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이미지 및 저작권 정보(N2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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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 | KBS | ||
전자자원소장처 | 한국문화재재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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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N2C)
UCI | I801:1803002-001-V000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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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가야 2부 - 신화에서 역사로 | ||||||||||||||
콘텐츠 유형 | 동영상 | 언어정보 | 국문 | ||||||||||||
생산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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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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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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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키워드 | ;가야;김수로;허황옥;코벨;아유타;유리공예;철제무기;철기기술; | ||||||||||||||
내용 | 가야를 건국한 철의 왕 김수로는 머나먼 바다로부터 온 여인을 왕비로 맞았다 . 지금에 이르러서도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은 , 미지의 나라 아유타국에서 온 ‘허황옥 ( 許黃玉 ) ’. 황금 구슬 ( 黃玉 )의 이름을 가진 , 그녀의 등장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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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정보 | 교토 서북쪽, 일반인은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오래된 사찰. 이곳에 묻힌 한 여성이 있다. 야마다 소쇼 / 신주안 주지 이곳이 코벨의 무덤입니다. 묘비에 관세음보살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원래 관세음보살상은 조금 갸름하지만 여기에는 코벨과 닮게 통통하게 새겼습니다. 코벨은 미국인으로, 당시 사찰의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녀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전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마치 출가한 것처럼 생활했다. 야마다 소쇼 / 신주안 주지 여성 학자분이 절에 산다는 게, 심지어 미국 분이시니까 생활습관도 다르다고 할까 제 스승님은 상당히 엄격한 분이어서 가끔은 코벨을 울게 했던 적도 있습니다. 엄하셨거든요. 코벨은 동양미술사학자로, 일본 불교 미술에 심취해 있었다. 알란 코벨 /존 카터 코벨 아들 이것은 소르본 대학의 것입니다. 중세시대 역사에 대한 학위고요. 이건 소르본에서 받은 또 다른 학위입니다. 미시건 대학에서 받은 학위도 있습니다. 그리고 코벨은 서양에서는 처음으로 일본 고고학을 연구하기 위해 컬럼비아대학 박사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코벨의 연구는 저 책이 되었습니다. 서구 학자로서는 최초로 일본미술사학자가 되었고 - 2차 대전 후 반일 분위기 속에서도 일본으로 건너가 연구에 몰두했다. 이곳은 일본 문화에 대한 코벨의 애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공간이다. 