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이미지 및 저작권 정보(N2L)
대표이미지 | 저작권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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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 | 국가유산진흥원 | ||
전자자원소장처 | 한국문화재재단 | ||
공공누리 저작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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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L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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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파일 및 자원정보(N2R)
번호 | 파일명 | 파일크기 | 다운로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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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문화유산X파일_근대건축유산시리즈_대구 3.1운동_CHF_1920X1080.mp4 | 262.15 M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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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본 정보(N2C)
UCI | I801:1808002-001-V000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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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민족의 독립을 외치다, 대구 3·1 운동 | ||||||||||||||
콘텐츠 유형 | 동영상 | 언어정보 | 국문 | ||||||||||||
생산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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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자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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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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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키워드 | 근대건축유산;근대건축;문화유산X파일;대구;3.1운동;청라언덕;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90계단길;대구3.1만세운동길;대구·경북 항일독립운동기념탑 | ||||||||||||||
내용 | ▶민족의 독립을 외치다, 대구 3·1 운동 19세기말 대구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학교와 병원, 교회 등의 근대건축물들이 지어지기 시작했고 그들의 토착화 노력은 사택과 학교의 건축양식에도 드러난다. ▶ Why? - 대구 선교사 주택은 왜 서양식 건물에 기와지붕을 올렸나? - 삼엄한 감시 속에서 학생들은 독립선언문을 어떻게 운반했을까? - 조양회관은 어떻게 한국인 건축가가 설계할 수 있었나?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3월 8일 대구로 이어졌다. 대구지역 근대건축물을 살펴보고 그곳에 담긴 대구만세운동의 역사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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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정보 | Na / 100년 전 그날, 일제의 부당한 침략에 항거하는 목소리가 전국에 울려 퍼집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의 함성은 3월 8일 대구로 이어졌고, 의로움으로 일어선 그날의 만세운동은 근대 대구 100년의 역사 속에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 민족의 독립을 외치다 - 대구 3.1운동 -------------------------------------------------------------------------- 김연수 / 대구 근대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인 곳을 말하라면 바로 이곳 청라언덕일 것입니다. Na / 수줍은 청년의 마음이 담긴 노래 “동무생각”은 오랫동안 청소년들의 애창곡이었습니다. 푸를 청, 담쟁이 라, 노랫말 중에 나오는 ‘청라’는 푸른 담쟁이란 뜻입니다. 김연수 / 100여년 전 푸른 담쟁이로 덮여있던 청라언덕 주위에 흩어져 있는 근대건축유산들은 191 9년 봄 대구에서 일어났던 3월 만세운동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Na / 옛 동산병원, 지금의 계명대 동산의료원 경내에 있는 청라언덕에는 마치 시간을 멈춘 듯 100년 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선교사 주택이 있습니다. 