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이미지 및 저작권 정보(N2L)
| 대표이미지 | 저작권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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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 국가유산진흥원 | ||
| 전자자원소장처 | 한국문화재재단 | ||
| 공공누리 저작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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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CL 정보 | |||
| 소스코드 | <iframe width="1000px" height="480px" src="http://uci.k-heritage.tv/resolver/I801:1605005-001-V00002?t=3"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
관련 파일 및 자원정보(N2R)
| 번호 | 파일명 | 파일크기 | 다운로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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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KBS_광복70년특집_되살아난역사주미대한제국공사관_마스터_CHF_1280X720.mp4 | 1.15 G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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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N2C)
| UCI | I801:1605005-001-V000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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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KBS 광복70주년 특집] 되살아난 역사 주미대한제국공사관 | ||||||||||||||
| 콘텐츠 유형 | 동영상 | 언어정보 | 국문 | ||||||||||||
| 생산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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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여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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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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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키워드 | ;죽천고;로건서클;주미전권공사;;주미대한제국공사관 | ||||||||||||||
| 내용 | 고종은 1887년, 박정양을 최초의 주미전권공사로 임명해 워싱턴으로 보냈는데요. 곧이어 그곳에 공사관을 사들였습니다. 매입 금액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금 2만 5천 달러였죠. 고종은 왜 굳이 머나먼 미국 땅에 조선 소유의 건물을 갖고자 했던 걸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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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본 정보 | NA / 제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유심히 보십시오. 저는 이곳을 떠나야만 했던 조선 사람입니다. 최초의 주미전권공사. 고종께서 친히 내리신 무거운 이름입니다. 19세기, 조선인들은 미국을 잘 몰랐습니다. 물론 미국인들도 조선을 잘 몰랐지요. 이곳에서도 저는 비단 관모를 쓰고, 화려한 관복을 입었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미국 안의 조선’ 미국 안의 대한제국’을 만들었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 볼 겁니다. NA / 이곳은 미국의 오래된 수도, 워싱턴입니다. 국제적으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도시인만큼, 무려 174개의 대사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워싱턴에 있는 한 건물인데요. 내부가 텅 비어있나 했는데 무슨 일인지,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현장음 / 이것은 우리가 아직 정확히 가격을 모르는 것도 포함한 비용입니다. 예를 들어서, 등을 다시 제작하는 것에 대한 가격은 아직 정확히 산출하지 못했는데, 그것을 만드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입니다 남성 / 네, 이곳이 바로 19세기 조선의 공사관이었던 건물입니다. NA / 이 공간을 복원, 활용하기 위한 방안을 연구하기 위해, 역사학자, 고건축학자, 언론인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인 겁니다. 