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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
UCI I801:1807001-002-V00030
제목 위대한 유산 시즌3 - 13편(소수서원, 도동서원)
콘텐츠 유형 동영상 언어정보 국문
생산자 정보
생산자 정보
생산자 생산일자
한국문화재재단 2015-12-31
기여자 정보
기여자 정보
역할 정보 기여자 명
제작사 SKY A&C
조연 이성현
기술 정보
기술 정보
기술 영역 기술 내용
기타정보
내용정보 사적 제55호 영주 소수서원, 사적 제488호 달성 도동서원, 보물 제350호 달성 도동서원 중정당ㆍ사당ㆍ담장 , 보물 제1402호 소수서원 문성공묘, 보물 제1403호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 국보 제111호 안향 초상
역사정보 ,
인물정보 주세붕, 안향, 주자, 허목, 이황, 김굉필, 정구,
지리정보 경상북도 영주시,대구광역시 달성군
관련 키워드 ;위대한 유산;소수서원;도동서원;;안향
내용 우리 전통유산의 아름다움을 쉽고 재밌게 소개하는 <위대한 유산>
우리나라 곳곳에서 살아 숨쉬는 문화유산들을 소개해본다.
- 7분 다큐 '소수서원 조선 최초의 서원을 가다'
- 7분 다큐 '도동서원 1부 선비의 길, 선비의 세상'
- 7분 다큐 '도동서원 2부 야외 조명 시설의 비밀'
대본 정보 <위대한 유산 시즌3>
 
위대한 유산 13화

타이틀 - sky A&c 문화유산채널 공동 기획 위대한 유산
 
▣ 이성현 / 스탠딩
 
우리 전통유산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쉽고 재미있게 전하는 <위대한 유산>
안녕하세요 이성현입니다.

자막> 이성현/진행 

자막> 학문을 사랑한 선비의 시대 조선

우리 역사를 통틀어 조선시대만큼 학문을 사랑하고
중요하게 여겼던 시기가 또 있을까요?
 
선비 정신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교육시설이 전국 곳곳에 생겨났는데요.
그 중 하나가 서원입니다.
 
자막> 조선시대 학문연구가 꽃 핀 서원

특히 조선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은
가뭄으로 민생이 어렵던 중에도 무리해서 지었을 정도인데요.

자막> 소수서원 / 중종 때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 군수로 새로 부임한 주세붕이 성리학자인 안향을 기리기 위해 설립

이토록 서원이 중요하게 여겨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선시대 서원의 시작, 소수서원으로 가보겠습니다.

자막> 조선시대 선비의 흔적을 찾아서
 
 
▣7분 다큐 
 
타이틀 >7min documentary
타이틀 >7분 다큐
 
소백산 기슭 경북 영주시에 위치한 소수서원. 조선 후기 전국 각지에 세워져 숱한 젊은이들의 배움터가 되었던 서원. 그 위대한 시작이 바로 이곳 소수서원이었다.
 
타이틀> 소수서원 조선 최초의 서원을 가다
 
자막> 소수서원(사적 제55호)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수서원의 입구를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강학당’이다.
 
자막> 강학당 / 보물 제1403호
 
이곳은 학생들이 모여 성리학의 경전을 읽거나, 강의를 듣던 장소인 강당이었다. 강학당 바로 옆엔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자막> 문성공묘 / 보물 제1402호
 
강학당보다 먼저 세워진 건물. 그래서 서원은 교육기관인 동시에 종교기관이라 평가된다.
 
자막> 주세붕(1495~1554) 조선 중기의 문신
 
이 서원은 1543년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세웠다. 그때 이 일대는 극심한 가뭄이 들어 기근이 번져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세붕은 서원을 세웠다.
 
자막> 기근이 심함에도 불구하고 서원을 세우는 목적은 교화가 구근보다 급한 것이며 - 죽계지 -
 
서원을 세우는 것이 기근을 구하는 것만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화. 주세붕은 무엇을 교화시키려 한 것일까. 그 해답은 이 사당에서 찾을 수 있다.
 
