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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유산X파일_근대건축유산시리즈_고흥 소록도_CHF_1920X1080.mp4 286.15 MB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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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
UCI I801:1808002-001-V00006
제목 애한의 섬 100년의 역사, 고흥 소록도
콘텐츠 유형 동영상 언어정보 국문
생산자 정보
생산자 정보
생산자 생산일자
한국문화재재단 2018-10-05
기여자 정보
기여자 정보
역할 정보 기여자 명
제작사 (주)인디비전
주연 김연수
기술 정보
기술 정보
기술 영역 기술 내용
기타정보
내용정보 등록문화재 제67호 고흥 구 소록도갱생원 감금실, 등록문화재 제66호 고흥 구 소록도갱생원 검시실, 등록문화재 제469호 고흥 순천교도소 구 소록도지소, 등록문화재 제660호 고흥 소록도 마리안느와 마가렛 사택
역사정보 일제강점기, 현대
인물정보 스오원장, 이춘상, 마리안느 수녀, 마가렛 수녀, 마리아 수녀
지리정보 전라북도 고흥군
관련 키워드 근대건축유산;근대건축;문화유산X파일;고흥;소록도;한센병;마리안느와 마가렛 사택;소록도지소;소록도갱생원
내용 ▶애한의 섬 100년의 역사, 고흥 소록도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의 강제 격리는 일제강점기 소록도갱생원이 그 시작이었다. 강제노역과 체벌, 감금....
소록도갱생원은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유린의 현장이었다. 한센병 환자들은 왜 그곳에 격리되고 감금되어야만 했을까?

▶ Why?
- 왜 한센병 환자들을 이곳에 감금했을까?
- 소록도 중앙공원의 동상은 왜 사라졌을까?
- 두 명의 간호사는 왜 편지 한 장만 남긴 채 떠났을까?

애한의 섬 고흥 소록도에 남아있는 일제강점기 근대건축물을 통해 소록도의 아픈 역사와 마주한다.
대본 정보 Na / 남도의 끝자락, 어린 사슴 모양을 닮았다고 소록도라 불리는 섬이 있습니다. 이제는 소록대교를 건너면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입니다. 고운 이름 너머에 한센병 환자들의 눈물이 배어 있는 섬.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과 상처를 품은 섬, 소록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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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한의 섬, 100년의 역사 / 고흥 소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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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 지금은 섬 바깥과 소록도를 연결하는 도로가 되었지만 50~6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은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과 그 자녀들이 거리를 두고 바라보아야 했던 면회 장소였습니다. ‘수탄장’이라는 이름처럼 근심과 탄식이 오가던 곳이었습니다.

자막 / 수탄장
한센병 환자와 자녀들이 길을 사이에 두고 면회를 하던 장소

Na / 섬사람이 된 부모와 자식은 수탄장에서 만나고 헤어졌습니다. 감염의 우려 때문에 아이는 부모와 헤어져 직원지대 쪽에 있던 보육소에 맡겨졌고, 한 달에 한번 뿐인 면회 때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래전부터 한센병은 신에게조차 버림받은 불치병이라고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환자들에게 병만큼이나 아픔이 됐던 것은 사람들의 편견이었습니다.

자막 / 한센병
나균에 의해 감염되는 감염병
예전에는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으로 알려졌지만
현재는 6개월에서 1년 정도 치료받으면 완치됨

Na /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한센병을 치료가 불가능하여 격리가 필요한 병이라 여겨, 소록도에 99명의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 격리 시켰습니다.