공사관은 건축된 지 벌써 100여년이 넘었지만, 최신 건물 못지않은 섬세한 구조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김종헌 / 배재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건축역사학 박사. 건물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덧창을 보시면 가리개의 모양이 흥미롭고 열고 닫는 방식도 흥미로운데 가리개를 닫으면 창에 딱 맞게 들어가는 크기입니다. 가리개를 열면 채광과 환기가 이루어지는 거죠. 덧창이 몰딩에 주머니처럼 들어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양쪽의 덧창을 접어 몰딩 안에 넣게 되면 개방된 창을 통해 전경이 보이면서 원래 덧창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는 구조입니다. NA / 공사관이 위치한 곳은 워싱턴의 로건서클이라는 지역입니다. 19세기 남북전쟁의 영웅, 로건의 이름을 딴 것인데요. 로건 BS이곳이 워싱턴에서도 특별히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이유는, 19세기에 지어진 고색창연한 가옥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다양한 건축양식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통상 빅토리안 건축물이라고 부릅니다. 빅토리안 건축물은 외관의 벽이 곡선을 이루며 돌출돼 있고, 첨탑과 돔이 어우러진 지붕의 독특한 모양이 특징이죠. 워싱턴 옛 지도를 보면, 이 로건서클이 얼마나 중요한 지역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백악관을 기점으로 듀퐁 서클, 로건 서클을 잇는 삼각형의 도로가 형성돼 있는 것이죠. 김종헌 / 배재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건축역사학 박사. 전체적인 도시 구성은 사각형의 격자패턴을 갖고 있는데 각각의 중요한 건물들에 삼각형으로 뻗어나가는 도로를 형성하면서 도시에 변화를 주게 됩니다. 그리고 각 도로가 만나는 아주 중요한 지점에 서클이라고 하는 원형의 공간을 형성하게 되고 그 지점들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장소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데 당시의 공사관 외교관 이런 건물들이 이제 로건서클과 듀퐁 서클 쪽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NA / 지도가 그려질 당시, 이곳에는 무려 31개의 공사관이 있었는데요. 아이오와 서클, 즉 지금의 로건 서클에 위치한 대한제국공사관도 상세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고국에서 무려 1만km 이상 떨어진 낯선 나라, 미국. 조선의 외교관들은 무엇을 위해 이곳까지 와야만 했던 것일까요? 최초로 미국에서 외교활동을 펼쳤던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고종께서는 저를 미국에 보내시면서, BS외교의 기본이 되는 세 가지 훈유를 내리셨습니다. 저는 외교 경험은 별로 없었지만, 비교적 견문이 넓은 편이라 선택되었던 것 같습니다. 앞서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조선에서는 근대화에 앞장섰지요. 미국으로 가는 여정은 길고 험난했습니다. 제물포에서 출발해 나가사키와 요코하마를 경유하며 알렌과 합류했습니다. 미국인인 알렌은 의사이자 선교사로, 조선의 외교활동 자문 역할을 했지요. 하와이까지는 배 멀미를 지독하게 앓았습니다. 샌프란시스코 9배가 정박한 곳은 샌프란시스코인데요. 한 신문기자가 저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더군요. 기자 / 조선조정은 공사를 파견하고 외국에 사신을 보냈으니, 자주 국가가 된 것인가요? 박정양 / 조선은 이미 자주 국가입니다. 중국은 과거 조선의 주권을 제약했지만, 조선은 원하지 않습니다. NA / 저는 조선 전권공사로서 자부심을 보여줄 수 있어 기뻤습니다. 다시 워싱턴으로 향하는 열차로 갈아탑니다.‘샌트럴 패시픽 유니온 철도’의 ‘버링톤 팬’. 처음 타보는 대륙횡단 열차였죠. 이하영, 이완용, 이상재, 강진희, 이채연 등 조선인 10명은 1등석에 탑승했습니다. 미국인 알렌은 우리를 유심히 관찰하더군요. 알렌 / 공사 일행 중 몇몇은 예절이 바르고 깔끔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번역관으로 따라 온 이채연이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해 깜짝 놀랐지요 NA / 이런, 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네요. 그래도 미국에 가서는 모두들 영어 실력이 꽤 늘었습니다. 자, 드디어, 조선을 떠난 지 50여일 만에 워싱턴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이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진풍경을 여러 번 마주하게 됩니다. 특히 가슴과 어깨를 드러낸 여인들이 춤을 추기에 꼭 기생인 줄로만 알았지요. 모두 고관대작들의 아내들이라기에 크게 당황했습니다. 또 어떤 날은, 웬 작은 방에 들어가라 하고 문을 닫은 후 마구 흔들리기에 지진인 줄 알고 놀랐더니, 자동으로 위층에 데려다주는 엘리베이터라는 물건이답니다. 열강에 둘러싸여 있던 지정학적 불리함. 박정양과 외교관들은 낯선 미국에서 조선의 또 다른 미래를 찾고자했습니다.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자문위원장. 한국은 특히 미국에 대한 기대가 컸어요. 