그런데 코벨은 일본의 고대사를 깊이 공부할수록 오히려 그 뿌리를 이루는 다른 존재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알란 코벨 /존 카터 코벨 아들 코벨이 말했어요. 컬럼비아에서 공부 할 때 이전에 일본 예술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다시 생각해 봐야 했다고요. 그동안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다시 검토해야 했습니다. “이게 정말 일본의 것일까? 중국의 것은 아닐까?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온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야를 먼저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코벨은 한반도의 고대국가 중 가야에 주목했다. 그리고 일본 사회에 철저히 은폐되어 있던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가야는 당대 동양 교류사의 연결고리가 되어 줄 존재였다. 신화와 왜곡에 가려져 있던 역사의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가야의 역사에서 가장 신비롭게 여겨지는 것은 김수로의 혼인 설화다. 왕의 신부는 먼 바다 건너 아유타국에서 가야로 왔다. 하늘이 영원을 준 곳 하늘의 소리가 들리는 곳 내 사랑이 있는 그곳을 알고 싶어요 내 사랑 나는 사랑을 찾아 떠나요 가야로 가는 꿈을 꾸었어요 거친 파도를 헤치고 더 넓은 세상 더 새로운 세상을 향해 수로왕이 있는 곳을 향해 신부의 이름은 허황옥.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황금 구슬이라는 뜻이다. 아유타국은 어디일까. 그녀는 어떻게 가야로 온 것일까. 스무 명의 시종, 그리고 진귀한 보물들이 허황옥과 함께 왔다. ‘황금 구슬’의 이름을 가진 신부의 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유리의 단단한 투명함은 오직 인간만이 빚어낸다. 자연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그 신비로움 때문에- 보석과는 또 다른, 최고급 예술품으로 여겨졌다. 유리는 색과 모양이 아닌, 재료나 제작 기법에 따라 구분된다. 만드는 이의 의지가 유리의 종류를 결정짓는 것이다. 그 변치 않는 성질에 빗대어 - 예로부터 유리는 ‘모래와 재에서 태어난 불사조‘라 불렀다. 고대의 유리는 땅의 경계를 넘어 교역품으로, 선물로,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바다 건너 온 ‘황금 구슬’의 신부 허황옥과 유리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을까. 지금의 눈으로 봐도 마음이 홀리는 화려한 유리구슬들이 김해에서 출토됐다. 한반도 고대인들은 금이나 은, 비단보다도 유리 장식품을 유난히 귀하게 여겼다. 그런데, 가야에서는 유리들을 자체적으로 생산했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가야의 유리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십 수 년 전부터 고대 한반도의 유리구슬을 연구해 온 랭턴 박사는 양동리 고분군의 유리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제임스 랭턴 /영국 런던대학교 고고학연구소 김해 양동리 고분은 수백 년 간 이용되었던 무덤입니다. 연구팀은 BC1세기의 유리부터 AD 1세기에서 4세기까지의 유리를 분석했습니다. 약 20%의 유리가 특별한 코발트 블루, 다크 블루 유리였습니다. 김해에서 발굴된 코발트블루 색 구슬은 모두 같은 화학 구성으로 만들어진 유리다. 포타슘과 실리카라는 특정 성분을 갖고 있어 동일한 지역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로마와의 교역의 흔적이 남았는 인도의 고대 유적지, 아리카메두. 해안의 창고터와 전 세계에서 흘러들어온 교역품들이 발굴됐다. 그 중에도 코발트 블루 색의 유리 구슬 꾸러미가 있었다. 제임스 랭턴 /영국 런던대학교 고고학연구소 아리카메두는 인도 동남쪽에서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무역과 관계가 있는 항구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남아시아보다 더 멀리 갔을 수도 있겠죠. 