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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I I801:1807001-001-V00002
제목 위대한 유산 시즌1 - 2편 - 종묘, 공주 공산성, 경복궁
콘텐츠 유형 동영상 언어정보 국문
생산자 정보
생산자 정보
생산자 생산일자
한국문화재재단 2014-12-31
기여자 정보
기여자 정보
역할 정보 기여자 명
제작사 SKY A&C
조연 이성현
기술 정보
기술 정보
기술 영역 기술 내용
기타정보
내용정보 사적 제125호 종묘, 사적 제12호 공주 공산성, 사적 제117호 경복궁, 국보 제223호 경복궁 근정전, 국보 제224호 경복궁 경회루
역사정보 ,
인물정보 선조, 윤방, 광해군, 의자왕
지리정보 서울특별시 종로구,충청남도 공주시
관련 키워드 ;종묘;신주;공주 공산성;갑옷;마갑;경복궁;위대한 유산;가을밤;
내용 우리 전통유산의 아름다움을 쉽고 재밌게 소개하는 <위대한 유산>
우리나라 곳곳에서 살아 숨쉬는 문화유산들을 소개해본다.
- 7분다큐 '종묘 2부 신주를 사수하라'
- 발굴스토리 '어긋난 수신호, 비밀의 문을 열다 - 공주 공산성'
- 이미지문화유산 '경복궁의 가을밤, 빛으로 물들다'
대본 정보 이성현 우리 전통 유산의 아름다움을 쉽고 재밌게 소개하는 <위대한 유산>
두 번째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오늘도 역시 재밌는 전통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 준비돼있는데요.

먼저, 한국의 전통 미술과 건축물에 얽힌 이야기를
7분동안 깊이 있게 담아낸 <7분다큐> 순서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국내 최대의 목조건축물, 종묘 정전을 만나볼 텐데요.
이 종묘 안에는 전쟁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가던 순간에도
목숨 걸고 지킨 것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종묘에 모셔진 신주인데요
최악의 난세에도 버릴 수 없었던 종묘와 신주에 담긴 의미를 만나보시죠

#자막, 음성
> 1623년 3월 12일.

도성 한양에 불이 났다.

불길을 본 광해군은 왕조를 뒤엎는 혁명이 일어났다면 종묘를 불태웠을 것이고, 단순히 나를 왕위에서 내쫓기 위한 반정이라면
종묘는 무사할 것이라 말했다.

자막> 왕조가 망한 것이라면(易姓)
종묘에 불을 지를 것이고
폐립(廢立)이라면
종묘는 무사할 것이다
- 광해군 -

창경궁 바깥쪽에 난 불을 잘못 본 내시가 종묘에 불이 났다고 아뢨다. 그 말을 들은 광해군은 왕조가 망한 것을 탄식하며 북문으로 도망쳤다.

자막> 타이틀 “신주를 사수하라”

조선 500년 영욕의 역사. 종묘 역시 그 역사와 함께 했다.

자막>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4월. 왜군은 파죽지세로한양을 향해 행군하고 있었다. 궁궐과 백성을 버리고 피난가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조가 목숨 걸고 지킨 것은 종묘에 모셔졌던 선대왕들의 신주였다.

하지만 개성에 도착해서는 신주를 모시는 일마저도 쉽지 않았다.
왜군이 목전까지 당도한 상황.
한분 한분의 신주를 모두 모시기에는 50여필의 말로도 부족했다.
결국 왕가는 개성 목정천 주변 땅에 신주를 묻고 평양으로 출발한다.

왜군이 점령한 땅에 남겨두고 온 신주.
선조에게는 나라의 혼을 두고 온 듯, 느껴졌을 것이다.

자막+지도> 한양, 개성, 평양

결국 선조는 신하를 다시 개성으로 보내 신주를 찾아오게 한다.
명나라로 망명 가느냐, 마느냐 선택의 기로에 선 순간까지도 신주만은 지키려 했던 것이다.

전란 속, 왕가의 노력으로 신주는 무사히 지켜졌지만 종묘는 그렇지 못했다.

