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이미지 및 저작권 정보(N2L)
대표이미지 | 저작권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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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 | 국가유산진흥원 | ||
전자자원소장처 | 한국문화재재단 | ||
공공누리 저작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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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N2C)
UCI | I801:2204008-001-V000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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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미륵사는 왜 연못 위에 세운 것일까? | ||||||||||||||||||
콘텐츠 유형 | 동영상 | 언어정보 | 국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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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키워드 | 미륵사지;삼국유사;서동요;선화공주;백제무왕 | ||||||||||||||||||
내용 | 지난 2022년 6월 15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익산의 미륵사 목탑지 발굴조사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온 ‘미륵사의 창건 설화’가 마침내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점이 밝혀진 자리였습니다. 삼국유사 기이편에 따르면,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가 혼인 후 사자사로 향하는 길에 연못 위 '미륵삼존불'을 만났다는데... 과연 동양 최대 사찰인 미륵사 창건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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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정보 | 동양 최대 사찰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익산의 미륵사 그리고 미륵사지 하면 바로 떠오르는 석탑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적 중 하나인데 하지만, 미륵사의 건축물 중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은 ‘목탑’이었다는 사실이 이번 현장발굴을 통해 밝혀졌다 그저 전설처럼 전해내려오던 목탑 설화 2022년 6월 미륵사지 목탑지 기단 축조방식이 규명되면서 마침내~ 설화 속 미륵사지 목탑의 존재가 실제했던 역사적 사실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민황식 박사 / 국립문화재연구원 복원 고증 연구 고대 건물지에서도 볼 수 없는 굉장히 특수한 사례입니다 진정환 학예연구실장 / 국립익산박물관 미륵사 전시 담당 그 설화가 상당히 신뢰성을 가지고 있다 소재윤 학예연구실장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미륵사 발굴총괄 가장 큰 규모로서 확인된 사례는 미륵사지가 가장 으뜸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백제 불교 문화를 대표하는 미륵사 지금은 절터와 석탑만이 남아 그 찬란했던 시대를 증명하고 있는데 미륵사에는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바로 백제 무왕이 연못 위에 세개의 탑을 세웠다는 것 대체 왜? 무왕은 마른 땅 위가 아닌 연못 위에 동양 최대의 사찰을 세운 것일까?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이 미륵삼회의 모습을 본 따 전과 탑, 낭무를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했다고 전한다 용화산 큰 연못가에서 이르렀을 때 미륵삼존불의 출현을 보고 고대 미륵사를 지었다는 창건 연기 설화입니다 그렇다 이번 발굴조사과정에서 미륵사 목탑지 아래 물을 흘러보내기 위한 배수시설이 확인됨에 따라 연못 위에 탑을 세웠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사실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에 발굴한 미륵사 목탑지 토층을 살펴보자 먼저, 흙을 켜켜히 쌓은 판축층이 먼저 보인다 그리고, 큰 돌들을 쌓아 물이 흘러내려가도록 했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습지였던 땅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기초층과 성토층을 만들어 놓은 것도 발견되었다 소재윤 학예연구실장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미륵사 발굴총괄 아무래도 습한 습지가 형성됐던 그런 땅들이다 보니까 대지를 조성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성토한 흔적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민황식 박사 / 국립문화재연구소 복원 고증 연구 바로 이 점이 7세기 백제인들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다른 고대 건물지에서도 볼 수 없는 굉장히 특수한 사례입니다 목탑과 금당의 중원 그 옆으로 석탑과 금당의 동원과 서원이 자리한 삼원식 구조의 미륵사 정재윤 교수 / 국립공주대학교 사학과 백제사 연구 세 분의 부척 출현한 것이죠 그래서 중원과 서원과 동원이 삼탑 삼금당식으로 독립됩니다 진정환 학예연구실장 / 국립익산박물관 미륵사 전시 담당 미륵불이 나타날 때는 ‘전륜성왕’ 이라고 하는 매우 위대한 왕이 ‘모든 세상을 통일하고 평화를 가져온다’라는 얘기가 있는데요 무왕이 전륜성황이 되고자 했던 그러한 포부를 드러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동아시아 고대국가 건축 기술을 연구하기 위한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도 그 가치를 더한다 민황식 박사 / 국립문화재연구원 복원 고증 연구 지금까지 저희가 미륵사를 연구하면서 풀지 못한 미스터리가 너무 많은데요 실크로드 길목인 중국의 둔황석굴을 보시면 많은 벽화가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 미륵사와 매우 유사한 공간구조를 보이는 그림들이 있는데 남북조에서 당대까지 유행했던 국제적인 건축양식이 있었다는 거죠 그러한 건축문화가 백제에도 영향을 미쳤고 그들과 대등한 건축 기술로 미륵사를 건설한 겁니다 현재 중국에는 이러한 건축양식이 남이있지 않지만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이곳 익산 금마에 현존하고 있다는 게 역사적으로 매우 큰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백제 무왕은 목탑 3개 혹은 석탑 3개가 아닌 가운데 목탑, 양 옆에는 석탑을 세웠던 것일까? 정재윤 교수 / 국립공주대학교 사학과 백제사 연구 목탑은 보존이 힘들죠 그러기 때문에 목탑 대신에 석탑을 지었는데 정교하게, 나뭇결의 느낌을 드러나게 이렇게 지은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륵사 석탑의 경우에는 목탑에서 삭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양식을 보여 준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진정환 학예연구실장 /국립익산박물관 미륵사 전시 담당 미륵사지 석탑이 우리나라 석탑이 가장 시원적이고 가장 이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의의가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전설처럼 존재하던 무왕의 미륵사 창건 설화가 실제했던 역사적 사실로 밝혀지면서 당시 가장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주는 미륵사 목탑과 석탑의 축조기술을 통해 우리는 이제 한발짝 백제 문화에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소재윤 학예연구실장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미륵사 발굴총괄 수백 년 떨어진 우리가 그 당시에 백제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했고 건축 기술이 또 어떻게 발달했는지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많은 추정을 해볼 수 있는 하나의 계기들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민황식 박사 / 국립문화재연구원 복원 고증 연구 고대 건축유적에 대한 고증연구는 ‘우리 건축의 정체성을 알아가는데 매우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여전히 미스테리에 쌓여있다 하지만, 설화로 남아있는 역사의 한 부분을 끊임없는 발굴과 연구로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