이 아리카메두 지역에서 코발트 블루 유리가 특히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발굴된 유리 유물 중 코발트 블루 유리가 거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인도는 고유의 문화를 지켜가는 것에 자부심을 가진 나라다. 지금까지도 특정 지역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직업을 대대로 세습한다. 이곳은 유리를 만들어내는 마을. 이 자리에서 유리의 업을 가지고 태어난 이들이 아버지, 또 그 아버지로부터 유리를 만들어내는 법을 배웠다. 불길이 뜨거운 인도의 공기를 한층 숨 막히게 달구면- 몇 개의 유리 장신구가 간신히, 완성된다. 오랜 세월 전해 온 인도의 전통적인 유리 제작 방식은, 길게 늘인 관 모양의 유리를 짧게 잘라 구슬 형태로 만드는 것이다. 유리구슬은 전 세계에 사치품을 조달한 인도 상인들의 대표 상품이었다. 이것이 바로 가야에서 발견된 것이다. 제임스 랭턴 /영국 런던대학교 고고학연구소 결과는 흥미로웠습니다. 한국에는 이미 3세기부터 다양한 종류의 유리들이 있었고 아마도 5-6군데의 다른 장소에서 제작된 유리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 일부는 인도에서 온 것들이었습니다. (김해 양동리 고분의) 일부 코발트블루 유리와 다크블루 유리들의 화학적 구성이 인도 유리의 것과 일치했습니다. 인도와 가야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5천여 km나 떨어져 있다. 허황옥은, 유리는, 그 엄청난 거리를 뛰어넘어 인도에서 가야로 온 것일까. 태국 푸카오통은 고대 동남아시아의 교역물이 머무르던 대형 창고 지역이었다. 우거진 풀숲에서 오래된 유리들이 발견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공식적인 발굴이 마무리된 지금도 작은 유리구슬들을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푸카오통에서 나온 유리들 중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코발트 블루 색의 유리다. 반차 퐁파닛 /태국 BIA 이 유리들은 푸카오통 주민들이 농장이나 새우양식장에서 발견해 발굴되었습니다. 연구결과 약 1500년에서 2000년 전의 고대 유리로 추정됩니다. 처음에는 이 유리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연구결과 인도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푸카오통에서는 인도 뿐 아니라 로마의 유리들도 발견됐다. 바다는 서양에서 동양으로 유리가 이동하는 데 중요한 통로였다. 제임스 랭턴 인도에서 만들어진 유리가 태국으로 전해졌고, 확실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아마도 옥에오 같은 베트남 항구로 갔고, 거기서 베트남 북쪽으로, 멀리 남쪽 중국으로, 결국 한국과 일본까지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 군데의 경유지를 거쳤을 겁니다 코발트 블루 색의 유리가 발견된 지역은 모두 바다에 인접해 있다. 김수로의 신부가 인도에서 왔다는 기록이 역사로 밝혀지기 위해서는 아직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머나먼 바닷길을 건너 가야까지 전해진 유리의 길을 쫓다보면- 단순한 신화가 아닌 역사에 힘을 싣게 된다. 수 천 년 전, 바다에 운명을 맡긴 여인이 있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해 모든 것을 걸고 떠나는 이가 존재했음을 전하는, 오래된 기록. 허황옥은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머나먼 곳에 손을 내밀고자 했던 가야인들의 이상은 아니었을까. 나는 저 낯선 여인이 내민 손을 잡을 것입니다. 낯선 것은 언제나 위험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낯선 얼굴로 찾아와 우리의 용기를 시험합니다. 나는 낯선 것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낯설지 않을 때까지. 낯선 이를 두려움도, 흔들림도 없이 받아들인 가야의 힘은 철로부터 나왔다. 태곳적부터 존재했으나 인간이 새롭게 탄생시킨, 철. 하늘로부터, 또 땅 깊숙한 곳으로부터 왔으나 인간의 욕망에 의해 변화해 왔다. 철이 본격적인 전쟁의 시대를 열었을 때, 가야는 철로써, 보다 넓은 땅을 정복할 힘을 가졌다. 풍요로운 물줄기의 양 어깨로 철광산을 가진 땅. 