자막> 문文 도덕을 겸비하고 학문을 널리 닦았다
자막> 성成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정사를 확립하였다
 
사당에 모셔진 위패는 이곳이 문성공을 기리는 곳임을 알려준다. 문성공. 이것은 고려의 성리학자 안향의 시호다.
 
자막> 문성공 회헌 안향 위패
 
‘고려의 주자’라고도 불리는 안향은, 송나라의 주자학을 처음으로 고려에 전파한 학자다.
 
자막> 안향(호는 회헌) 경북 영주 출신으로 고려 말기 불교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주자학을 도입ㆍ소개하여 유학 발전에 크게 기여함
 
우주의 근본원리와 인간의 심성문제를 탐구하는 그의 학문은 이색과 정몽주로 이어지고, 이황과 이이에서 완성되어 간다.    
 
자막> 교화는 반드시 성현을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므로 사당을 세우고 서원을 만드는 것이다. - 죽계지 -
 
주세붕은 바로 이 성리학의 보급을 위해 소수서원을 세운 것이다.
 
자막> 영정각 유교 성현의 영정을 모아놓은 곳
 
소수서원의 서당 뒤쪽에 세워진 영정각. 영정각은 유교성현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다.
 
자막> 주자(1130~1200) 남송의 유학자로 주자학을 집대성한 인물
 
중국 송나라때 유교철학을 집대성해 주자학을 탄생시킨 주자로부터 조선 성리학의 시조 문성공 안향.
 
자막> 문성공 회헌 안향 초상 / 국보 제111호
 
송시열과 함께 17세기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였던 미수 허목의 영정도 보인다.

자막> 문정공 미수 허목 영정 조선시대 문신이자 학자
 
위대한 학자들에게 예를 표하고 그들을 기리는 것이 학문의 시작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막> 죽계천
 
소수서원의 동쪽엔, 북에서 남으로 유유히 흘러가고 있는 죽계천이 있다. 학생들이 학업에 힘쓰는 한편,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사랑받던 곳이다. 그런데 이곳 죽계천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자막> ‘ 경’자 바위

일명 ‘경자바위’. 바위에 새겨진 ‘경’자는 주세붕이 서원을 창건하며 새겨 놓은 것이라 전해진다.
 
자막> 敬天愛人(경천애인)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함
 
성리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첫 번째 덕목. 그것이 바로 ‘경’이었다.
 
자막> 취한대
 
소수서원의 여러 학생들은 이곳 죽계천에 나와 사색을 즐기고 토론도 하며 학문을 연마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경’자바위에는 또 하나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퇴계 이황이 쓴 백운동.

자막> 백운동

바위에 새겨진 ‘백운동’이란 글씨는 서원안에 있는 건물, 강학당에서도 발견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곳에 왜, 백운동이란 글씨가 보이는 것일까. 백운동. 이것은 소수서원의 첫 이름이었다.
 
자막> 주세붕이 안향의 옛 집터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며 이름을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이라고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중종36년 -
 
1543년, 주세붕이 지은 이름 백운동서원. 서원을 둘러싼 골짜기에 항상 흰구름이 흐른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백운동 서원이 큰 변화를 맞게된 것은, 당시 풍기군수였던 이황의 노력덕분이었다. 
 
자막> 퇴계 이황(1501~1570) 조선시대 문신이자 학자
 
이황은 지방교육을 책임지던 관학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무너진 관학을 대신할 새로운 교육기관으로 백운동서원을 주목하고 왕에게 상소를 올린다.
 
자막> 편액과 서적, 토지, 노비 등을 내려준다면 유생들이 기뻐해 열심히 공부를 할 것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명종5년 -
 
자막> 소수서원
자막> 소수紹修 무너진 학문을 다시 세운다
 
결국 명종은 이황의 요청을 받아들여 소수서원이란 이름을 내렸다.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으라’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

자막> 명종의 친필

더욱이 명종은 친필 글씨까지 내림으로써 이후 국가공인 교육기관으로 자리잡게 된다. 조선시대 서원의 본격적인 출현을 알린 소수서원. 국가의 지원을 받는 새로운 교육기관으로 탈바꿈하면서, 조선후기 서원을 중심으로만 새로운 학문의 디딤돌이 되었다.
 
