. 한 집 걸러 굴뚝에 분진 나오고 하는 건 다 섭패공장 자개공장 그랬거든요. 나전과 소목 제품의 인기만큼 장석의 수요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김극천 / 중요무형문화재 64호 두석장 할아버지 아버지 때는 장석이 필요한 마님들이 가구는 됐는데 장석을 찾으러 오면 빨리 안 되니까 막걸리도 사다주고... 고무신 서 너 켤레는 떨어져야 (장석) 한 벌을 겨우 찾아갔다고 해요. 오랜 전통을 가진,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장인들이 모여 함께 일했던 시너지 효과가 컸다. 최공호 교수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십이공방의 전통 때문에 그 지역이 거기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된 또는 재 배출된 장인 인력들 그리고 장인인력이 많이 있으니까 아무래도 그 지역이 좋은 명산물을 전국으로 유통하는 유통의 거점이 되지 않았을까. 가장 많이 알려진 게 나전칠기겠죠.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 여성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 했던 가구는 자개가 화려한 통영장롱이었다. 양반 신분의 상징 갓. 권력자들이 가장 좋아했던 갓은 통영제품이었다. 통영소반 역시 전국 여염집 여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해방 직후에 내가 서울의 동사헌정(장충동)에 살았는데, 앉아있으니까 통영소반이라고 외치고 가요. 그때도 서울에서도 통영 소반이라 하면 특별한 거였어요. 통영의 윤이상 생가 터 바로 옆에 100년도 전에 지어진 집이 한 채 있다. 최근 중요무형문화재 소반장으로 지정된 장인의 생활공간이자 공방이다. 무늬가 아름답고 단단한 느티나무를 자귀로 깍아내고 밀도로 부드럽게 긁어내면 통영소반의 특징적인 상판이 완성된다. 추용호 / 중요무형문화재 99호 소반장 우리가 (소반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해주반, 통영반, 나주반 아닙니까. 다른 지역에도 있었지만. 나주반은 전(변죽, 상 테두리)을 얹는 거고, 끼워 넣어 얹는 거고, 통영반하고 해주반이 안파반이라고 자귀질로 파내는 겁니다. 안파반이 파냈다는 거, 저기(나주)는 얹은 판이고. 그래서 특색이 좀 틀리죠. 모든 소목이 그렇듯 300여개의 연장들은 그의 가장 큰 재산이자 자랑이다. 추용호 / 중요무형문화재 99호 소반장 소반 연장은 자기가 만들어 써야 합니다. (먼저) 도안을 앉아서 그립니다. 이걸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형태도 있고 모양도 있고 여러 가지 있을 것 아니에요. 도안을 가지고 어떤 연장이 들어가야겠다. 없으면 만드는 것 아닙니까, 손수. 그러니까 연장이 자꾸 불어나는 거죠. 통영소반의 아름다운 곡선과 완벽한 대칭은 모양은 비슷하지만 쓰임새가 조금씩 다른 다양한 연장들이 있어 가능하다. 추용호 / 중요무형문화재 99호 소반장 연장을 딱 펴면, 그 사람의 기술을 연장으로 평가를 한다고 해요, 바로 딱 보면. 연장을 딱 보면 이 사람에게 (상품 가격으로) 얼마를 줘야 한다는 게 나온다고 하네요. 통영소반의 자랑중 하나는 다섯 가지 형태를 기본으로 하는 다리다. 다리의 재료로는 주로 은행나무가 쓰인다. 다리의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어내기 위해 거친톱과 부드러운 톱을 번갈아 사용해 잘라내고 마지막으로 홀개를 사용해 표면을 매끄럽게 한다. 추용호 / 중요무형문화재 99호 소반장 소반의 (아름다움은) 곡선의 아름다움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천판 (곡선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다리 (곡선의) 아름다움이 더 크다고 하는 거죠. 아름다운 곡선미가. 그래서 다리에서 제일 중요한 거는 코입니다. 모든 다리의 코. 밑에서 내려오는 코. 그의 소반은 균형미와 디테일의 아름다움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는 수백 년 전통, 통영 소반을 만드는 통영의 유일한 장인이다. 옛 양반들이 갓에 부여한 의미는 지금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컸다. 