김수로로 상징되는 철기 세력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힘을 키웠다. 철은 청동기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냈다. 철제 무기는 이전의 어떤 것보다 강하고, 유연했다. 절대적인 파괴력을 드러내며 청동 시대에 끝을 고했다. 철기 무사는 크게 휘둘러 찍거나 베는 새로운 검법을 구사했다. 쉽게 휘거나 구부러지지 않는, 길고 단단한 칼은 - 공격범위를 넓히고 회전력을 살려 연속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가야는 철의 권력으로 움직였던 나라다. 그들이 힘을 드러낸 것은 철기 도구의 재료가 되는 덩이쇠, 철정이었다. 가야인들은 전투 대신 이 철정으로 다른 세계와 만났다. 박장식 교수 /홍익대 재료공학과 이런 제품이 다른 나라에도 없으니까, 낙랑에도 수출하고 일본에도 수출하고. 또 한국의 다른 지역에도 수출할 수 있었던 것이 이와 같이 기술체계가 갖는 그 상대우위... 다른 나라에는 그런 아이디어가 없거든요. 그런 기술이 없거든요. 그런데 가야 신라에서 나오는 거는 사가져만 가면은 자기가 뭘 만들고 싶어도 집에 화로하고 망치면 있으면은 만들고 싶은 것을 다 만들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야의, 그 철기 산업으로 인해서 가야가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지 않았겠느냐 철정은 생산 국가의 기준에 따라 규격화되었는데, 가야의 철정은 주변 국가들의 것과 달랐다. 박장식 교수는 내부 구조를 분석, 가야 철정만의 차별점을 밝혀냈다. 박장식 교수(현미경 보면서) 여기서는 탄소가 한 0.77%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탄소함량이 쭉 줄어들어서 이 위치에 오면은 0.1~0.2 이렇게 줄어들게 되죠. 박장식 교수 /홍익대 재료공학과 그러니깐 이 철정을 분석을 해봤어요. 분석을 해보니깐, 연철로 모양을 만들었지만, 모양을 만드는 거에 그치지 않고, 양쪽에 날 부분에 탄소를 집어넣어 줬더라고... 그니깐 탄소를 집어넣어 줬다는 얘기는 이 철정을 사가지고 가면은 도끼도 만들 수 있고, 다른 것도 만들 수 있고, 여러 가지를 쉽게 만들 수 있다는 얘기죠. 고대의 철 제련법은 현대와 완전히 다르다. 뜨거운 제련로에 철광석과 목탄을 번갈아 넣어 섭씨 1000도 이상의 고온을 오랜 시간 유지하는데- 제련로 안의 물질이 모두 녹아야 철광석과 불순물이 분리돼 순수한 철을 추출할 수 있다. 목탄의 양과 바람의 세기로 탄소의 함량을 조정하면, 고대인들이 가장 선호했던 강철을 얻었다. 나온다 나온다 빨리 치워 빨리 쇳물 나온다 쇳물이라고 가야인들은 바로 이 강철을 철정에 적절히 활용, 사용자들이 보다 쉽게 가공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냈던 것이다. 탄소 함유량이 낮은 연철은 물러서 잘 휘어진다. 반대로 탄소 함량이 높은 주철은 충격에 부서지기 쉽다. 강철은 적절한 유연함과 강함을 가진 철로 도구로 활용하기에 적절하다. 농기구나 무기의 날 부분은 대부분 강철로 만들어졌다. 가야의 철기 기술자들은, 철정의 몸통은 연철로 만들고 양쪽 끝은 탄소를 더해 강철로 만들어 가성비를 높였다. 박장식 교수 /홍익대 재료공학과 만약에 양쪽에 다 탄소가 들어가 있으면, 한 쪽 날이 무뎌 지면은 머리를 날로 만들어서 또 쓸 수 있다는 얘기죠. 그러니깐 두 번 쓸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깐 그거를 만드는 기술자들의 입장에서는 양쪽에 탄소를 집어넣으니깐 약간 힘이 더 들어가겠지만, 그거를 사가지고 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넣었을 때하고, 안 넣었을 때하고는 천지차이죠. 값이 반으로 떨어지는 그런 효과가 나타날 수가 있다고. 반 이하로도 떨어질 수 있는 그런 효과가 나타날 수가 있거든요. 그러니깐 이게 굉장한 기술적인 아이디어죠. 공정의 측면에서 봐도 유리하다는 이야기죠. user friendly(소비자 친화적)하고. 왜 user(사용자)들이 이걸 안 사가지고 가겠습니까? 첨단의 기술과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결합된 가야의 철정은 다양한 국가로 팔려나갔다. 오랜 세월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가야가 실존하는 역사로 드러난 것은, NHK 뉴스 이곳은 한국 경상남도 김해에 있는 대성동 고분군 발굴현장입니다. 한국 제2의 도시 부산에서 차로 한 시간정도 걸리는 곳입니다. 