제 1조문에 제 3국이 조선이나 미국에 양국에 어떤 장애를 할 때는 거중조정한다는 조문이 우리는 항상 미국이 우리를 돕겠다는 하는 기대를 갖게 됐고 영토도 지역적으로 멀기 때문에 미국이 영토적인 침략에 대한 야욕은 없다는 신뢰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나라, 또 일본의 지배한 경제적 침투에서 미국의 경제적 투자를 확보하려는 그런 전략들이 조금 균형 있는 세계화의 시대를 열 수 있는 계기는 마련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NA / 조선은 서양 국가 중 최초로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을 속방으로 여기던 청은, 위안스카이를 내세워 주미공사 파견을 방해했는데요. 심지어 한 국가의 대표임을 의미하는 ‘공사’ 명칭조차 사용할 수 없도록 압력을 가했습니다.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자문위원장. 청나라 경우에는 전권공사명칭을 못쓰게 했어요. 그거보다 훨씬 낮은 직함을 강조했지만, 고종의 끈질긴 그런 외교적인 자주권의 의지가 전권공사의 칭호를 계속 주장했고... NA / 청이 공사 파견을 허락하는 대신. 영약삼단 내용 강조19내걸었던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영약 3단’인데요. 조선이 하나의 자주국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더 나아가 청의 속국임을 전 세계에 주지시키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워싱턴에 도착한 박정양은 대담하게 이‘영약 3단’을 무시합니다. 청나라 공사관보다 먼저 미국 국무성을 방문하는데요. 곧 이어 청나라 공사를 대동하지 않은 채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국서를 전달합니다. 한철호 / 안녕하세요. 죽천 박정양 선생 기록을 좀 보러 왔습니다. NA / 직접 써내려간 일기 형식의 기록이 원본 그대로 보존 돼 있다는데요. 박찬수 / 죽천고를 원본으로 해서 84년에 영인본으로 만든 박정양 전집 6권이 있고요. 원본이 여기하고 책꽂이 안에 보관이 돼 있습니다. NA / 후손들은 이 문집을 정리해 책으로 펴내기도 했습니다. 한철호 / 지금 한 130년 됐는데... 1888년에 쓰신 거니까. 아주 당시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박찬수 / 역사도 오래되고 또 전쟁도 거치고 이러느라고 보존을 좀 더 잘했어야했는데 일부 훼손이 돼서 저희도 안타깝습니다. 한철호 / 그래도 보존 상태가 굉장히 좋습니다. NA / 우리는 또,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죽천고의 탈고 연도는 1888년. 조선 사람이 쓴 서양에 대한 어떤 기록보다 앞선 시기였던 겁니다. 한철호 / 동국대학교 역사교육학과 교수. 이제까지 상식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견문기, 내지는 서양 견문기가 유길준 선생이 썼던 서유견문이다, 이렇게 알려져 있는데 그걸 보면 1889년에 탈고됐다고 기록이 돼 있어요. 본인 스스로. 그런걸 보면 하여튼 햇수로 보면 1년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견문기이자 서양 견문기. NA / 최초의’ 주미전권공사가 남긴 ‘최초의’ 서양견문기. 총 44개 항목에 걸쳐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대해 써내려간이 글에는 개인적인 고민도 담겨있습니다. 한철호 / 동국대학교 역사교육학과 교수 . 박정양이 미국에 주재하는 동안 여러 활동을 펼쳤는데,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중 하나가 미국과 철도 부설에 대한 조약. 약정을 맺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저희한테 불리했던 모양이에요. 보통 관리들이 위에서 지시하면 눈치 보느라고 불리하더라도 승낙하고 오히려 거기에 짜 맞춰서 일을 추진하는데 박정양 공사 같은 경우는 일단 논의가 돼서 미국 측의 요구가 무리한데 그것을 들어준다고 해서 미국이 우리나라를 보호해주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고 미국의 너무 무리한 요구를 정확하게 차단하고 적정한 선에서 조약을 다시 결정하도록 권고를 하는 것입니다. 관료로서의 강직함. 또 국가를 위한 충성심, 정의감 이런 것들이 잘 베어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NA / 러시아와 청나라, 일본의 힘겨루기는 점차 고조되고 조선은, 열강의 위협에 맞서 더 넓은 세계에서 힘을 빌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미국에 공사관을 개설하고 공사를 파견한 고종은, 전 세계에 조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요. 초기에는 ‘피서옥’이라는 임대건물에서 공사관을 운영했는데, 곧 공식적인 조선소유의 공사관 매입을 추진합니다. 백악관에서 불과 20여분 거리에 위치한 건물. 1891년, 고종은 2만 5천 달러의 거금을 들여 이곳을 사들였습니다. 이후 11명의 공사들, 그리고 미국에 거주하던 모든 조선인들에게 공사관은 고국과 같은 상징적인 존재였습니다. 미국 안에, 공식적인 조선의 공간이 생긴 것이죠. 로건 서클은 역사지구로 지정돼, 옛 건물들을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우리 공사관 역시 건물 외관의 형태나 규모는 당시와 비슷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하지만 당시 미국에서 발간된 잡지에 실린 이미지라든지 지금까지 남아있는 10여장의 사진을 보면, 건물 내부의 구조나 인테리어는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입니다. 이 100여 년 전 사료들을 토대로, 공사관 내부의 모습을 3D로 복원해보려 하는데요. 