자막 / 선교사챔니스주택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의료박물관 Na / 19세기 말 대구에 온 선교사들은 청라언덕이 있는 이곳 동산과 그 주변에 병원과 사택, 교회와 학교를 지었습니다. 1910년경에 만들어진 챔니스 주택은 당시 대구에 거주했던 미국인들의 주거양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자막 / 선교사스윗즈주택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선교박물관 Na / 바로 옆 스윗즈 주택 역시 1910년대에 만들어진 건물인데요, 특이한 것은 이 주택의 지붕입니다. 서양식 벽돌 2층 건물에 한국식 서까래와 한식 기와를 이은 박공지붕을 얹었습니다. 김연수 / 제가 돌아보니까 서양식 주택인데 한옥처럼 기와를 올려놓았습니다. 아주 특이한 양식인데요, 대구 선교사 주택은 왜 서양식 주택에다 기와를 올렸을까요? -------------------------------------------------------------------------- ▶ Why ① 대구 선교사 주택은 왜 서양식 건물에 기와지붕을 올렸나? -------------------------------------------------------------------------- 자막 / 서양선교사들의 현지 토착화 노력 기와지붕을 올려 친근감과 유대감 표시 윤우찬 /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학예사) 그 당시 선교사분들이 생활하기 위해서 지어진 건물로서 서양에서 왔지만 한국 사회에 토착화 노력의 일환으로서 친근함과 유대감을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한 가지 방법으로서 지어진 건물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자막 / 선교사블레어주택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교육역사박물관 Na / 당시로는 첨단공법이었던 콘크리트 기초 위에 붉은 벽돌을 쌓은 블레어 주택은 조금 더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이 건물 2층에 대구 3.1운동 역사관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인 선교사 사택에서 만나는 100년 전 그날, 대구 만세운동 당시의 기록들과 대구 사람들이 들었던 태극기를 전시해 놓은 공간입니다. 김연수 / 돌아보니 3.1운동 당시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자료가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일대가 독립운동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네요 Na / 100년 된 선교사 사택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대구 만세운동의 역사를 간직한 박물관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청라언덕 아래 자리잡은 계성학교. 자막 /계성학교핸더슨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7호) 계성학교 5대 교장 핸더슨이 직접 설계 학교 본관 건물, 중세 서양 성곽 모습 차용 Na/ 블레어 선교사가 모금을 통해 마련한 자금으로 지은 본관 핸더슨관은 2개의 탑이 인상적인 고딕 양식 건물입니다. 자막 / 계성학교맥퍼슨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6호) 한식기와를 얹은 한양 절충 건물 현대음악 선구자 박태준·현제명 수학 Na / 모임지붕에 한식 기와를 얹은 맥퍼슨관은 건축 당시에는 과학실과 음악실로 사용됐습니다. 이곳은 현대음악의 선구자 박태준, 현제명 선생이 공부했던 곳입니다. 자막 / 자계성학교아담스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5호) 1908년 지은 영남지역 최초 양옥건물 초대교장인 선교사 아담스가 설계 Na / 아담스관 역시 2층 건물에 기와를 얹었습니다. 계성학교의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인 아담스 선교사가 직접 설계를 맡았고 공사는 중국인 벽돌공과 개항기 때 일본에서 온 목수들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교장 / 1908년에 지어졌습니다. 3.1운동보다 훨씬 앞이죠. 성벽 돌을 가져다가 건물을 지었는데... Na / 계성학교 아담스관이 특별한 이유는 이 지하공간 때문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선생님과 학생들이 등사기로 독립선언문을 인쇄했습니다. 장욱 / (대구 계성중학교 교장) 이곳이 숨겨진 공간이니까... 여기서 선생님들이 서울의 소식을 듣고 학생들을 깨우쳐서 여기서 가져온 등사원고를 다시 등사한거죠. 다시 본을 떠서... Na/ 1919년 3월의 어느 날, 이 작은 비밀공간에 모였을 학생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김연수 / 그때는 서울에서 3.1운동이 벌어진 직후였기 때문에 일본 경찰의 감시가 아주 삼엄할 때였습니다. 학생들은 어떻게 독립선언서를 들고 시장까지 갔을까요? -------------------------------------------------------------------------- ▶ Why ② 삼엄한 감시 속에서 학생들은 독립선언문을 어떻게 운반했을까? -------------------------------------------------------------------------- 자막 / 시내 도로를 피해 청라언덕길 이용 숲 속 오솔길로 이동. 