한양을 점령한 왜군들은 종묘를 주둔지로 삼았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밤바다 신실에서는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괴성을 지르고
피를 토하다 죽어가는 왜군 병사들이 생겨났다.이런 일이 계속되자, 왜군은 종묘를 송두리째 불태워 버린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돌아온 한양. 선조는 잿더미가 된 종묘 앞에서 통곡했다.
전란 후, 왕조가 가장 먼저 착수한 사업은 종묘의 복원이었다.
임금이 머무르는 어떤 궁궐보다도 종묘가우선이었다.

외적의 침입이 계속되면서 종묘와 신주의 수난사도 계속됐다.

병자년, 노도처럼 밀려오는 청나라 군사를 피해 신주는 한양에서 강화도로 옮겨졌으나,
강화도마저 점령당하자 인조는 신주를 강화 땅에 숨긴다.

자막+지도> 한양, 강화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만 몇 개의 신주가 훼손되고 만다.
인순왕후와 문정왕후의 신주는 깨어졌고, 잃어버린 신주도 있었다.

자막> 인순왕후 신주는 잃어버렸고
문정왕후 신주는 상해서 깨졌으며
잘못하여 잃기도 했다.
-연려실기술 中

모셔 올 때의 수난은 더했다.
당시 책임자였던 윤방은 청군의 수색을 피하기 위해 걸레 속에 신주를 숨겼는데, 이 죄로 귀양까지 가게 된다.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신주를 잘못 모신 것은 대역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정이 있던 날 새벽, 종묘에서 불이 났다는 말에 광해군은 왜 궁 밖으로 도망쳤을까?

임진왜란 후 소실됐던 종묘의 재건이 이루어진 것은 광해군이 즉위한 해였다.

자막> 광해군 원년(1608년) 종묘 재건

광해군은 종묘를 다시 세우면서 조선 왕조의 적통을 잇고, 국가의 기틀을 바로 세웠다.

광해군에게 종묘는 전란 속에 다시 세운 나라, 조선 그 자체였던 것이다.
종묘와 종묘에 모셔진 신주는때론 왕실을 넘어서 국가 전체를 상징해왔다.
한양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진 뒤, 종묘가 가장 먼저 들어선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자막+지도> 종묘, 경복궁

태조는 한양에 왕의 거주공간이자 통치공간인 경복궁보다도 종묘를 먼저 세웠다.
종묘는 선대왕들의 혼을 모신 공간이었으며,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조선을 개국하고 이끌어온 강력한 힘, 그것이 바로 종묘였다.

전란으로 인해 피난길에 오르면서도 왕조는 이곳에 모셔진 정신만은 지키려 했다.
궁궐은 없어져도 종묘는 보존돼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에게 종묘는 국가를 넘어선 그 이상의 공간이었다.

(2)
이성현 이번 순서는 역사적인 문화유산이 비밀스런 베일을 벗는 과정을 다룬
<발굴스토리> 입니다.

2011년, 백제의 수도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공주 공산성에서
백제사의 비밀을 푸는 단서가 될 갑옷 조각이 무더기로 발견됐는데요.
갑옷 조각이 나타난 것도 놀랍지만,
발견 과정의 기막힌 사연으로 고고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고 합니다.
2011년 공산성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백제의 수도 공주를 수호하기 위해 세워진 공산성, 2011년 이 곳에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유물이 발견됐다.

#자막, 음성 #발굴단 및 관계자들 인터뷰
> 이남석:
> 공산성에서 옻칠 갑옷이 나온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죠.
찰갑옷이라는 것은 조각인데, 이게 왜 여기서.. 이런 게..
동아시아에선 처음 있는 일입니다. 아니, 세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죠.

가죽에 옻칠을 한 갑옷조각이 천편이 넘게 발견된 것이다.
이 갑옷이 그 유명한 백제의 황칠 갑옷인 것일까?

자막> 타이틀 “어긋난 수신호, 비밀의 문을 열다. 공주 공산성”

잃어버린 백제사, 그 비밀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자막> 공주 공산성 / 사적 제12호

64년간 백제의 도읍지였던 공주를 수호하기 위해 축조된 공산성
서기 660년, 백제의 멸망을 가져온 공산성 전투로 유명한 곳이다.

해발 110미터, 둘레 2450미터로 축조된 이 성에서 백제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이 신라와 당연합군에 의해 최후를 맞았다.