 

타이틀 - sky A&c 문화유산채널 공동 기획 위대한 유산
 
▣ 이성현 / 스탠딩
 
현인의 뜻을 담아 세우는 서원.

자막> 서원 곳곳에 깃든 현인의 가르침

때문에 서원을 지을 때는 근본이 되는 가르침을
건축에 반영하기도 했는데요.
 
그 특징이 잘 나타나는 것이 바로 도동서원입니다.

자막> 사림 시대의 시작 / 도동서원에 담긴 철학은?

사림시대를 열었던 조선의 문인 조광조가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지은 도동서원.
그 안에 깃든 선비의 큰 뜻을 함께 느껴보시죠.
 
 
은행나무는 400년 넘는 세월 동안 이 자리를 지켜 왔다. 어른 다섯이 두 팔을 뻗어야 간신히 안을 수 있는 거대한 나무를 사람들은 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

자막> 김굉필 나무

김굉필 나무. 도동서원의 이야기는 한 그루의 은행나무로부터 시작된다.
 
타이틀> 도동서원 1부 선비의 길, 선비의 세상
 
어머니를 잃은 연산군의 분노는 죄 없는 선비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한훤당 김굉필. 갑자사화 때 목숨을 잃은 조선 최초의 사림이었다.
 
자막> 김굉필(1454~1504)
 
하지만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유배지에서 김굉필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 조광조는 스승의 뜻을 이어 사림의 시대를 열었다. 강당 기둥에 둘러진 흰색 한지. 오직 도동서원에서만 볼 수 있는 이 표식은 동방오현 중에서 가장 으뜸 되는 선비를 모시고 있단 증거다.
 
자막> 한강 정구(1543~1620)
 
김굉필을 기리기 위해 예학자 정구가 세운 서원에 선조가 내린 이름은 ‘도동’이었다. ‘도학의 대종’이라 불렸던 선비를 모신 서원에 걸맞는 이름이었다.
 
자막> 도동(道東) 도가 동쪽으로 왔다.
자막> 달성 도동서원(사적 제488호)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정구가 서원을 처음 세울 때의 정문은 환주문이었다.

자막> 환주문

당대 으뜸가던 명문서원의 입구라기엔 작고 왜소하다. 1.5m밖에 되지 않는 높이. 낮은 문을 지나기 위해선 누구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낮추고 삼가는 선비의 몸가짐이었다. 정구는 도동서원을 세울 때 모든 건축물에 선비들이 추구하던 이상이 녹아들 수 있도록 했다. 조선 선비들이 추구했던 이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도동서원의 중심 길은 김굉필나무를 시작으로 수월루와 환주문, 사당까지 일직선 상으로 이어져 있다. 한 치 흐트러짐 없는 도도한 길은 선비가 살아야 할 삶이자, 그들이 지켜야 할 곧은 절개였다.
 
자막> 중용(中庸)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아니한, 떳떳하며 변함이 없는 상태나 정도.
 
자막> 중정당 달성 도동서원의 강당(보물 제350호)
 
도동서원에서 또 하나 강조되는 규범은 바로 ‘중용’이다. '중용’이라는 철학적 개념은 도동서원 그 실체를 찾아 볼 수 있다. 같은 옷을 맞춰 입은 듯 맞배지붕을 얹고 찍어낸 듯 외향이 비슷한 건물들. 
 
자막> 동재
자막> 서재
 
우리는 이곳에서 변하지 않는 용의 미덕을 만날 수 있다. 모양은 비슷하지만 건물들은 중요도에 따라 크기가 다르다. 핵심 공간인 강당은 제일 크고 기숙사였던 동재와 서재는 그보다 작다.
 
자막> 달성 도동서원 측면도
 
세상 모든 만물에는 질서가 있고 질서는 조화를 만든다. 그것이 유교의 교리였다. 처마에는 단청을 달지 않았다. 장식을 배제한 처마는 가식을 지양하며 청렴한 삶을 추구했던 선비들의 삶을 재현하고 있다. 한 치 흐트러짐 없는 기개, 진리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 도동서원에는 선비가 가야할 길과 선비가 추구하던 학문이 모두 녹아 있었다.
 