조선말의 최고 권력자 흥선대원군이 최고의 갓을 찾아 일부러 통영에 사람을 보내 갓을 맞췄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정춘모 / 중요무형문화재 4호 갓일 갓 쓰는 사람은 자기의 머리위에 얹는 것은 최고의, 내 머리위에 얹는 것은 최고의 상징적이고, 사나이가 정장했을 때 옷은 좀 떨어진 것을 입어도 갓은 절대로 깨끗하고 멋있는 것을 써야 한다는 그런 의식이 머리에 잠겨있습니다. . .. 갓의 제작은 말총으로 만드는 총모자, 대나무로 만드는 양태, 그리고 두 부분을 조립하는 입자의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통영갓이 명품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던 가장 큰 비결은 양태에 있다. 양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대나무의 속껍질을 벗겨내고 날카로운 칼로 잘게 흠집을 내 머리카락만큼이나 가는 대나무실을 뽑아내어야 한다. 양태는 대나무실 네 가닥을 동시에 짜서 만든다. 한 올 한 올 양태를 짜나가는 이는 30년째 이일을 도와온 장인의 부인이다. 도국희 / 먼저 대나무 쪼개서 삶아가지고 사죽도 뽑고 실도 뽑고 해야 하니까 이 시간이 만만 치 않은데요. 열심히 해도 아마 한 두 달. 질문 : 이 양태 하나 만드는데요? 정말로 열심히, 밥만 먹고 정말 이거만 하면 그래도 1개월 이상 걸릴 거예요. 양태가 기본 형태를 갖춘 다음에는 씨줄과 날줄 사이에 빗대를 비스듬히 넣는 작업이 남아있다. 이렇게 공간을 확보한 빗대에 가는 대나무 실을 물려 뽑아내어야 양태의 바닥은 평편하고 440여 가닥의 대실을 엮어 만든 양태에 정성스레 먹을 칠하고 테두리를 만들어 붙이고 옻칠도 한다. 총 51가지 섬세한 공정이 필요한 것이 갓일이다. 정춘모 / 중요무형문화재 4호 갓일 이 분들은 이 맛을 좋아합니다. 이 느낌 맛을. 아름다운 것도 좋아하지만 느낌이나 자기에게 느껴지는 맛을 굉장히 중요시 합니다. 이 광채가 서리 빛이 나고. 옛날에 갓 쓰는 분들은 갓을 쓰면 유성기판 보듯 한다. 유성기판이 레코드판 아닙니까. 통영갓 중에서도 최고의 명품은 진사립이다. 갓에 명주실 수천 가닥을 한 가닥 한 가닥 입힌 진사립은 조선시대 왕이나 최고 권력자만이 쓸 수 있었던 최고의 갓이었다. 정춘모 / 중요무형문화재 4호 갓일 오랜 역사 속에서 갓을 쓰고는 아주 인간답게 살아야하고 존엄성을 갖춰야하고 남자답게 해야하고 그렇게 까다롭게 했기 때문에 우리 장인들이, 이 갓이 이렇게 발전한 겁니다. 통영출신이 아닌 그가 통영갓 장인들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은 우연이었고, 또 커다란 인연이었다. 스승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 그는 통영갓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장인이다. 조대용 / 중요무형문화재 114호 염장 계속 한평생을 하다보니까 이제 숙달이 돼서 이렇게 잡힙니다. 보지도 않고도. 감각이 이제, 손 감각 이지요. 발은 갓과 함께 통영의 대표적인 죽공예다. 해풍을 맞고 자란 바닷가의 시누대를 잘라 겉껍질과 속껍질을 제거해 말린 것이 통영세발의 재료다. 발은 우리 전통주택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대용 / 중요무형문화재 114호 염장 대나무 발은 주로 여성들이 사용했습니다. 왜냐면 옛날부터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한자리에 같이 나란히 있기가 그렇잖아요. 그럼 이게 공간을 마련해주는 역할을 하거든요. 앞에 발을 하나 걸어놓으면 바깥에서는 안이 안보이니까. 안에서는 밖이 보이거든. 통영의 발은 다른 지역의 발보다 훨씬 섬세하고 가는 대실을 써 세발이라 불린다. 원래 통영의 12공방에서 발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통영의 기술자가 한양의 궁궐 내공방에서 발을 짜던 기술을 배워와 이 지역에서 발짜기를 시작한 것이 아닌 가 추측하고 있다. 수십 개의 실패 중에서 필요한 것을 눈으로 보지 않고도 정확하게 잡아내 대나무 발을 묶어나간다. 장인이 발을 짤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전체적인 균형과 문양의 아름다운 대칭이다. 