자막 / 1916년 소록도 자혜의원 설립 (조선총독부령 제7호)
1934년 소록도갱생원 명칭 변경
1968년 국립나병원 명칭 변경
1982년 현) 국립소록도병원 명칭 변경
Na / 이후 전국의 모든 한센병 환자를 소록도에 수용하여 해방 직후에는 환자수가 6천여명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소록도는 한센병 환자들의 섬이 되었습니다. 초기의 소록도 자혜의원이 한센병 환자들만을 수용하는 소록도갱생원으로 개편되자, 환자들은 평생을 격리된 채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도 소록도에는 그들의 한과 고통이 서린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자막 / 고흥 구 소록도갱생원 감금실 (등록문화재 제67호)
1935년 건립
일제강점기 한센병 환자를 불법적으로 감금했던 장소

김연수 / 밖에서 보면 담장이 높아서 교도소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안에 들어와도 이렇게 창살이 있습니다. 이 안에 있는 방들을 보아도 시멘트 바닥에 변기만 하나 달랑 있는, 감옥 같은 구조입니다. 여기는 환자들을 수용하는 시설로 알고 있었는데 왜 이런 감옥 같은 장치가 필요한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네요.

Na / 일제강점기 소록도에 강제 수용된 한센병 환자들에게 자행된 인권유린의 현장. 한센병 환자들은 왜 이곳에 감금되어야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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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y ① 왜 한센병 환자들을 이곳에 감금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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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 / 소록도갱생원의 규모가 커지면서 조선총독부는 갱생원 원장에게 막강한 권력을 부여했습니다. 원장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구금과 체벌이 아무런 법 절차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자막 / 조선총독부가 갱생원장에게 환자에 대한 징계검속권 부여
원장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환자를 구금, 체벌

Na /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거나 육지로 도망치다 잡히면 이 감금실에 갇혀 지냈고, 한센병 환자를 근절한다는 명목으로 실시된 정관절제수술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자막 / 고흥 구 소록도갱생원 검시실 (등록문화재 제66호)
1934년 건립일제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의 시신을 해부했던 곳

Na / 한센병 환자가 사망하면 검시실에서 검시 절차를 마친 뒤에야 장례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이 검시대에서 시신의 해부가 이루어졌습니다. 소록도 안에는 조금 특별한 건물이 있습니다.

자막 / 고흥 순천교도소 구 소록도지소 (등록문화재 제469호)
Na / 일제는 전국의 형무소에 일반 수형자와 함께 있던 한센병 환자들을 한곳에 모아 격리하기 위해 순천교도소 소록도지소를 세웁니다. 현재는 여성 수감자들을 수용했던 여사동이 남아있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합니다.

김연수 / 바깥에까지 이렇게 철장을 설치 해놓고...

Na / 소록도의 건물들은 한센병 환자들의 강제노역으로 만든 벽돌로 지어졌습니다. 섬 내부에 필요한 물품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자급자족했던 이유는 외부와의 교류를 단절시키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안창모 /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 문화재위원) 그 모든 것들이 아주 완벽하게 옛날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록도라는 곳은 일제강점을 겪었기 때문에 비극적인 현장이기도 하지만 근대의 잘못된 상식이 사람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아주 비극적인 현장으로서 우리가 중요하게 반성해야 할 지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막 / 소록도 중앙공원
Na / 소록도 중앙공원은 한센병 환자들의 피와 땀이 서린 한의 공간입니다. 환자들은 조경에 사용할 돌과 나무를 나르고 산을 깎는 작업에 동원됐습니다.

자막 /.소록도병원 개원 40주년 기념비
Na / 이곳은 소록도갱생원의 일본인 원장 동상이 서 있던 자리입니다.

김연수 / 동상이 3.3m에다가 단이 9.6m니까 전체는 한 13m 정도 되네요. 굉장히 높네.

Na/ 재임기간 동안 자신의 동상을 세워 소록도 사람들에게 참배하도록 강요했던 스오 원장. 악명높던 그의 동상은 1943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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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y ② 소록도 중앙공원의 동상은 왜 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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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래 / (소록도박물관 학예사) 1943년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전쟁물자가 부족했거든요.

자막 / 전쟁이 지속되자 전쟁물자가 부족해진 일제

조명래 / 그 당시 소록도도 많이 힘들고 궁핍했는데, 소록도에서 소유하고 있던 범종이라든지 각 마을마다 예배당이 있었습니다. 예배당에 있는 종, 당시 세워져 있던 스오 원장의 동상마저도 일제에 의해서 공출되었습니다.