선비의 이상은 건물의 배치와 생김새에도 담겨 있다.
 
자막> 도동서원 전체도
 
도동서원의 건물은 한국 어느 건축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대칭을 만들어낸다. 유생들을 위한 공간은 물론, 노비들이 기거하던 전사청마저 완벽한 대칭을 만들고 있다. 건물에 꼭 필요한 아궁이마저 땅 속으로 숨길 정도였으니, 도동서원에서는 ‘대칭’을 의도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완벽한 대칭이 이루고자 한 바는 무엇이었을까? 치우치치 않고 정확한 중심을 잡았을 때 어디로든 쉽게 현혹되지 않는 진리. 선비라면 마땅히 평생 가져야할 마음가짐을 표현하고자, 도동서원의 건물들은 어디로도 치우치지 않는 대칭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파격은 존재한다. 꽉 짜여진 틀만이 중용은 아니다. 엄숙미 속에서 찾아낸 부드러움 또한 중용이다. 예법에 맞춰 세워진 중정당 건물과는 달리 기단은 자유로운 변형 그 자체다. 서원을 둘러싼 담장도 마찬가지다. 도동서원의 담장은 토담으로선 유일하게 지정된 국가 보물이다.
 
자막> 토담 / 달성 도동서원(사적 제488호)
 
암키와를 놓고 수막새를 엇갈리게 끼워 넣은 담장. 경사를 따라 높낮이를 조절한 담장의 높이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것 역시 음양의 조화를 면밀히 계산한 중용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자막> 김굉필은 평생 한결같게 처신하며 학문을 정자와 주자를 지표로 삼고 일동일정이 조금도 어긋남 없이 중도의 규범을 지켰다.(宏弼 近世大儒也 平生處身學問 一以程 朱爲法  潛心聖學 所得甚高 一動一靜 無或悖違 周旋中規 折旋中矩)- 중종실록 13년 4월 23일
 
평생을 소학동자로 불리며 행동 하나, 생각 하나를 치우침 없이 살아왔던 선비, 김굉필. 쉰의 나이,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으면서도 그는 단 한 번의 물러섬이 없었다. 그에게는 목숨보다 도의를 실천하는 선비의 길이 중요했다. 도동서원에서 학문을 익혔던 후학들 역시 김굉필의 정신을 잊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영원을 꿈꾸며 그 어떤 치우침 없이 만들어진 도동서원은 이 땅에 존재했던 선비들의 꿈꾸던 세상 그 자체로 남아 있다.
 
 
타이틀 - sky A&c 문화유산채널 공동 기획 위대한 유산
 
▣ 이성현 / 스탠딩
 
도동서원에서는 완벽한 대칭 구조 외에도,
독특한 시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야외조명인데요.

자막> 도동서원에는 야외 조명시설이 있다?!

공부방도 아닌 곳에 야간 조명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야심한 밤, 서원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던 것인지,

자막> 서원의 밤을 밝힌 조명의 정체는?

도동서원의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도동서원의 강당. 기름통을 올려 두던 정료대가 서 있다. 사당 앞도 마찬가지. 등잔을 놓고 어둠을 밝히던 석등이 놓여 있다. 사당 곳곳에 놓인 조명 시설들. 깊은 밤, 도동서원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타이틀> 도동서원 2부 야외조명시설의 비밀
 
자막> 달성 도동서원(사적 제488호)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자막> 중정당 달성 도동서원의 강당(보물 제350호)
 