이 공산성에 언제부터 마을이 형성돼 왔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백제의 왕성 자리에 들어선 마을을 언제까지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막, 음성 #인터뷰
> 이현숙 / 공주대학교 박물관 학예사
> 원래 공산성안에서 성안마을은 가장 넓은 지역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거든요.
그래서 그냥 놔두는 게 아니라 활용을 하는 방법에서는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이 성안마을에 백제 역사민속촌을 만들어서
좀 더 공산성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활용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동안 공산성을 중심으로 백제의 흔적 찾기가 계속돼 왔지만 뚜렷한 유물이 나오지 않아 애를 태우던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성안마을을 역사민속촌으로 만들기로 하고 이곳에 있던 민가를 이주시킨다.

마을이 사라지자 넓은 터가 드러났다.
뒤로 산을 놓고 앞으로 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의 지형.
방어를 위해서는 천혜의 조건이지만 문제는 배수였다.

발굴팀은 백제시대에도 이 지형에 물이 가장 많이 몰렸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성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 성벽 안쪽에 저수시설을 만든다는 점에도 착안했다.
그렇다면 이 지역에 저수시설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민속촌 공사에 들어가기 전, 혹시나 해서 마지막으로 해보는 조사였다.
혹시 뭔가 있다면 저수시설로 추정되는 바로 이곳에 있지 않을까, 굴삭기가 동원됐다.
그러나! 저수시설이 있을 거란 예상은 빗나갔다.
파도 파도 나오는 건 그저 모래뿐
이미 땅속으로 6미터는 들어온 지점, 더 파 들어가면 안전문제가 생길 터였다. 아쉽지만 결단을 내려야했다.


#자막, 음성 #인터뷰
> 이현숙 / 공주대학교 박물관 학예사
> 여기는 백제 시대 유적이 살아 있지 않은가 보다 생각 해서 조사를 멈춰야겠다. 그런데 너무 속상하잖아요.
그래서 굴삭기로 작업을 하는데 그만 멈추자 (했죠)
그런데 일반적으로 굴착기에게 하는 수신호에 멈추라는 신호는 원래 주먹을 쥐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저희가 너무 속상하니까. 그만 두시라고 손을 위로 뻗었는데
이 수신호가 잘못 인식된거에요.


발굴단과 포크레인 기사의 어긋난 수신호.
멈추라는 것을 더 파라는 것으로 알아 들은 포크레인 기사는 1미터 깊이의 땅을 훅~ 퍼냈다.

그러자- 7미터 깊이에서 갑자기 물이 솟아올랐다. 고대하던 벌 층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무더기로 나온 밤껍질, 복숭아씨도 있었다.
드디어 1400여년전 숨겨져 있던 백제의 속살이 드러난 것이다.
쉽게 부패되는 유기물이 이렇게 온전하다면 또다른 것을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드러났다.
저수시설이 있을 거라 예상한 곳에서 저수시설을 발견하지 못한 반면, 물길을 막기 위한 축대의 존재가 드러났다.
또 하나, 성 벽 안 저수시설의 위치도 새롭게 확인됐다. 그렇다면 이 곳엔 우리가 잃어버린 백제의 무엇을 감추고 있을까.
그러나 발굴은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천년넘게 퇴적된 토층이라 발은 진흙속에 빠지고, 땅을 파면 물이 솟아올랐다. 양수기가 동원됐지만 솟구치는 물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거기에다 그해 가을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솟구치는 물만도 어마어마한데, 폭우엔 아예 속수무책이었다.
그야말로 물과의 전쟁! 행여 드러난 유구가 손상될지 않을까. 발굴단은 오로지 그 걱정 뿐이었다.

한바탕 폭우가 휩쓸고 간 어느 날, 그 날도 발굴단은 진흙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엉켜있는 진흙 속을 조심조심 조사하는데.
진흙속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그것은 갑옷조각이었다!

가죽편에 열 번이상의 옻칠을 해서 철처럼 견고하게 만든 후 그것을 조각조각 이어 만든 옻칠 비늘갑옷!
그야말로 백제기술의 집약체였다. 그런 갑옷편이 무려 천조각이 넘게 발견됐다.

갑옷 한 벌을 온전하게 복원할 수 있는 양이었다.