일경의 감시 따돌려 장욱 / 여기 우리 학교에서부터 전부 솔숲이었습니다. 지금은 좀 잘 보이지만 그때는 숲이 우거졌고 선교사주택이 있는 곳이 청라언덕이었거든요 그곳에서 내려가는 길이 90계단길이죠. 그 길을 통해서 갔는데 여기서 숲속으로 이동해야 일경들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쪽으로 이동하게 된겁니다. 자막 / 청라언덕 90계단길 (대구 3.1운동길) Na / 거사 당일,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실은 달구지가 청라언덕을 넘어 이곳 90계단길을 내려가 집결지인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당시에는 계단이 없고 비탈진 산길이었다고 합니다. 1919년 3월 8일 오후 3시, 대구지역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계성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대구 시내 큰 장, 지금의 서문시장에 집결했습니다. 자막 / 대구 3.1독립운동발원지 표석 김연수 / 지금은 시장이 저쪽으로 좀 옮겨 갔는데요 당시에는 이곳이 대구에서 가장 큰 시장이 있었던 곳입니다 여기서 독립선언서를 낭독을 했습니다. Na /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손에 든 대구 사람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독립만세의 함성은 이후 경상북도 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3.1만세운동의 여파로 일제는 기존의 강압적인 통치에서 한발 물러나 문화통치정책을 추진하게 되고, 이 기간 중에 대구에는 뜻깊은 건물이 하나 들어섭니다. 자막 / 대구 효목동 조양회관 (등록문화재 제4호) 항일 민족운동을 펼친 동암 서상일을 비롯한 민족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을 고취할 목적으로 1922년에 건립 Na / 아침 해가 비치는 곳이라는 뜻의 조양회관은 대구지역 청소년과 민중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계몽운동을 펼치기 위해 건립한 근대교육의 산실입니다. 김연수 / 일제강점기 대구 시내 청라언덕에 지어진 건물들은 대부분 외국인들의 손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조양회관은 우리 손으로 설계되고 건축된 것입니다. -------------------------------------------------------------------------- ▶ Why ③ 조양회관은 어떻게 한국인 건축가가 설계할 수 있었나? -------------------------------------------------------------------------- 자막 / 민족교육을 생각하며 우리 손으로 건립 한국인 건축가가 서양식 벽돌건축 차용 안창모 /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 / 문화재위원) 조양회관은 대구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서상일 선생이 지역의 인사들과 힘을 합쳐서 지은 건물이죠. 특히 그 건물이 주목할 만한 것은 당시에 민족교육을 염두에 두고 지었는데 그 건물의 모습이 서양의 전형적인 벽돌건축을 따르고 있다는 겁니다. 당시 그런 벽돌건축을 직접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한국인 건축가는 흔치 않았던 시절인데 윤학기라는 분이 서양건축을 접했던 경험이 있었던 것 같고 그런 경험을 가진 실력으로 당시의 보편적이었던 벽돌조 건물을 지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명환 / (광복회 대구지부장) 우리가 우리의 뜻을 펴기 위해서는 그 무엇이 있어야 되겠다 건물을 생각한 거지요. 그걸 볼 때 이 조양회관은 대구사람만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의 보물입니다 Na / 대구의 독립운동가들이 뜻을 모아 세운 조양회관은 이 지역 항일운동과 민족 계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역사의 부침과 함께 순탄치 못했던 세월을 지나 달성공원에서 현재의 자리인 망우공원으로 이전,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자막 / 대구·경북 항일독립운동기념탑 Na / 조양회관 동쪽에는 커다란 화강암으로 만든 대구·경북 항일운동기념탑이 있습니다. 1945년에 맞이한 광복의 의미를 기려 45m로 지어진 기념탑에는 대구·경북 지역의 수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조국의 광복은 스스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이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 자막 / 이상화 고택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항일문학가 이상화 시인이 1940년대에 거주한 집 김연수 / 나라를 잃은 서러움과 슬픔으로 가득한 시대를 넘어 마침내 봄은 왔습니다. 아득한 절망감 속에서도 사람들은 때론 울며 때론 웃으며 하루하루를 살았을 것입니다.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이 근대건축물 속에 스며 있습니다. 긴 여정을 통해 100년 전 시간여행을 하고 난 지금, ‘근대’라는 우리의 역사를 조금 더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합니다. 자막 / 항일운동의 뜻이 새겨진 대구의 근대건축 100년의 역사를 간직하다. |