자막 / 스오원장 동상 등 모든 금속이 군수물자로 공출됨
스오 원장의 동상이 철거된 자리에는 이후 소록도병원 개원 4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Na / 태평양전쟁으로 철거되어 사진으로만 남은 스오원장의 동상에는 소록도 사람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동상이 철거되기 전인 1942년, 갱생원의 부당한 대우를 견디다 못한 한센인 환자 이춘상이 스오원장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춘상은 법정에서 스오원장의 만행과 소록도의 비참한 생활을 폭로하고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자막 / 애한의 추모비
해방 후 자치권을 요구하다 참혹하게 희생된 84명의 한센병 환자를 추모
Na / 일제강점기가 끝났지만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을 회복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50년 가까이 지속됐던 강제격리 수용제도는 1963년에야 폐지됩니다.

자막 / 세마(3M)공적비
43년간 소록도에서 환자들을 돌보았던 마리안느, 마가렛, 마리아 수녀를 기린 공적비 세 사람의 이름이 ‘마’로 시작한다고 하여 세마(3M)공적비라 불림
Na / 세월이 흐르고 세상과 단절됐던 섬 소록도에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이들이 찾아왔습니다.

자막 / 마가렛 피사렉, 마리안느 스퇴거
Na / 간호사 자격으로 소록도에 온 오스트리아의 수녀들은 43년간 섬에서 살면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았고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할머니로 늙어갔습니다.

김연수 / 여기 계신 주민분들한테는 어떤 인상으로 남아있습니까?

강선봉 / (소록도 주민) 그냥 어머니 같은 그런 분들이었죠. 내가 있을 때만 해도 환자들을 맨손으로 안 만졌어. 이분들은 와서 그냥 막 만졌어. 약도 그냥 주고... 애들 뭔 그냥 보듬고, 보육소도 맡아서 해주고,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줬어.

Na/ 그랬던 두 수녀가 편지 한 장을 남긴 채 홀연히 소록도를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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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y ③ 두 명의 간호사는 왜 편지 한 장만 남긴 채 떠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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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 / 고흥 소록도 마리안느와 마가렛 사택 (등록문화재 제660호)
43년간 한센병 환자들에게 의료 봉사활동을 한 마리안느, 마가렛 수녀가 거주했던 집

김연수 / 와, 정말... 여기서 글 쓰고 싶다. 가구도 없고 딱 책상 하나만 있고...

Na / 두 수녀는 나이가 들어 사람들에게 부담을 줄 수 없다며 편지 한 장만 남긴 채 아무도 모르게 이른 새벽, 43년간 살았던 소록도를 떠났습니다.

자막 / 나이가 들어 주민 부담 우려 몰래 소록도를 떠난 두 수녀

김연수 / 낮선 이국 땅에 와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환자들한테 일생을 헌신하고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떠나셨다는 얘기가 동화 속에서나 읽을 것 같은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이 집에서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에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Na / 소박하고 검소했던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는 고통과 절망이 가득했던 소록도에 삶의 의지와 희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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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 / 소록호
소록도와 고흥 녹동항을 이어주던 54톤 철선
소록대교 개통으로 2012년 운항 중단
Na / 이 배는 소록대교가 생기기 전 세상과의 유일한 소통로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운행하지 않습니다. 녹동항과 소록도를 잇는 소록대교가 개통되면서 배 없이도 뭍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열리기까지 93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김연수 / 육지에서 해상으로 불과 4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소록도는 이제 더 이상 고립된 섬이 아닙니다. 하지만 100년이 넘는 소록도 핍박의 역사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병보다 더 무서운 편견으로 좁히지 못했던 그 간극을 이제는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자막 / 소록도, 단절과 편견을 극복하고 새로운 동행을 꿈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