조대용 / 중요무형문화재 114호 염장 그냥 이렇게 생각 없이 (문양을) 하나 넣어봤다가 이게 아니고, 도면을 먼저 그려가지고 (발이) 주로 높이가 높고 넓이는 좀 짧거든요. 그럼 거기에 대칭을 맞춰가지고 안에 문양을 넣어야 대칭도 잘되고 그래서 볼 적에 시원한 느낌도 들고. 우리의 생활문화가 달라지면서 전통공예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옥의 운치를 더해주던 통영세발도 예외는 아니다, 조대용 / 중요무형문화재 114호 염장 다른 분야도 그렇겠지만 특히 대나무 발은 사용처가 지금 자꾸 사라지니까. 우리 한옥이 자꾸 없어지고. 그러니까 그 세대들이 연세가 많아지면서 다음 세대가 올라오면서 그 사람들이 에어컨, 선풍기가 있으니까 여름에 발의 묘미를 모르는 거예요.. 한국은 공예품의나라다. 박물관이 소장한 미술품의 90% 가량이 전통 공예품이다. 장인들이 뛰어난 손재주로 만들어낸 공예품들이 오랜 세월 일상에서 사랑을 받으며 쓰이다 문화재가 된 것이다. 우리는 어느 나라보다 앞서서 무형문화유산의 가치를 깨달았다. 1964년 종묘제례악을 중요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했고 그 후 다양한 예술 활동과 공예기술을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거기에 우리민족 특유의 미의식과 예술철학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최공호 교수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국보나 보물을 만들 수 있었던 기술은 형태는 남아있지만 그 기술은 끊겼을법하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사람의 손끝과 손끝을 통해서 그 오랜 기간 동안 어찌 기특하게도 오늘날 어떤 사람에게 그 기술의 노하우가 남아있어요, 그건 굉장한 노하우잖아요. 일본과 한국에 이어 세계도 점차 무형문화재의 가치를 강조하는 추세다. - 프랑스 1994년 ‘예술의 거장’ 지정 - 중국 2004년 비물질문화유산 제도 실시 - 유네스코 2003년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 채택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통공예는 큰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전통공예품에 대한 수요가 급격하게 줄고 있다. 이제 전통공예는 일상과는 상관없는 일부 장인들의 기술일 뿐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장인들에게 가장 큰 고민은 기술의 전승이다. 가족이나 소수의 제자들을 통해 전승을 하려하지만 열의를 가지고 배우려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전통기술로는 넉넉한 경제생활을 하기 어려운 현실 때문이다. 송방웅 / 중요무형문화재 10호 나전장 배우려고 하지 않는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키우려고 노력해봅니다만 그게 쉽지 않데요. 배우는 사람은 자꾸 줄어들고 지금 하는 사람들은 나이가 많다보니까 손을 놓게 될 테고 걱정이죠. 정춘모 / 중요무형문화재 4호 갓일 만들기도 30년, 20년 이상 배워야 하니까. 그게 안 되니까. 아무도 안 배우니까. 돈이 안 되니까 안 배우고, 배우기 힘들어서 안 배우고. 그래서 뭐 이렇게 자칫하면 끊어지게 생겼으니까요. 오랜 전통문화를 가진 나라들 대부분이 같은 고민을 갖고 있다. 가나자와는 일본 전통공예 중심지 중 한 곳이다. 야나이 아츠코 / 이시가와현립 전통산업공예관 관장 이것은 완전히 전통적인 무늬를 대담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카가유젠(전통 염직법)의 독특한 기법을 사용한 운동화입니다. 매우 정교하게 색이 들어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쪽의 전통적인 학 무늬입니다. 무척 아름답죠. 이걸 신는 것은 조금 아까울 수도 있지만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이곳의 전통공예관은 여러해 전부터 전통과 현대를 잇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올해의 프로젝트는 젊은이들이 즐겨 신는 신발에 전통공예 기법을 접목하는 것. 