조선에 처음 서원이 설 때만 하더라도 서원의 가장 큰 역할은 교육이었다. 지방 유생들은 배움을 위해 서원을 찾았고, 이곳에서 학문에 매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17세기 들어서면서 서원에는 또 하나의 기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바로 선현들께 올리는 제사였다. 매해 봄, 가을마다 공자를 비롯한 4성에게 석전제를 올렸으며 초하루와 보름마다는 분향례를 치렀다. 제사가 서원에서 중요한 역할이 될수록, 제사의 예법은 서원 건축 속에 녹아들었다. 도동서원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길. 가파른 계단과 좁은 길이 쉼 없이 계속된다. 길의 폭은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날 수 있을 정도. 이 좁은 길을 서원에 기거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야 했으며, 큰 행사가 있는 날에는 그 인원이 수십 수백에 이르기도 했다. 제사가 있는 날이면 유생들은 이 길을 지나기 위해 긴 줄을 만들어야 했다. 원로부터 순서대로 선 줄은 유교의 질서, 그 자체였다. 제사는 유교가 가진 이념을 세속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예식이었으며, 특히 도동서원은 제사를 염두에 두고 조성한 서원이었다. 다른 서원과 달리 중정당 한가운데 불을 밝히는 정료대가 놓인 이유도 이것이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환한 낮에는 조명이 필요 없다. 하지만 제사를 치러야 하는 밤은 다르다. 어둠을 밝혀줄 조명과 조명을 올려둘 시설이 절실하다. 
 
자막> 정료대
 
이러한 까닭에 강당 정 중앙에 정료대를 놓았던 것이다. 
 
자막> 생단
 
제사를 위한 장치는 강당 오른쪽에도 숨어 있다. 생단은 산돼지를 올려놓고 제수로 사용하는데 적합한지, 부정하지는 않은지를 판단하던 곳이다. 
 
자막> 내삼문
 
사당 앞에는 내삼문이라 불리는 세 개의 문이 서있다. 
 
이 중 가운데 문에는 특별한 이름이 붙었다. 오직 신만이 드나드는 문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 신문이다. 사람은 신문을 통해 드나들 수 없었기에 주로 서쪽 문을 이용해야 했다. 서원의 본격적인 제향공간은 사당에서부터 시작된다.
 
자막> 사당 달성 도동서원(사적 제488호)
 
이곳 역시 제사를 위한 조명, 석등이 설치돼 있다.

자막> 석등

어떤 서원도 도동서원만큼 제사를 위한 다양한 시설을 갖추지는 못했다. 그만큼 도동서원이 제사에 충실했단 증거다. 보물로 지정된 사당 벽에도 제사를 위한 시설이 숨어있다.

자막> 차

정사각형으로 난 구멍은 차라고 불리는데,  제문을 태우고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했다. 흩날리는 재와 통풍까지 고려해 만든 특수 설비. 도동서원에서는 담장 하나를 쌓을 때도 제사를 염두에 두고 기억해왔다. 온전한 제사를 치르기 위해선 제기의 관리와 보관 역시 중요했다. 그래서 사당 옆에는 증반소를 만들어두었다.

자막> 증반소

이처럼 도동서원은 제례를 치르는데 아주 작은 불편함마저 없도록 성의를 다한 공간이었다.
 
유교에서 제사는 습관과 의식을 넘어선 그 이상의 것이었다.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철학을 예법이란 그릇에 담아, 현실 속에 실현하는 특별하고 소중한 순간.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서원에서의 제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는 중차대한 행사였다. 평생 선비들이 지켜야 할 예를 연구했던 예학자 정구도 제사의 중요성을 잊지 않았다. 서원에서 석전제와 분향례가 치러지는 동안 한 치 어긋남 없는 예가 실현되는 공간으로 도동서원을 조성해왔다.
 
자막> 한강 정구(1543~1620)
 
긴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도동서원 곳곳에는 제사를 위한 시설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선비들이 세속의 공간을 이상의 공간으로 바꾸고자 수없이 치러졌을 제향의 순간들. 도동서원은 지금도 그 특별한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
 
 
▣ 이성현 / 스탠딩
 
조선시대 인문학이 꽃 피던 선비의 공간, 서원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즐거운 시간 되셨나요?
 
재미있는 문화유산 이야기 <위대한 유산>,
저는 여기서 인사드리면서
다음 시간에도 알찬 내용으로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타이틀 - sky A&c 문화유산채널 공동 기획 위대한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