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이미지 및 저작권 정보(N2L)
대표이미지 | 저작권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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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 | EBS | ||
전자자원소장처 | 한국문화재재단 | ||
공공누리 저작권 | |||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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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L 정보 | |||
소스코드 | <iframe width="720px" height="480px" src="http://uci.k-heritage.tv/resolver/I801:2006001-001-V00008?t=3"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관련 파일 및 자원정보(N2R)
번호 | 파일명 | 파일크기 | 다운로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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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문화유산여행길_73편_식석기인들이 남겨놓은 수수께끼 선사시대 유적_CHF_1920X1080.mp4 | 204.19 M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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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N2C)
UCI | I801:2006001-001-V000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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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문화유산여행길 73편-신석기인들이 남겨놓은 수수께끼 선사시대 유적 | ||||||||||||||||||
콘텐츠 유형 | 동영상 | 언어정보 | 국문 | ||||||||||||||||
생산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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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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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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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키워드 | 고인돌;신석기;움집;선사시대유적;이음낚시;사람얼굴상;씨족;농사;밭농사;돌추;간돌화살촉;빗살무늬토기;옥귀걸이;일본;중국;요하문명 | ||||||||||||||||||
내용 | 문화재청이 선정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을 중심으로 문화유산의 역사 이야기와 현장을 만나볼 수 있는 10만년 전, 강원도에는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너른 땅 속에 감춰져 있는 유물들을 통해서 강원도의 선사시대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양양 오산리 유적, 고성 문암리 유적,춘천천전리지 석묘군 에서 발견한 유물들을 통해 강원도에 살던 사람들이 농사를 지었고 이에 도움이 될 만한 여러 도구를 만들었으며 재산을 소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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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정보 | 자막> 문화유산코리아 NA) 산이 깊고, 물이 맑은 강원도. 10만 년 전, 강원도엔 지금처럼 사람이 살았습니다. NA) 그들은 바닷가 근처에 살면서 고기를 잡고, 밭을 경작했습니다. NA) 강원도 너른 땅에서, 선사시대 사람들이 남긴 흔적을... 찾아봅니다. 자막> 신석기인들이 남겨놓은 수수께끼 -선사시대 유적 자막> 양양 오산리 유적 사적 제394호 NA)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NA) 이곳에선 신석기 시대의 유적이 다량으로 발견됐습니다. NA) 1977년 주변 호수를 매립을 위해 오산리의 땅을 파던 중 4천여 점의 유물이 우연히 발견된 것입니다. NA) 오산리 유적 발굴은 인근 지역까지 확대되었고 양양, 강릉에서도 선사시대 유물이 발견됐습니다. NA)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이곳에 갈대나 짚으로 만든 움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NA) 움집은 직경 6미터 정도의 평면 원형으로 중앙에는 한 개 또는 두 개의 화덕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NA) 오산리 유적지 옆, 선사유적박물관에는 NA)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재연해 놓았습니다. NA) 오산리의 신석기 사람들은 열매를 채취했고, 흙으로 그릇을 빚었습니다. NA) 이들은 바다 인근에 살면서 커다란 물고기도 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고기를 잡는데 사용됐던 유물도 다량 발견됐습니다. 자막> 이음낚시 NA) 일본에서도 출토된 이음낚싯바늘은 고대 한국과 일본의 교류를 짐작하게 합니다. 자막> 흙으로 빚은 얼굴 NA) 흙으로 빚은 사람얼굴상은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씨족 수호 신상입니다. 