여기에서는 작년 6월부터 한국의 대학 조사단이 대규모 발굴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많은 고고학자가 이곳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함께 발견된 원통모양 청동기 역시 일본산 위세품. 가야의 세력을 증명하는 보물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가야의 실체를 믿고 끈질기게 발굴을 추진한 덕이었다. 신경철 명예교수 부산대 고고학과 현기증이 났죠, 사실.. 그 어떻게 학생시절부터 거의 30년간을 찾은 거 아닙니까.. 당시 대성동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 중, 가야가 철의 왕국이었음을 드러내는 중요한 증거는 철갑옷이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철갑옷은 대부분 옛 가야 땅에서 나왔다 가야의 철갑옷은 약 1mm 두께의 철판을 무사의 몸에 맞도록 입체적으로 재단해, 수 십 개의 쇠못으로 이어 붙인 것이다. 최첨단 철기 기술의 집약체다. 환두대도는 이름 그대로 칼 손잡이 끝에 둥근 형태의 머리를 가진 큰 칼. 당대 전쟁에서 가장 큰 활약을 했던 무기다. 환두대도는 길이가 길고 한 쪽에만 날이 있다. 양날검에서 발전한 형태로, 전투 중 실수로 본인이나 동료에게 상처를 입힐 염려가 없다, 또 칼등 쪽을 두껍게 만들어 구조적으로 더 단단하다. 무사 뿐 아니라 일반 병사들도 환두대도를 앞세워 전장에 나갔다. 가야의 칼 제작기술을 이어받은 것이 일본이다. 일본의 칼은 한반도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대대로 전승되는 고대의 칼 제작방식. 예리함을 넘어 아름다움까지 겨루는 것이 바로 일본의 무사들이 원했던 칼이다. 철제 칼의 유입은 일본 고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량 생산된 철제 무기로 전쟁은 이전보다 크고, 격렬하게 벌어졌다. 다케스에 준이치 교수 /후쿠오카대학 역시 철의 입수가 중요했습니다. 그것을 누가 장악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왜국대란 이전이나 그 무렵에는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한반도와 교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외국과의 무역 창구가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을 텐데 중앙에서는 한군데로 통일했을 겁니다. 그 때 계기가 됐던 것 역시 철을 누가 장악하느냐 하는 점이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더 많은 영토와 더 많은 군사를 얻기 위해 칼을 휘둘렀다. 1953년, 언덕의 경사면을 가로지르는 철로 공사 중 우연히 석실이 발견되면서 츠바이오오츠카야마 고분의 발굴 조사가 시작됐다. 마치 구릉처럼 보이는 이 무덤에서 환두대도가 출토됐다. 전장에서 실용성을 보장해 주었던 아주 길지도 짧지도 않은 1m의 길이. 일본의 환두대도는 가야의 환두대도와 구분 되지 않을 만큼 흡사한 모양이다. 이름 그대로 둥근 고리 모양의 손잡이는 마치 찍어낸 듯 같다. 바다를 건너 온 철은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큰 전쟁을 거치며, 일본 고대국가를 형성하는 기반이 됐다. 예로부터 애기 구지봉, 애구지라 불리며 신성시 되었던 구릉에 자리 잡은 대성동 고분은 - 이렇게, 수 천 년간 신화처럼 전해져 온 가야를 역사로 자리 매김하는 증거들을 내어놓았다. 대성동 고분은 1990년부터 2014년까지 총 9차례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확인된 무덤이 무려 304기나 된다. 29호분에서는 북방 유목민족의 이국적인 유물이 출토됐으며 - 91호분에서는 주로 말과 관련된 유물들이 나왔다. 그 중에는 중국과는 전혀 다른 양식의 마구도 있어, 가야의 문화의 독자성을 드러낸다. 같은 무덤에서 발견된 유골은 순장 풍습을 보여주는데, 모두 북방 유목민족 고유의 문화다. 일본 문물의 보물창고로 불리는 88호분에서는 일본의 위세품이 대거 출토됐다. 대성동고분군의 지배세력이 일본과의 교류를 주도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신경철 명예교수 반도 남부 역사를 정확하게 규명할 수 있었다. 가야 역사뿐만 아니라 신라사도 마찬가지고, 나가서 백제사도 마찬가지고, 그 다음에 일본의 고대사도 마찬가지고.. 