김성환/ Dream FX 과장.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구성 되어 있고요 1층 홀 로비 그런 식으로 복원 작업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 생활환경 수준에 맞게 사료 보고 고증하는 거에 제일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NA / 19세기 말의 공사관, 박정양 공사의 소개로 만나볼까요? 네, 주미공사관이군요. 저도 이야기만 들었지, 제대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임기를 마치고 미국을 떠난 후에 사들인 건물이거든요. 무척 아쉬웠는데, 덕분에 구경해보는군요. 1층은 객당과 정당, 식당으로 구성돼 있네요. 먼저 정당부터 소개하지요. 비록 먼 미국 땅이지만, 이쯤에 어진을 모시고 조선의 궁궐을 향해 절을 하며 충성을 다짐했을 겁니다. 객당을 보니, 제 후임들의 세련된 취향도 짐작할 수 있군요. 미국에서 유행하던 빅토리아풍 인테리어지만, 우리식 소품이 많습니다. 호피 무늬 카펫도 당시 조선 사람들이 좋아하던 것이지요. 태극은 조선을 상징하는 표상인데다 아름다운 문양입니다.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현관 복도에도 대형 태극기를 걸었군요. 샹들리에며 커튼, 벽난로, 소파 같은 가구들은 전부 미국식인데, 이것에 조선의 모습이 어우러져 있으니! 공사관를 방문한 외국인들의 눈에도 무척 인상적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궁금하군요. 다른 공간들은 어떻게 복원하실 겁니까? 사진으로 남겨둔 것은 1층뿐이라고 들었습니다만...실제 공사관 복원에 있어 1층을 제외한 공간, 즉 2층과 3층,지하실의 당시 구조와 용도는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한종수/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연구실 팀장. 그렇다고 하면 2층이나 3층 공간은 어떤 형태로 어떤 용도로 사용 됐을까 이 부분을 규명 하는 게 최고 난관 이었습니다 NA / 그런데 지난해, 연구자들은 아주 귀한 사료를 발견합니다. 한종수 / 이게 이제 수리견적선데요. 수리견적서를 받은 날짜는 1900년 4월 13일자로 A.J 피셔 앤 컨트랙터 앤드 빌더 한테 받은 거고요. 이제 그 수신자가 이의담. 당시 임시서리공사입니다, 서리공사에게 수리 견적서를 보낸 내용이고... NA / 공사관에 화재가 난 적이 있는데다, 매입 후 십년 가까이 사용하면서노후 된 곳이 많아 건축업자에게 수리견적서를 보낸 것인데요. 건물 보수를 위해 작성한 내용인 만큼 공사관 각 층의 구조와 용도를 아주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종수/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연구실 팀장. 그 당시에 공사관 내부에서 공무적인 일과 일상적인 업무를 어떻게 봤으며 어떤 생활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물품비를 통해서 저희들이 반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NA / 미국에 파견된 조선의 공사들은 고종의 밀명을 받았습니다. 부산, 인천, 원산 세 부두를 담보로 200만 달러를 차관하고, 그 돈으로 20만 명의 미군을 빌려 청나라를 치자는 것입니다. 6일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뉴욕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리는데 성공했죠. 그 자금으로 공사관에서 대규모 연회를 열고 미국의 주요 인사들과 접촉했습니다. 조선 파병 안건은 미 의회에 상정됐고, 성공이 눈앞에 보이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파병 안건은 상원에서 부결되고 맙니다. 냉정한 국제 외교의 현실을 깨닫게 된 사건이었죠. 조선의 공사들은 계속해서 미국 내에서 입지를 넓히기 위한 활동을 이어나갔는데요. 4대 주미서리공사인 이채연은 미국 신문에도 등장했습니다. 특히 그의 부인이 영어에 매우 유창했다고 하네요. 이채연의 임기 중에 열린 시카고 박람회는 조선에서 최초로 참가한 세계박람회입니다. 공사관은 조선에서 온 참가단을 지원하고, 총괄 지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통 기와를 올리고 총 12종의 조선 물품을 전시한 조선관. 대단히 독특하다는 평을 받아 관람객이 많았는데요. 참가단 대표인 정경원은 박람회 성공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당당히 앞자리를 차지했습니다. 1897년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 공사관은 이후에도 여전히 조미 외교활동의 장이자 전 세계에 조선의 존재를 알리는 구심점이었습니다. 그러나 1910년. 한일강제병탄과 함께 주미대한제국공사관도 우리의 역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5달러25일본은 1910년 6월, 단돈 5달러에 공사관 건물을 양도받았습니다. 형식만 갖췄을 뿐, 강탈한 것이죠. 10달러그리고 한국을 병탄한 직후인 8월 31일, 다시 미국인 풀턴에게 장부 가격 10달러, 실거래가 1만 달러에 공사관을 팔아 넘겼습니다. 하지만 공사관의 존재는 잊혀 지지 않았습니다. 현장음 / 안창호 선생님의 장녀 수잔 커디 여사가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대한제국 주미공사관 엽서입니다. NA / 독립운동가 안창호의 유물에서 발견된 엽서의 앞면에는 공사관이 모습이 인상적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그런데 공사관 엽서에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습니다. 