이를 위해 전통염직물(카가유젠), 전통 자수와 장식, 도자기, 유리공예 등의 장인들을 초빙했다. 야나이 아츠코 / 이시가와현립 전통산업공예관 관장 전통공예는 옛날 것, 오래된 것, 알기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젊은 사람들 사이에 있습니다. 또 젊은 사람들이 ‘쓰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전통공예품도 좀처럼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그럼 보통 (젊은이들이) 항상 사용하는 것은 뭐냐?’ 신발밖에 없죠. 처음엔 많은 전통공예장인들이 회의적이었지만 작업을 끝낸 후에는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주최 측은 내년에는 더욱 다양하고 재미있는 신발작품들이 만들어질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가나자와시는 몇 가지 점에서 통영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 17세기 이 지역 유력가문이 갑옷과 무기 등을 만들고 수선하기 위해 공방을 설치한 것이 가나자와 공예전통의 시작이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많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를 배출한 문화유산 거점이다. 가나자와의 중요 전통공예품으로는 가나자와 금박과 가나자와 칠기, 자수, 가가유젠 이라 불리는 비단염색 등이 있다. 가나자와시는 이러한 자신들의 전통공예문화를 지키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결과 2009년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공예분야 ‘창의도시 네트워크’에 선정됐다. 무라카미 준 / 가나자와 우타쓰야마 공예공방 부관장 가나자와라는 지역의 특색을 앓지 않도록. 가나자와는 원래 귀족문화, 무사문화로 4백 여전 전에 시작되었으므로 그것을 잃으면 도시의 색깔이 없어지기 때문에. 시에서 운영하는 우타쓰야마 공예공방. 이 곳은 ‘창조를 짊어질 젊은 일꾼을 육성한다’ 라는 슬로건을 내세운다. 도자기와 염색, 금속공예 분야에서 전통기술을 습득한 소수의 젊은이들을 선발해 3년간 무료로 최신 작업시설을 사용하게 하는 제도다. 가나자와시는 이들에게 매달 약100만원의 장려금과 외부 강사 등을 지원해준다. 조건은 전통 공예기술을 이용해 현대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무라카미 준 / 가나자와 우타쓰야마 공예공방 부관장 옛 방식만 고집해서 지금의 생활양식이나 취향에 맞지 않는 것을 계속 만들면, 발전을 하지 못하고 도태됩니다. 장인도 생활을 할 수 없게 되는 거죠. 역량 있는 장인들을 선발해 도심의 빈집을 공방으로 제공하는 것도 시의 주요사업 중 하나다. 1년 전부터 이곳에서 작업하는 마에다는 대학에서 전통 공예기법을 배워 작가활동을 하다 이곳에 입주했다. 그녀가 사용하는 공예기법은 카가상감기법이다. 마에다 마치코 / 상감공예 작가 (상감기법은) 일본에는 고분시대(4~7세기)에 들어왔는데요. 가나자와에는 에도시대에 들어와 그 때부터 계속되고 있는 기법입니다. 전통기법을 사용하지만 만드는 물건들은 모두 현대적인 장신구들이다. 시는 작품의 홍보와 판매도 적극적으로 돕는다. 전통상감기법은 10년 전만 해도 가나자와에서 단절될 위험이 있었지만 지금은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마에다 마치코 / 상감공예 작가 디자인은 점점 새로운 것을 만들 필요성이 있지만 기술적인 부분은 반드시 예전 방식 그대로 기본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비교하는 것은 어렵지만 ‘전통적인 것 안에 새로운 것이 있다’라는 평가를 들으면 매우 기쁩니다. 후루타는 가나자와의 옛 장인들이 무사들의 갑옷을 만들었던 금속공예기법을 이용해 아주 특별한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24살 청년이다. 어느 날 잡지에서 우연히 마주친 에도시대의 지자이 오키모노란 금속공예품들이 계기가 되었다. 지자이 오키모노는 18세기경 갑옷과 무기를 만들던 옛 금속장인들이 전쟁이 끝나면서 일거리가 없어지자 생업을 위해 만들기 시작한 철제 조형품이다. 