그런 의미가 있죠. 어떤 의미에서는 동아시아의 3세기후반, 4세기 때 유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핵심이죠. 대성동고분군의 유물들은 가야가 중국, 북방, 일본, 서해와 남해안에 이르는 교역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증거다. 가야의 숨겨졌던 역사를 드러내는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 해, 철기기술 발원지에 대해 파격적인 주장이 나왔다. 중국을 유일한 발원지로 보는 현재의 이론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박장식 교수 중국식 기술 체계가 보일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 가서 분석을 해보니깐, 중국하고는 다른 기술체계가 사용이 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어요. 인도에서 똑같이 보인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깐 시기적으로 만500년, 600년 이런 시대 유적지, 성문화유적지에서 철기가 굉장히 많이 나오잖아요. 거기서 나오는 철기를 분석 해봐도 가야, 신라하고 똑같아요. 인도의 고대 철기는 고인돌 유적지 비데르바에서 발굴 됐다. 한번도의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익숙한 모습의 돌무덤이다. 깐띠 파와르 박사 데칸 대학 이 고인돌은 인도에서 가장 큰 고인돌 중 하나입니다. 주변에 보호벽이 세워진 고인돌은 처음 발견되었습니다. 어떤 고인돌도 주변에 보호벽이 세워진 경우가 없었습니다. 거대한 보호벽이요. 이 지역에서 우리는 동전들과 인간의 뼈, 철기 유물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철기 유물들 중에는 철로 만든 못, 철 조각들 및 찌꺼기 등이 있었습니다. 귀했던 철기를 함께 묻은 고인돌은 왕족과 같은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데칸 대학에서는 인도 초기 철기 시대를 연구한다. 남인도 전역의 거석문화 지역에서 발굴된 철기 유물들이 자료가 된다. 비데르바 지역의 대장간에서는 지금도 고대의 제련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바산트 신데 교수 데칸 대학 철을 강하게 만들고 싶으면 재료에 탄소를 인공적으로 추가하면 됩니다.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기술을 마스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철을 가공할 때 인위적으로 탄소를 추가해 결과물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가장 단순한 원리로 가장 강한 철을 얻는 기술. 그런데 연구팀은 가야의 철정과 아주 비슷한 인도의 철정을 발견하게 된다. 바산트 신데 Vasant Shinde 교수 푸네 대학 우리가 발견한 철제도구들에 대해 과학적인 분석을 진행했는데 흥미롭게도 여기에서 사용된 제련 기술이 한국에서 사용되었던 제련기술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초기 철기 시대에 인도와 한국 사이에 교류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박장식 교수 그러니깐 철광석에서 철 소재, 연철소재를 뽑아내는 그 기술이 같고, 그 다음에 그거를 이용을 해서 완제품을 만들 때에 열처리라든지, 탄소를 집어넣어주는 재공법이라든지.. 이런 것이 똑같은 거죠. 그러니깐 한 마디로 똑같은 거예요. 똑같은 거라고.. (인도 교수 인터뷰) 박장식 교수 어떻게 한반도, 유라시아 대륙이 제일 끝에 있잖아요. 인도하고는 별로 접촉 가능성이 없었을 법한데, 두 지역 사이에서 보이는 철기 기술 체계는 똑같다. 똑같다.. 이거를 우연으로 돌리기에는 굉장히 이게 비과학적인거 같아.. 그니깐 뭔가 연결이 있는 거죠. 가야가 낯선 세상을 향해 뻗어갔던 근거지. 가야인들의 대규모 거주지가 일반에 공개됐다. 모습을 드러낸 건물터 10여 곳은 4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이다. 민경선 학예사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보시는 것이 건물지인데, 가야시기에 건물지인데, 이 바깥으로 동그랗게 돌아가는 것들이 기둥구멍들입니다. 그러니깐 외벽의 기둥구멍들이고, 이런 벽체들이 같이 남아있는 상태이고요. 