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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N2C)
UCI | I801:2204008-001-V000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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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경주 월성벽 27구 인골의 비밀 무엇을 위한 죽음인가? | ||||||||||||||||||
콘텐츠 유형 | 동영상 | 언어정보 | 국문 | ||||||||||||||||
생산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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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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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키워드 | 경주;월성;인신제사;제사;신라;인신공희 | ||||||||||||||||||
내용 | 신라의 천년사직을 지켜온 경주 월성! 올 봄 일반인에게 공개된 해자 이외에 역사의 비밀을 품고 있는 발굴현장이 따로 있다. 월성벽 아래 묻힌 27구 인골의 비밀 한국사를 새롭게 쓰게 될 놀라온 발견이라고 하는데... 전문가들도 깜짝놀란 역사의 현장을 공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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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정보 | 자막>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 내레이션> 신라 천년사직을 지켜온 경주 월성 올 봄, 해자구간이 복원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는데 자막> 2022년 3월 월성의 해자 구간 일반인 공개 내레이션>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엄청난 현장이 그 옆에 자리하고 있다 홍성익 현장 반장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월성 발굴 현장 참여 처음에는 너무 놀랐어요. 겁도 나고 인골이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죠 김상민 연구원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월성 발굴 조사팀장 그런 건 생전 본 적 없는 형태고, 그래서 그걸 보고 많이 놀랐죠 내레이션> 한국사를 새로 쓰게 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현장 월성벽 아래 묻힌 인골들의 비밀은 과연 무엇인가 장기명 학예연구사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월성 발굴 조사팀장 국내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게 되면 아마 큰 충격을 받을 겁니다 타이틀> 경주 월성벽 27구 인골의 비밀, 무엇을 위한 죽음인가?! 내레이션> 경주 월성은 신라가 국가체제를 갖추어 가던 시기에 왕이 있는 궁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토성으로 기록 속에만 존재하다가 1979년 비로소 발굴이 시작되었다 이기환 기자 / 역사 스토리텔러 월성벽은 신라 천년 고도를 지켰던 그런 성이죠 935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신라 경주를 지켰던 신라 사직을 지켰던 그런 궁성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김재홍 교수 /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고대 국가가 형성된 시점에 국왕과 국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지금으로 치면 랜드마크와 같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막> 월성벽 발굴 현장 내레이션> 1979년에 시작된 월성벽 발굴은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만 한데 그러던 2021년 9월 발굴팀에게 계속해서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1980년대 시작된 20여구의 인골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총 27구의 인골이 월성벽 아래에서 발견된 것이다 혹시 신라시대의 공동묘지 였을까? 아니면, 국가의 근간을 뒤흔들만큼 엄청난 전염병이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전쟁의 흔적인가?! 장기명 학예연구사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월성 발굴 조사팀장 신라의 왕성에서 성을 축조할 때 인골이 나올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오히려 어? 이게 여기서 어떤 맥락에서 이게 들어간 거지? 자막> 국내 최초 성벽 아래 인골의 정체는? 내레이션> 무덤이 아닌 성벽 아래에 인골들이 묻혀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인골의 머리 방향과 그 옆에 놓여져 있는 토기 인골을 나무껍질로 덮어놓은 듯한 흔적 그리고, 귀걸이 등 의식을 치른 듯한 유물, 발굴 현장의 모든 것이 하나의 답을 향하고 있었다 김재홍 교수 /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특히 그냥 갖다 묻은 것이 아니라 팔찌와 목걸이 같은 것이 있는 걸 봐서 아주 정연하게 의식을 행하고 가지런히 묻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서 성벽의 축조와 관련된 의식 과정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장기명 학예연구사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월성 발굴 조사팀장 성벽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아니면 문지의 액운을 다 잡기 위해 이런 식으로 희생이 치러졌기 때문에 인신공희, 인신공양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는 거죠 내레이션> 그랬다 성벽 아래 인골들은 성벽의 완공을 위한 희생자들이었던 것이다 장기명 학예연구사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월성 발굴 조사팀장 이렇게 인신공희가 증거를 충분히 갖추고 신라 왕성에서 처음으로 나왔기 때문에 내레이션> 인신제사의 증거들은 추가 발굴에서도 계속 나왔다 사람과 같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소와 말의 뼈! 그리고, 액체류가 담긴 큰 토기 안에 작은 토기가 들어가 있는 특이한 형태 제사에 사용된 흔적인 것이다 자막> 고대국가의 인신제사, 전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내레이션>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을 제물로 쓴 인신제사의 증거들 과연 그들은 무엇을 위해 사람까지 희생시켜야 했을까? 이기환 기자 / 역사 스토리텔러 페루라든가, 잉카라든가 고대 이집트 중국도 마찬가지인데요 문명의 발상지에는 늘 이런 사람의 제사를 지냈다라는 기록들이 아주 잘 남아있습니다 내레이션> 또 중국 상나라의 갑골문에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노예 100명과 양 100마리를 올린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장기명 학예연구사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월성 발굴 조사팀장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되는 단계부터 좀 보편적으로 나옵니다 사람을 희생하면서까지도 뭔가 국가적으로 대중적으로 퍼포먼스를 해서 장악을 하기 위해서 내레이션> 전세계적으로 남아있는 인신제사의 기록들, 우리나라 역사에는 또다른 인신제사가 없었을까? 인신제사과는 다르지만 우리나라에도 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사람을 함께 묻는 ’순장’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창녕 송현동 고분에서는 순장된 여성의 인골이 발굴된 바 있다 김재홍 교수 /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지금까지 인골이 발견된 유적은 대부분이 무덤이었습니다. 인위적으로 산 사람을 생매장하는 순장 개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월성 성벽에 인골이 발견된 것은 이 건물이 무너지지 말라고 기원하는 측면에서는 목적을 전혀 달리합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목적성을 가진 의례가 행해졌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에 순장과는 또 다른 역사적 의미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레이션> 그렇다면 월성벽의 축조과정에서 인신제사는 대체 언제, 어떻게 행해졌다고 볼 수 있을까? 장기명 학예연구사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월성 발굴 조사팀장 저희가 2017년, 2021년 둘 다 인골 세 구가 인신공희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성벽 축성 과정에서 보면 분명해집니다 기초를 다 다진 다음에 그 중심 골조가 들어가는 가장자리 그 지점에 맞춰서 인골이 먼저 인신 희생이 되기 시작합니다 김헌석 연구원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고환경 복원 연구팀장 사람을 희생한다고 하는 어떻게 보면 가장 큰 희생물이고 가장 큰 제물을 바치면서까지도 이런 것들을 한다고 하는 걸 봤을 때는 신라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관심과 집중을 보였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내레이션> 국내 처음으로 확인된 인신제사의 증거 경주 월성벽 국가의 주요 건축을 위해 살아있는 사람을 매장하는 고대인들의 믿음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김재홍 교수 /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신라의 국왕이 천 년간 거주한 곳이 월성입니다. 지금까지 ‘월성’ 하면 단순하게 흙을 쌓은 성벽이라 생각했습니다마는 특히 인신 제사가 그중에 핵심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런 걸 통해서 단지 성벽이 구조물로서만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당시 신라인들의 사고방식 그리고 당시 사회 구조를 알 수 있는 측면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내레이션> 유적은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유적을 통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