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이미지 및 저작권 정보(N2L)
대표이미지 | 저작권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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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N2C)
UCI | I801:1501001-001-V004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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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조선왕조실록 2부, 왕도 두려워했던 사관(史官) | ||||||||||
콘텐츠 유형 | 동영상 | 언어정보 | 국문 | ||||||||
생산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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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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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정보 | 조선 태종 4년, 사냥을 좋아하는 태종이 말을 타고 활시위를 당기다 그만 말에서 떨어지고 만다. 경황이 없는 가운데서도 태종이 내뱉은 첫마디는 이러했다. “이 일을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 하지만 사관이 모르게 하라는 말까지 사관은 기록했고 이는 실록에까지 그대로 실렸다. 권력에 흔들리지 않는 직필로 조선왕조실록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지켜낸 조선시대 사관의 기록정신을 들여다본다. <창덕궁 방문정보> 위치: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2-71 연락처: 창덕궁 관리소, 02)762-8251/9513 관람정보 - 관람시간: 4~10월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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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조선 태종 4년, 사냥을 좋아하는 태종이 말을 타고 활시위를 당기다 그만 말에서 떨어지고 만다. 경황이 없는 가운데서도 태종이 내뱉은 첫마디는 이러했다. “이 일을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 하지만 사관이 모르게 하라는 말까지 사관은 기록했고 이는 실록에까지 그대로 실렸다. 권력에 흔들리지 않는 직필로 조선왕조실록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지켜낸 조선시대 사관의 기록정신을 들여다본다. <창덕궁 방문정보> 위치: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2-71 연락처: 창덕궁 관리소, 02)762-8251/9513 관람정보 - 관람시간: 4~10월 09:00~18:30 / 11월, 3월 09:00~17:30 / 12월~2월 09:00~17:00 / 매주 월요일 휴무 - 관람요금: 유료 관련 홈페이지: http://www.cdg.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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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정보 | 그들은 붓 한자루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었다.권력에 흔들리지 않는 직필로 조선왕조 실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지켜낸 사람들이었다.그들은 누구인가? 조선 태종 4년, 사냥을 좋아하는 태종이 말을 타고 활시위를 당기다 그만 말에서 떨어지고 만다. 경황이 없는 가운데서도 태종이 내뱉은첫마디는 이것이었다. 그러나, 태종실록을 보자.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하였다. -태종실록 4년 사관이 모르게 하라는 임금의 말까지기록돼 있다. 그날의 사관은 임금이 숨기고 싶었던 일마저도 주저하지 않고 기록한 것이다. 철저한 기록정신을 가지고 있던 사관의 모습은 조선의 역사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국가의례였던 대사례의 기록을 보면, 의식이 진행되는 중에도 임금의 옆에서 종이를 들고 기록하는 사관의 모습이 보인다. 사관은 그 직급이 정 7품 이하의 미관말직이었지만 그들이 맡은 직무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대부분 벼슬에 처음 나선 젊고 패기만만한 신진 엘리트들이었다. 이들의 주요임무는 임금의 공적이거나 사적인 말과 행동을 모두 기록하는 사초를 작성하는 일, 사관이 기록한 그 초안을 사초라고 한다. 사관은 이 사초를 비밀리에 관리했다가 임금이 죽고 난 후, 실록을 편찬할 때 자료로 제출했다. 조선의 역사를 직필해야 했기에, 사관은 내외간 4대조까지 흠이 없고, 인품이 공정하다고 인정받은 사람으로, 사관의 추천을 받는 자만이 가능했다. 이런 엄격한 기준으로 선발된 사관은 시간과 장소에 굴하지 않고, 왕의 곁에서 매일 조정의 일을 빠짐없이 기록하며 조선의 역사를 남겼다. 그리고, 그 기록은 왕이라 할지라도 볼 수 없도록 함으로써, 사관의 올바른 역사기록을 보장했다. 조선시대, 당대 역사란 어떤 의미가 있었기에 이토록 기록에 힘을 들였을까? 인조 때 사관을 지냈던 정태제.. 그의 후손에게서 흥미로운 유물 하나를 볼 수 있었다. 당시, 사관 정태제가 기록했던 사초다. 실록의 기초 자료가 되는 사초.. 사관 정태제가 왕의 곁에서 기록했을 이 사초는 인조 15년부터 이듬해에 걸친 5개월간의 것이다. 무슨 내용이 담겨있을까? 임금이 곁에서 했던 말을 받아 적었고, 왕세자에 대한 내용도 기록돼 있다. 여기에 백성의 민생고, 해결하지 못한 국정사안까지 언급하고 있다. 재미있는 건, ‘사신왈’로 시작되는 부분이다. 이것을 사론이라고 하는데, 당시 상황에 대해 사관 스스로 논평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대 왕이었던 인조에 대한 사관의 평가는 어땠을까? 인조 16년 5월 사관의 말 큰 혼란이 진정되지 않았고 막중한 책임이 앞에 있는데, (임금은) 어찌 경거 망동을 하시어 백성들에게 근심을 던져 주십니까. 왕에 대한 거침없는 발언.. 인조 15년 10월 사관의 말 예전에는 말세의 임금 일지라도 재앙이 되는 일들을 만나면 반드시 뭇 신하에게 일러 각각 과실을 죄다 말하게 하였습니다. 임금의 덕이 부족하다며 그의 자질까지도 비난했던 사관의 사론이 실록에 고스란히 실렸다. (여유있게)조선시대엔 이렇게 실록에 사론을 실어 사관의 기록을 중시하며 보장했다. 한 나라의 군주라 할지라도, 사관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관의 올바른 역사기록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성종실록>을 편찬하며 벌어진 사건, 조선의 4대 사화 중 하나로, 엄청난 비극으로 확산된 무오사화, 그 발단은 사초에 있었다. 당시, 실록 편찬의 책임자는 훈구파에 속했던 이극돈, 그는 실록편찬을 위해 사초를 검토 하던 중,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보게된다. (바로)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하는 김종직의 글을 사관 김일손이 사초에 실었고, 결국,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난다. 선왕을 헐뜯었으니.. 대역으로써 논단하여 부관 참시하였고, 그 도당 김일손·권오복·권경유가.. 그 글을 칭찬하되, 사초에 써서 불후의 문자로 남기려고 하였으니, 아울러 능지처사하게 하였노라. 사초로 인해 사관과 그의 스승이 당한 조선 최대의 필화사건.., 기록을 보는 순간, 정국은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숱한 견제와 위협, 심지어는 목숨까지 바쳐가며 사관은 역사를 기록했다. 당대의 사건을 나열한 단순한 기록을 넘어,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을 아끼지 않았던 사관. (이어 여유있게)당대의 올바른 역사 기록을 목숨처럼 여겼던 사관의 기록정신이 있었기에 조선왕조실록은 존재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