일본에서도 거의 잊혔던 지자이 오키모노는 그에게 금속공예의 매력을 알게 해주었다. 후루타 코야 / 금속공예 작가 (지자이 오키모노는) 일본에서도 최근까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고 대부분 해외로 반출되었습니다. 운명의 만남이라고 할까요. 이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 나도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금속으로 이런 것을 만들 수 있구나 라는 생각에서 이런 작품을 만들자고 생각했습니다. 후루타가 주로 만드는 작품들은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들. 일본의 현대 애니메이션 요소를 가미해 젊은층의 반응이 좋다고 한다. 철제 무기에서 에도시대의 지자이 오키모노로, 다시 현대적 감각의 멸종위기 동물들로.. 후루타의 작지만 의미 있는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 전통과 현대를 결합하고 전통의 맥을 잇는 것은 하루아침에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통영시는 300년간 조선수군의 본거지였던 통제영 복원 사업에 한창이다. 통영의 자랑인 12공방 복원사업도 이루어졌다. 매주 주말과 특별한 행사기간 중에는 12공방의 후예라 할 무형문화재 장인들이 통제영의 공방에 나와 전통공예기술을 시연한다. 대중들에게 우리 전통공예의 가치를 알리고 ‘통영브랜드’의 영광을 다시 한 번 되살리려는 목적이다. 통영의 전통공예 기술과 현대적 디자인을 접목하려는 의미 있는 시도도 있었다. 통영시와 한 디자인업체가 함께한 이 프로젝트에 통영의 장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송방웅 / 중요무형문화재 10호 나전장 그렇죠. 이 기법은 전통이지만 디자인 형태라든지 그런 변화되는 것은 현대적으로 변화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죠. 옛날 것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 생각이 드는데. 하지만 전통과 현대의 첫 만남은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장인들과 디자이너들 간에는 쉽게 메울 수 없는 인식의 간극이 있었다. 또한 이런 의미 있는 시도가 두해 만에 중단된 것도 아쉬운 일이다. 송방웅 / 중요무형문화재 10호 나전장 나전공예는 고려시대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의 민족공예로 내려왔기 때문에 너무 현대 쪽으로만.. 아 갓 쓰던 사람들이 갑자기. 무슨.... 그건 좀..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전통을 한다고 해서 그런가는 몰라도.. 너무 현대 쪽으로 기울다가는.. 조대용 / 중요무형문화재 114호 염장 우리는 고정관념이 어느 정도 있어가지고 (현대 디자이너와) 잘 안 맞는 그런 게 있는데. 디자이너들이 획기적인 분들이 매치가 되어 지면 또 좋은 작품이 안 나올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런 것들이 연결되리라 보고요. 전통과 현대의 조화로운 결합을 찾아내 일상 속에서 더욱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 그것이 귀중한 전통 통영십이공방이 가야할 미래다. 고향 통영을 무척 사랑했던 작가 박경리. 그의 작품 속엔 아름다운 공예품을 만들어내던 십이공방에 대한 이야기가 유독 많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바다에 나가서 생선 배나 찔러먹고 사는 이 고장의 조야하고 거친 풍토 속에서 그처럼 섬세하고 탐미적인 수공업이 발달되었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다. 바닷빛이 고운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노오란 유자가 무르익고 타는 듯 붉은 동백꽃이 피는 청명한 기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이 아름다운 남해안 바닷가엔 아름다운 공예품들을 만들어내는 장인들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