태극기 ZI실제 주미공사관의 사진에서도 볼 수 없었던 태극기가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엽서 속 태극기는 건물에 비해 너무 크고 휘날리는 모습도 어색합니다. 아무리 봐도 일부러 그려 넣은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 모습이죠. 해외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 본부에 수신된 엽서에도 마찬가지로 이와 똑같은 태극기가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공사관은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었던 것일까요?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자문위원장. 특히 주미한국공사관에 태극기가 계양돼 있잖아요. 그래서 당시 엽서를 보면 당당히 포치 앞에 태극마크가 있고 태극기가 우람하게 올라가는 그 모양의 엽서들이 항일 운동가들에게 굉장히 애호하던 엽서였습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국력이 쓰러져가도 우리의 의기는 살아있다. 이렇게 우리가 미국에도 공사관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을 다시 알림으로써 우리가 이제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우리가 힘을 합하면 이 태극기 상징으로 우리는 나라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빼앗겼던 나라를 다시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의 합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NA / 세월이 흐르면서 공사관은 또 다시 다른 미국인에게 팔렸습니다. 2차 세계대전 전후에는 제대군인들의 재활시설로 활용되었고, 60년대에는 화물운수노동조합의 노동조합 건물로 쓰이기도 했죠. 그리고 1977년, 인권 변호사 티모시 젠킨스 부부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이 부부는 삼십년 가까운 세월을 이 집에서 살아온 만큼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는데요. 젠킨슨 부부 / 아들이 건축가인데, 집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어디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수 있을지 찾아보니 건물을 해체해야 할 지경이었죠.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공간이 없었어요. NA / 건물을 훼손하는 대신 좀 더 불편하게 사는 것을 택한 젠킨스 부부. 그들이 이 집을 특별하게 생각했던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젠킨슨 부부 / 저희는 이전 소유주에게 이 건물이 대한제국공사관이었을 당시 외관과 내부가 찍힌 사진을 받았습니다. 내부에는 국기가 걸려있었습니다. 아마 그 사진을 보셨을 거예요. 그것을 보니 이 건물은 한국인들에게 국가적인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제 자신이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다른 사람들의 문화 또한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NA / 1982년에는 한미수교 100주년을 맞이해 젠킨스 부부의 집이 한국과 미국 두 나라의 역사가 담긴 장소로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박보균 / 중앙일보 대기자 (부사장),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자문위원. 한국 사회의 격동과 격변 속에서 이 건물은 우리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납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 건물을 잊고 으레 헐렸거니 재개발 되었거니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1972년 로건 서클 일대가 미국 정부에 의해서 문화보존지구로 지정이 됩니다. 1980년대 후반 90년대부터 우리 교민사회라든지 역사학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이 건물의 존재를 다시 확인합니다. 그렇다면 이 건물이 기적처럼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는 15년 전부터 이 건물 주변을 돌면서 또 이 건물을 살피고 이 건물의 역사를 들여다보면서 이 건물의 기적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NA / 학계의 관심이 이어졌고, 언론인들 역시 홍보와 캠페인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12년.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은 일제에 의해 소유권을 빼앗긴 이래 102년 만에 다시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공사관 바로 옆 건물에 살고 있는 사진작가 오향숙씨. 7년간 미국에 거주하면서 로건서클의 모습을 기록해왔는데요. 그녀에게도 공사관을 되찾은 일은 무척 특별하다고 합니다. 오향숙/ 로건 서클 주민, 사진 작가 INT. 그 날은 주미공사관이 매입된 이후로 열쇠를 받는 날이었던 것 같아요. 