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이미지 및 저작권 정보(N2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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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 | 국가유산진흥원 | ||
전자자원소장처 | 한국문화재재단 | ||
공공누리 저작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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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파일 및 자원정보(N2R)
번호 | 파일명 | 파일크기 | 다운로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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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국악방송TV_국악 이것만은 알고 가자_제 2편 남사당패는 있고 여사당패는 없다?!_CHF_1920X1080.mp4 | 74.14 M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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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N2C)
UCI | I801:2101002-001-V000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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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남사당패는 있고 여사당패는 없다?! | ||||||||||||||||||
콘텐츠 유형 | 동영상 | 언어정보 | 국문 | ||||||||||||||||
생산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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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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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키워드 | 남사당놀이;남사당패 | ||||||||||||||||||
내용 | 남사당놀이는 40명에 이르는 남자들로 구성된 유랑연예인인 남사당패가 서민층을 대상으로 1920년대까지 행했던 놀이이다. 남사당패가 공연하였던 남사당놀이의 의의를 생각해보고 당시 시대 사회상을 살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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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정보 | [프롤로그] # 영화 ’왕의 남자‘ 사진 전국을 다니며 민중들의 시름을 달래주었던 유랑 예인집단 남사당패. 다양한 공연으로 조선의 대중 스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한 데요. 왜 남사당패는 있고, 여사당패는 없는 걸까? 출처: 영화 <왕의 남자> 자막/ 유랑 예인집단 ’남사당패‘ 자막/ 민중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조선의 대중스타 자막/ 그런데 왜 ’남사당패‘는 있고, ’여사당패’는 없는 걸까? ------------------------------------------ 타이틀: ‘남사당패’는 있고 ‘여사당패’는 없다? ------------------------------------------ # 남사당패 사진 남사당패는 조선 후기 전국을 떠돌며 풍물과 버나 등의 연희를 공연했던 유랑예인집단이다 남사당패는 꼭두쇠라는 우두머리가 있었고 4~50명의 연희자들로 구성되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1935> 자막/ 남사당패 조선 시대 전국을 떠돌며 풍물, 버나 등 연희를 공연했던 유랑예인집단 자막/ 4~50명의 연희자들로 구성 # 남사당패 공연 영상 자료 # ‘남사당패’ 사진 남사당패의 ‘남사당’ 이라는 명칭은 어떤 의미일까? 여사당의 반대말일까? 우선, ‘사당’이라는 용어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사당패는 본래 불교의 포교와 사찰 운영을 위한 걸립을 위해 가무와 기예를 행하는 집단이었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후 피폐해진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기예를 팔며 떠돌게 되었고, 유랑예인집단이 급격히 늘어났다. 초라니패, 솟대쟁이패와 함께 사당패도 이 무렵 활발히 활동했고, 다른 집단보다 공연의 수준이 높아서 당시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흡사 오늘날의 대중 스타와 같았다. <출처: 김홍도 ‘사계풍속도’. 프랑스 국립기메박물관> 자막/ 남사당은 무슨 뜻일까? 자막/ 사당패: 본래 불교의 포교를 위해 가무와 기예를 행하는 집단 자막/ 왜란과 호란을 겪은 후 생계를 위해 기예를 하며 전국 유랑 자막/ 초라니패. 솟대쟁이패 같은 예능집단도 활동 자막/ 예능 집단들 중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했던 사당패 조선의 대중 스타 남사당패 공연 묘기에 가까운 기예를 선보이는 남사당패. 정말 여자는 없었던 걸까? ‘사당’ 이라는 말은 본래 여성을 뜻하는 말이었다. ‘모가비’ 또는 ‘꼭두쇠’ 라는 우두머리 아래 여성 예인인 ‘사당’이 중심이 되고 남성 예인인 ‘거사’가 함께 다니며 활동했다. 당연히 ‘여사당’ 이라는 말은 애초부터 없던 것이다. 자막/ 남사당패에 정말 여자는 없었던 걸까? 자막/ ‘사당’ 이라는 말은 본래 여성을 뜻하는 말 자막/ ‘모가비’ ‘꼭두쇠’ 라는 우두머리 아래 여성 예인 ‘사당’ 이 있었다 자막/ 그러므로 당연히 ‘여사당’ 이라는 말은 애초부터 없던 것 옛 여자 사당 사진 남녀의 구성비율은 1대 1 이지만 실제 연희는 여자들이 하고, 남자들은 사당을 업고 다니는 등 잔일과 관리를 맡았다. 그럼, 왜 여성 예인은 사라진 걸까? 자막/ 남녀 구성비율 1:1 실제 연희를 했던 건 여자들 자막/ 남자들은 잔일, 관리 담당 자막/ 그런데 왜 여성 예인은 사라진 걸까? # 사당패 공연 옛 그림 사당패는 놀이판 형식인 마당굿으로 표현한다. 사당패는 어디를 가나 인기를 끌고 환영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혐오의 대상이기도 했다. 사당패가 나타나면 남성들이 사당의 놀음을 보기위해 집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하고, 돈 많은 양반들은 사당을 집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 문인 이옥의 글에서 사당패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그들의 공연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영화‘왕의 남자’ 결국 관에서는 사당패가 사회 질서를 문란하게 한다고 하여 이들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그들은 점점 활동할 무대가 좁아졌고 함부로 마을을 출입할 수도 없었다. 먹고 살 길이 막히자 여자 대신 외모가 예쁜 소년이나 청년이 여자 분장을 하고 사당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는 데 이들을 남자 사당 즉 ‘남사당’ 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자막/ 마을에서는 유일한 민중놀이집단이었던 남사당패 자막/ 어디를 가나 인기를 얻고 극진한 환영 자막/ 하지만! 한편으로는 혐오의 대상 자막/ 비렁뱅이 같으면서 비렁뱅이 아닌자들이 있어 ...노래를 불러 남의 옷과 음식을 도모하는 데.. 사당(여성)은 가무를 행할 뿐 아니라 남자를 잘 농락하는 것으로 그 재능을 삼는다 - 이옥 <봉성문여> 중 자막/ “남사당패는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한다” 관에서 이들의 활동을 전면 금지 자막/ 여자 대신 외모가 예쁜 남자가 여자 분장을 하고 사당의 역할을 대신 자막/ 이들을 ‘남사당’ 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조선의 대중스타라는 명성과는 별개로 사당패의 삶은 결코 화려하고 평탄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웃음을 파는 이들이 가진 슬픈이면이다. <출처:동아일보. 1934년에 촬영된 경주 남사당 사진> 자막/ 남사당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사당패의 슬픈 이면이 담긴 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