놀란 가슴을 겨우 겨우 진정하고 계속해서 진흙을 털어내는데,
어두운 진흙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선명한 붉은 빛깔,

옻칠 갑옷엔 붉은색 명문이 적혀 있었다.
갑옷의 글자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온 건 ‘정관 19년’!

자막> 정관 19년

이는 서기 645년, 의자왕 5년이었다.

자막> 645년,
- 의자왕 5년

정확한 년대를 파악할 수 있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자료였다.
놀랄 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옻칠 갑옷이 출토된 바로 그 자리 그 밑에서 또 다른 갑옷이 발견됐다.
말을 보호하는 갑옷, 마갑이었다.

이 뿐인가 옻칠갑옷과 말갑옷 사이 철로 만든 찰갑이 곱게 말린 채 놓여 있었다.
세 개의 갑옷이 차곡차곡 놓여있었던 것.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묻은 것으로 보여졌다.
불탄 흔적이 있는 기와. 그리고 화살촉도 무더기로 발견됐다.
그렇다면 갑옷과 불탄 흔적 사이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 것일까

#음성 #인터뷰
> 이남석 / 공주대학교 박물관장
> 특히 그 유물과 함께 거기에 전쟁 흔적이 있었거든요.
불에 탄 흔적이랑 화살촉들로 난장판이 된 그런 흔적이 있었거든요.
그러데 그 흔적자체로 봐서,
백제 말기 멸망할 때 즈음에 의자왕이 그냥 항복을 한 것이 아니라
큰 전쟁이 있었다는 것이 새롭게 인식되거든요.

660년 백제의 멸망은 의자왕이 닷새만에 무기력하게 항복했다는 이야기로 전해져왔다.

자막> 공산성 수문장 교대식

그러나 이 유물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해준다.
이 공산성에서 의자왕은 마지막까지 항거를 하지 않았을까.
역사적 추정이 그것이다.

#음성 #인터뷰
> 이현숙 / 공주대학교 박물관 학예사
>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와 실제 남아 있는 역사가 고고학을 통해서 이렇게 찾아질 수 있는 역사.
이런 것들이 서로 보완을 해나간다면
우리가 의도치 않게 왜곡되어 알고 있는 역사를 좀 더 올바르게
찾아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현장이었던 것 같아요.

발굴단과 굴삭기 사이에 어긋난 수신호.
1400여년 전 백제사를 품은 비밀의 문은 그렇게 우연인 듯 열렸다.


(2)
이성현 재미있는 전통예술 이야기 <위대한 유산> 함께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순서는, 우리 문화유산의 감동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전하는 <이미지 문화유산> 인데요.
오늘은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제일의 법궁,
경복궁을 찾아갑니다.

태조4년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처음 세운 궁궐,
큰 복을 빈다는 뜻에서 경복궁이라고 이름 지어졌다고 하는데요.
그 깊은 의미 만큼이나 많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 곳.
경복궁의 아름다운 밤 풍경을 함께 감상하실까요?


자막> 타이틀 “경복궁의 가을밤, 빛으로 물들다”

자막> 광화문: 경복궁의 정문

자막> 문화재청은 봄과 가을, 일 년에 두 차례에 걸쳐
궁궐의 아름다운 밤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야간 개방을 실시

자막> 근정전(국보 제223호)
경복궁의 으뜸 전각인 법전으로,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

자막> 경회루(국보 제224호)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

자막> 평소에는 볼 수 없는 궁궐의 아름다운 밤 풍경을 감상하며
궁궐의 가치를 되새겨 볼 수 있는 기회로 많은 시민들이 참여

자막> 깊어가는 궁궐의 가을밤
경복궁, 빛으로 물들다


(ENDING)
이성현 문화재청에서는 이처럼 궁궐의 아름다운 밤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매년 봄, 가을이면 야간 개방을 하고 있는데요.
우리 고궁의 색다른 매력을 느껴보고 싶다면,
쾌청한 가을밤 경복궁을 한번 방문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흥미로운 이야기로 함께한 우리 문화유산과의 만남,
오늘 준비한 소식은 여기까지이고요,
저는 여기서 인사드리겠습니다.
함께해주신 시청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자막> 다시보기 안내 : 본 프로그램은 문화유산채널(www.k-heritage.tv)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