제 꿈에 저희 거실이 굉장히 환하게, 환한 방으로 보이면서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었어요. 그 때 어떤 분이 키가 작은 분이 서계시더라고요. 그 분이 저희 방안을 두리번거리면서 뭔가 이렇게 엿보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 분의 복장이 기억이 나요. 하얀 옷을 입었는데, 18세기 그 때 입었던 약간의 그런 느낌의 옷이었어요. 오래된 옷의 스타일. NA / 건물을 정식으로 인계받은 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는 바닥과 문, 창 등 건축의 기본골격은 물론 벽의 문양 하나하나까지 사진을 찍어 고증하고 훼손 정도를 파악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김종헌 / 배재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건축역사학 박사. 저 옆집을 보면 지붕이 있는 출입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지금 공사관에는 지붕이 있는 출입구가 없는데 옛날 사진에 보면 삼각형의 지붕이 있고 그 안에 출입할 수 있는 구조물이 있습니다. 이 구조물은 우리 한국공사관에 대한 모습을 아주 잘 나타내는 구조물인데 그 삼각형 안에 또 태극기 문양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복원할 때 태극문양까지, 그래서 이 태극문양은 대한제국 공사관의 인장 그 모습인데 그걸 복원해서 그 밑으로 출입하면서 어떤 대한제국 공사관의 모습을 잘 복원하려고... NA / 8개월에 걸쳐 공사관 복원에 필요한 필요한 정밀 실측 조사도 진행했는데요. 강성원/ 강희재 건축사무소. 이 건물이 이제 1877년에 지어졌고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있는 건물입니다. 3d 스캐닝 작업은 각 평면 마다 여러 방마다 이제 3d 스캐너 위치에 놓고 각 방마다 정밀 실측하고 그런 것을 조합 후 병합하며 건물 도면을 작성하는 작업입니다. 정밀 실측은 또한 흔적 조사를 포함 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어떻게 쓸까라는 것들을 찾아가는 것들이 저희 정밀 실측의 또 다른 목표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NA / 방의 위치, 크기, 높이에 대한 설계원리를 밝혀내는 것으로, 보다 체계적인 복원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제 지금까지 조사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본격적인 시공에 들어갈 단계인데요.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 한국이 아닌 워싱턴에 위치한 건물인 만큼, 현지 법률과 조건에 맞춰 까다롭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날은 다섯 개의 복원시공업체가 프리젠테이션에 참가해 한국에서 온 전문가들로 구성된 평가위원회의 심사를 받았습니다. 현장음 / 우리 팀과 이 프로젝트에 접근할 방향을 소개하고, 서류나 이 공간에 대한 이해 등 우리가 직면한 특별한 과업, DC 지역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NA / 복원은, 단순한 재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 시대에도 의미 있는 공간으로 되살리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요. 한종수/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연구실 팀장. 이 공관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 내용들을 가지고 1,2층은 복원을 하고 지금 3층 공간은 방이 원래 3개의 방이 있었는데 3개의 방이 모두 헐리고 하나의 룸으로 되어있습니다. 공간이 다 뻥 뚫려 가지고. 그 공간을 저희들이 지금 전시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NA / 지난 해 로건서클의 역사지구를 안내하는 표지판에도 주미대한제국공사관에 대한 소개가 등장했습니다. 역사의 보존과 계승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주민들 역시 공사관의 매입과 복원을 반기고 있습니다. 주민들 / 저는 (역사지구인) 로건 서클의 주민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누군가 이 위대한 유산을 보호하고 개발하려 한다면, 환영할 거예요. 이 건물과 같이 커다란 빌딩이 개발될 때는 대부분 아파트의 형태로 만들어집니다. 하나의 건물이 여러 개의 개별적인 공간으로 분리되는 거죠. 저는 대한민국의 공사관이 아파트가 되지 않고 온전하게 하나의 건물로 남게 되는 것이 기쁩니다. 좋은 뉴스예요. NA /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 100여 년이 넘는 세월동안 같은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겁니다. 주민들 / 제가 바라는 것은, 공사관이 이곳 시민들과 한국 국민들 간의 상호 이해를 돕는 방향으로 개발되는 것입니다. NA / 누군가는 대한제국을 ‘잃어버린 역사’라고 말합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이곳 주미대한제국공사관에서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지나온 시간의 흔적들이, 나아갈 100년의 역사로 되살아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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