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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N2C)
UCI | I801:2204008-001-V000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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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세계최강 몽골군을 상대로 고려를 지킨 영웅. 그는 누구인가 | ||||||||||||||||||
콘텐츠 유형 | 동영상 | 언어정보 | 국문 | ||||||||||||||||
생산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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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키워드 | 처인성전투;김윤후;고려사;고려시대;몽골 | ||||||||||||||||||
내용 | 세계 최강 몽골군을 상대로 고려를 지킨 영웅, 그는 누구일까요? 고려에도 이순신 장군만큼 위대한 장군이 있었다?! 당시 유럽 전역을 재패했던 세계 최강의 몽골군 하지만 높이 6m 둘레 약 400m의 작은 처인성에서 패배하여 돌아갔습니다. 당시 관군도 없고 순수 지역민들로만 구성된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대몽항쟁 처인성 전투 미스터리를 공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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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정보 | 이순신 장군에 버금가는 나라를 구한 명장이었다 이서현 학예연구사 / 용인시청 세계 최강의 군대로 불릴 만큼 굉장히 세계적으로도 무서운 그런 군대였을 테니깐요 이익주 교수 /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고려의 승리로 몽골군이 모두 철수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고 또 마지막입니다 다시 얘기해서 유일한 대승이었다는 거죠 세계최강의 몽골군을 상대로 고려를 지킨 희대의 영웅 그는 누구인가 고려사 500년은 끊임없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그 중 한반도 역사상 가장 긴 전쟁으로 기록된 몽골과의 전투는 시작부터 처절하고도 치열한 싸움이었다 이익주 교수 /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1차 침략 때 몽골군 지휘관이 살리타이였고 이 사람이 개경을 포위하고 고려의 항복을 받고 돌아갑니다 고려는 몽골군이 돌아가자 곧바로 강화도로 천도해서 항쟁을 선포하는데요 고서에 의하면 몽골군이 지나간 자리에 고려인들이 죽은 시신을 보면은 호랑이가 물어뜯은 것처럼 처참했다 끝없이 남하하던 몽골군은 작은 토성인 처인성에 다다르게 된다 이서현 학예연구사 / 용인시청 처인부곡 같은 경우에는 당시 관군도 없고 순수 지역민들로만 이루어진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냥 단순히 보면 열세였겠죠, 처인부곡민들이 이익주 교수 /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몽골은 기병으로 공격을 하기 때문에 다 산에서 우리가 싸워요 처인 근처에는 산이 없어요 그래서 처인성이라고 하는 데가 그렇게 높지 않죠 작은 토성에서 세계최강 몽골 기병대와 맞서야하는 상황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송주성 작가 / 김윤후 소설 ‘국궁’ 저자 살리타가 처인성을 공격할 때 날아온 화살에 막아서 죽었다 그래서 부장철가가 다시 회군을 시켰다 이런 기록이 있거든요 대몽항쟁 역사상 처음으로 거둔 대승리 이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뜻밖의 결과였다 이익주 교수 /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금방 함락될 것 같은 평지의 작은 성인데 여기서 몽골군 지휘관을 사살한 거예요 이서현 학예연구사 / 용인시청 너무나 허망하게 몽골군이 져 버린 거죠 패배를 하고 돌아간 거죠 그럼으로 인해서 강화도에 천도했던 고려 정부에게는 몽골에 대항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는 그런 전투였거든요 화살 하나가 고려의 운명을 바꾼 것인데 그렇다면 이 화살을 쏜 이는 누구일까 가장 유력한 인물은 부곡민을 이끌고 전투를 지휘했던 김윤후 장군이다 이익주 교수 /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그 화살은 누가 쏜 건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 전투를 지휘한 것은 김윤후다 이서현 학예연구사 / 용인시청 몽골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에 뛰어난 승장이자 리더였던 김윤후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승병이자 의병을 이끌었던 김윤후 장군 고려 조정 역시 당연히 그가 살리타이를 사살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서현 학예연구사 / 용인시청 고려 조정에서는 김윤후에게 벼슬을 주려고 하거든요 당시 김윤후가 싸울 당시 내 손에 활과 화살이 없었는데 내가 어찌 그 벼슬을 받을 수 있겠냐고 거부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장군보다 낮은 섭랑장이라는 벼슬을 받게 되거든요 어찌 된 일인지 그는 자신의 공을 부인하고 벼슬도 마다한다 하지만, 당시 기록은 화살의 주인이 김윤후임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익주 교수 /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고려사를 보면 승려 김윤후가 처인으로 피난을 가 있다가 그곳에서 몽골군과 싸우게 됐고 싸움 중에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했다 라고 기록이 돼 있습니다 송주성 작가 / 김윤후 소설 ‘국궁’ 저자 우리 고려사에서 중요한 단어는 윤후 사살집니다, 윤후 사살지 윤후가 사살했다 이 기록이 분명히 기록돼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는 왜 자신의 공을 부인한 걸까 아쉽게도 명확히 밝혀진 건 없다 분명한 건 그가 자신의 공을 부곡민들과 함께 나눠 가졌다는 것이다 송주성 작가 / 김윤후 소설 ‘국궁’ 저자 부곡민과 모든 승병들의 공으로 돌림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처인부곡을 처인현으로 승격시키고 천민들을 양민으로 해방하는 큰 결과를 이끌어내게 됐던 거죠 그로부터 20년 후, 충주성 전투에서도 그는 리더십을 발휘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서현 학예연구사 / 용인시청 노비 문서를 불태워 버리고 너희들이 여기서 전투에서 승리를 하면 신분이 상승될 수 있다 라고 하면서 독려를 하게 되거든요 군사들을 용기를 북돋아 가지고 70여 일간 전투를 벌여서 결론은 또 이깁니다 김윤후가 몽골군 다시 한번 또 물리치게 되죠 혜성처럼 나타나 나라를 구한 영웅 김윤후 장군 만약 그가 없었다면 고려의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