자막> 고성 문암리 유적 사적 제426호 NA) 강원도 고성의 문암리 벌판에서는 신석기시대 농경의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NA) 그동안 이 시대에 대한 농경은 화전 농경인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런데, NA) 문암리에서 신석기시대 중기로 추정되는 밭이 발견되면서 당시에도 밭농사가 이뤄졌음이 확인됐습니다. 자막> (사진) 2013년 발굴조사 당시 출처 : 국림문화재연구소 NA) 문암리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밭인 셈입니다. NA) 발굴된 밭은 상하 2층으로 신석기시대 토기 및 석제품 등 천여 점의 유물도 함께 발굴됐습니다. 자막> 국립춘천박물관 NA) 국립춘천박물관에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상과 유물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NA) 강원 지역에 살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강가나 바닷가에서 낚시를 통해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자막> 돌추 NA) 집터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그물추들은 어로 활동이 활발했음을 알려 줍니다. NA) 이들은 또한 활과 화살을 이용해, 동물을 사냥했습니다. 자막> 간돌화살촉 NA) 돌화살촉은 사냥활동을 말해줍니다. NA) 고성 문암리에서는 100여점의 토기와 돌화살촉, 곡식을 갈던 갈돌 등이 출토됐습니다. NA) 토기는 바닥이 평평한 납작밑 토기에서 바닥이 뾰족하고 전체에 무늬를 새긴 빗살무늬 토기 순으로 점차 발전합니다. NA) 가장 주목받는 유물은 옥 귀걸이 한 쌍! 중국 요하문명의 발상지에서 출토된 귀걸이와 흡사한 모양새를 지녔습니다. 자막> 조용환 학예연구사 옥귀걸이가 주목 받았던 것은 재질이 욕이라는 부분과 형태적인 측면이었는데요 이러한 형태의 옥귀걸이는 중국 동북 지역 요녕성에 있었던 홍륭와 문화에서 발견이 됩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사해 유적이 있는데 6천~7천년 전쯤에 만들어졌고 그곳에서 이와 유사한 옥귀걸이가 발견됐습니다 홍륭와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이러한 형태의 옥귀걸이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조용환) 옥귀걸이가 주목 받았던 것은 재질이 욕이라는 부분과 형태적인 측면이었는데요 이러한 형태의 옥귀걸이는 중국 동북 지역 요녕성에 있었던 홍륭와 문화에서 발견이 됩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사해 유적이 있는데 6천~7천년 전쯤에 만들어졌고 그곳에서 이와 유사한 옥귀걸이가 발견됐습니다 홍륭와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이러한 형태의 옥귀걸이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NA) 강원도 춘천시 천전리 현대식 다리와 비닐하우스 사이에 청동기 시대 대표적인 유적인 고인돌이 보입니다. 자막> 춘천천전리지 석묘군 시도기념물 제4호 NA) 강원도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된 천전리 지석묘군입니다. NA) 고인돌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NA) 발굴당시 10기가 있었으나 현재는 5기만 남아있는 상탭니다. 자막> (사진) NA) 천전리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우고 지상에 무덤방을 만들어 그 위에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는 탁자식 고인돌입니다. NA) 덮개돌 길이는 2.2에서 2.6미터 받침돌은 1미터 이상입니다. 고인돌이 무리지어 발견됐다는 것은 춘천분지에서 이미 부족 사회가 형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자막> (그림)/고인돌 만들기/고인돌 만들기-받침돌 세우기/고인돌 만들기-흙 채우기/고인돌 만들기-덮개돌 올리기/고인돌 만들기-흙 제거하기/고인돌 만들기-무덤방 만들기 NA) 고인돌의 크기는 무덤 주인의 세력을 보여줍니다. 큰 돌을 옮기기 위해선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필요했으니까요 흙을 파 돌을 세우고, 고인돌 주위를 흙으로 덮어 언덕을 만듭니다. 덮개돌을 올리고 쌓았던 흙을 치우면 고인돌이 완성됩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돼 있습니다. 자막> 춘천 천전리 청동기시대의 마을 유적 조용환)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해선 많은 인력이 동원됩니다. 따라서 고인돌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에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요. 천전리 주변에 고인돌이 여러 기가 모여 있다는 것은 당시 이 일대에 강력한 힘을 가진 지도자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천전리 고인돌 주변에 75동 이상의 주거지와 농경들이 확인돼 당시에 사회유적을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NA) 기원전 4세기, 청동기 시대, NA) 강원도에 살던 사람들은 농사를 지었고, 농사에 도움이 될 여러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NA) 재산을 소유함에 따라 집도 커지고 마을의 규모도 커졌습니다. NA) 이 시기 사람들은 무늬가 없는 민무늬토기를 주로 사용했고 다양한 도구들 또한 등장합니다. NA) 실용성보다는 지도자의 권위를 보여주는 유물들도 다량 출토됐습니다. NA) 마을을 다스리는 족장은 큰 힘을 갖게 됐고, 족장이 사망하면, 무덤인 고인돌을 만들었습니다. NA)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던, 너른 땅 속에 감춰져 있는 유물들 그 조각들을 통해, 강원도의 선사시대 흔적을 더듬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