그 내부에는 바닥에 이런 점토를 깔아서 바닥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15m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러면 이 지역에서는 가장 큰 건물입니다. 규모로 볼 때 상당한 유력자가 살았던 공간인데다, 의례에 사용됐을 법한 고급 토기들도 쏟아져 나왔다. 단순한 상류층의 집터가 아닌, 당대의 왕궁터로 추정하고 발굴을 이어가고 있다. 궁궐 동북쪽 평지에서 수로왕의 장례를 치렀다는 기록 그대로 위치한 봉황동 왕궁터 추정지- 역사의 조각들을 맞추어, 번성한 가야를 떠올려 본다.. 철의 왕 김수로가 허황옥을 신부로 맞아 살았던 왕궁. 은밀한 곳에서 강철을 생산하는 대장간 너머로 수많은 배들이 오가는 항구와 창고, 풍요로운 백성들의 마을이 이곳에 있었다. 2014년, 봉황대에서 발견된 고대 선박 부재는 당대 가야의 모습을 완성하는데 또 하나의 조각이 됐다. 선박의 생산지를 알아내기 위해 나무의 수종을 분석했다. 선박 부재는 점토로 덮여 있어 공기가 차단돼 - 천 700여 년을 잘 보존된 상태로 잠들어 있었다. 곧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이광희 박사 좀 많이 놀랐습니다. 왜냐면은 맨 처음에는 일본 선박부재라고는 저희가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 수종분석결과 우리나라에서 매우 작게 자라는 녹나무가 확인이 됐고, 그 다음에 일본 고유 수종인 삼나무가 확인이 돼가지고, ‘이 배는 일본 부재일 가능성이 높다’ 발굴된 선박 부재를 토대로 실물 복원 작업이 시작됐다. 상부 외판으로 추정되는 선박 부재의 크기로 볼 때 실제 선박의 길이는 15m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 크기라면 30명 정도의 인원이 탑승할 수 있다. 가야의 배는 목재를 설계해서 완벽하게 짜 맞춘 구조선이었다. 많은 인원과 물자를 싣고 먼 바다를 항해하는 대형선박이 항구를 부지런히 오갔다는 의미다. 당시 가야가 국제해상교역의 중심 국가였고, 봉황대 유적이 국제항이었음을 증명해준다. 가야는 주변국보다 훨씬 앞서 국제 해상 교역을 주도했다. 하늘의 끝, 바다의 끝에서 가야를 찾아온 김수로와 허황옥이 꿈꾸었던 나라다. 김해시와 가락종친회는 2000년부터 아요디야 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아유타국으로 추정되는 곳 중 하나인 인도 아요디야에 매년 3월, 5천여 km 떨어진 낯선 나라를 방문하고 있다. 낯선 이들이 한 자리에 어울리는 축제의 밤이다. 역사의 일부를 공유했을지 모른다는 인연에, 공들여 준비한 환영 공연이 이어진다. 김해시 파견단이 아요디야를 방문한 건 허왕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두 지역의 교류를 돈독하게 만드는 행사다. 허성곤 김해시장 당당하게 대한민국에는 고대사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가 있었다는 것이 입증되어 가고 있는 시점에 그 중심에 아주 신비로운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사랑이야기가 있습니다. 문화교류나 전통을 뛰어넘어서 인도가 13억 인구의 거대 시장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나라 경제발전에도 도움이 되고 초석이 될 수 있도록... 아주 낯선 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결코 낯설지 않다. 수 천 년 전부터 연결돼 온 역사가, 다시 새로운 세상을 향한 길을 여는 힘을 실어준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했다. 강한 자에게도 변화하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유연함이 필요했다. 결코 썩지 않는 종이위에, 절대 지워지지 않는 글씨처럼, 가야의 철정에는 가야의 모든 것을 담아야 합니다. 우리의 철을 실어 나르던 모든 길이 막혔습니다. 우리도 무기를 들고 땅의 길을 지켜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가진 철을 무기로 바꾸어야 합니다. 땅의 길 하나를 잃었다면, 바다의 길 두 개를 내야 합니다. 피가 아니라 땀으로 길을 내야 합니다. 받아들이고 - 다시 나아가는 것. 그 오랜 의미를 기억해 내는 이들이 오늘의 역사 또한 살아 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